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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두 얼굴 (마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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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16:21-24
제목 : “베드로의 두 얼굴”

영국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지킬박사는 특별한 약품을 발명하여서 이중인간(二重人間)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어떤 약을 먹으면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약을 먹으면 악한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킬박사는 자기가 발명한 그 약을 먹고 낮에는 존경받는 신사 지킬박사로 살아가고, 밤이 되면 야수적인 몬스타 하이드씨가 되었다가, 새벽이면 다시 지킬박사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하이드로 변한 그가 살인을 하고 지킬박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다 지킬박사로 돌아왔지만 한쪽 손만은 하이드의 손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 손은 곱고 전문적인 기술로 연마되어 남을 돕기도 하는 지킬박사의 아름다운 손이요, 다른 한손은 흉악하고 잔인하고 짐승처럼 털이 난 하이드의 손으로 영원히 남게 됩니다.
지킬박사는 독백합니다. “처음에는 내게서 지킬의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이 어려워 나의 모든 연구를 거기에 쏟아왔는데 이 노력이 차차 이루어져 하이드의 요소가 점점 들어오면서부터 본래의 나는 점점 사라지고 악한 하이드가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본래의 지킬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나의 본래의 모습인 지킬로 돌아갈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낮에는 지킬박사로, 밤에는 야수적인 하이드, 두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혹시 우리의 현실은 아닙니까? 한 인격 속에서 이 두 얼굴을 왕래하게 되면 결국은 야수적인 하이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쪽으로 닮아가면 좋겠는데 이 양쪽을 왕래하다가 보면 나쁜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두 얼굴 사이에서 고민하고, 하이드의 얼굴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몸부림친 경우는 없습니까?
오래 전에 ‘두 얼굴의 사나이’ 라는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때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지면 몸이 막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면 옷이 찢어집니다. 얼굴이 괴물처럼 변하고 괴력을 발휘해서 그 위기를 탈출해 나가는 삶을 대조시켰습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지킬박사만 두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만 두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베드로의 두 얼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두 얼굴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가면을 바꾸어 가면서 살아갈 때가 없쟎아 있습니다. 낮에는 이런 마스크를 쓰고, 밤에는 저런 마스크를 바꾸어 쓰고 다닐 때가 있습니다. 교회와서는 성도라는 얼굴을 가지고, 교회 바깥에서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 답지 아니하는 얼굴을 바꾸어 쓰고 생활할 때가 있습니다. 부산에서는 이런 마스크를 쓰고, 서울가면 전혀 다른 마스크를 바꾸어 쓰고 다닐 때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개의 마스크를 찢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하나의 마스크, 하나의 얼굴, 정말 진실하고 참되고 성도다운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습 속에 천사의 얼굴이 보여지고,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져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베드로의 두 얼굴

베드로의 한 얼굴을 보세요. 베드로는 안드레의 형제입니다.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중의 한사람이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모습, 그 희한한 모습, 그 영광스런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야이로의 집에 예수님과 같이 들어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를 지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죽을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고 맹세를 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천국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또 다른 얼굴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쯤 되면 알아들을 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이야기 했더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고 나섰다가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제자들을 끌고 3년 전의 갈릴리 바다로 다시 고기잡으러 갔습니다.
똑같은 베드로인데 어느 때는 극찬을 받아서 천국열쇠까지 받았고 어느 때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요, 하나님의 원수요, 악의 상징인 사단이라고 책망을 받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같은 사람이 베드로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또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할 수 있는가?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들도 이런 두 얼굴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천사처럼 거룩해 보이는데 어떤때 는 악마처럼 추악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성자처럼 살아갈 때도 있는데 어떤 때는 동물처럼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비극이 있다” 고 했습니다. 짐승처럼, 악마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진실하게 참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살아온 결과를 뒤돌아 보면 때로는 사단처럼, 때로는 짐승처럼 살아왔을 때가 있었음을 깨닫고 자책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도 될 수 있고 또 저렇게도 될 수 있습니다. 사단도 본래는 광명한 천사였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다가 추방되어 사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나님처럼 살아가도록 지음받았는데, 사단의 도구가 되어 사단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2. 두 얼굴은 마음에 채워진 것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인간이 왜 이렇게도 쓰여지고 저렇게도 쓰여질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질그릇입니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겨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 그릇 속에 있는 내용물이 문제입니다. 같은 삼성자동차 SM5이지만 518, 520, 525, 그 속에 장착된 엔진에 따라서 성능이 달라집니다. 엔진이 고장나면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 참 그릇이 크다, 도량이 넓다” 고 말합니다. ‘나’라는 이 그릇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나는 이런 사람도 될 수 있고 저런 사람도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초대임금 사울을 보세요.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임금으로서 외모가 걸출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겸손해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선택된 이후에 “나는 임금 안되겠습니다” 하고 가구 뒤에 숨어서 사양했던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선지자들 무리 중에 끼여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예언도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서 막강한 적군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 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니까 악신이 그를 주장하고 그의 마음을 번뇌케 했습니다. 사울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타지 아니하면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발광했습니다. 나중에는 귀신에게 가서 자기 앞날을 묻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그는 자살하고 맙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했을 때는 선지자처럼 예언했습니다. 천사와 같이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그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는 미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두 얼굴은 누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 졌던 것입니다.

신약에 오면 가룟유다의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어 가장 신임하는 자에게 맡기는 재정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그 마음을 빨리 물리쳐야 되는데 사단이 넣어주는, 예수님 팔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회개하도록 10절과 18절에 암시를 했습니다. <이 무리들 중에서 나를 팔, 배신할 제자가 있을 것이다>. 21절에 와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아! 이 못난 놈이 예수님을 팔려고 마음 먹었더니 예수님께서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회개하고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했으면 되었을 텐데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모르는 척 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근심합니다.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시자 “선생님! 제가 예수님을 팔 사람입니까?”하고 예수님께 한사람 한사람 묻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에 유다가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예수님을 팔겠습니까?” <그래, 네가 나를 팔 사람이다.> 이렇게 직접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6절에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면서 떡을 찍어 가룟유다의 입에다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유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27절에 보면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가룟유다의 마음 속에 사단이 들어가니까 사단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후회하여 목매어 자살하고 창자가 터져서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같은 유다 안에 사단이 들어가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인정받는 제자였습니다. 사단이 그 마음에 들어갔을 때는 스승을 파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악의 화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룟유다의 두 얼굴은 누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마음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든지, 아니면 악한 영들이 원격조종을 하든지, 아니면 사단이 직접 들어가서 주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는 ‘박효진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교회에 두 번이나 오셔서 간증을 했는데요, 1995년 11월, 박효진 장로님이 믿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호성’이라는 청년이 사형집행을 당했습니다. ‘이 호성’은 서울 장위동에서 일가족 5명, 그것도 자기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 조카, 이렇게 5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범인입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사단이 3일 밤낮을 잠을 재우지 아니하고 ‘네 가족을 죽여라, 죽여라’고 계속해서 괴롭히며 ‘망치는 어디 있다, 칼은 어디 있다, 시체를 묻을 삽은 어디 있다.’고 다 가르쳐 주면서 죽이라고 목을 조르고 못살게 했습니다. ‘이 호성’은 사단의 강요에 못 이겨서 자기 가족 5명을 살해하고 암매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암매장 한 현장을 보고 수사관들은 한 사람이 한 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공범이 있는 줄 알고 찾아보았지만 공범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하는 말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사단이 도와 주겠다며 시체를 묻으라고 하면서 힘을 주는데, 삽으로 땅을 팔 때 마치 모래를 파는 것처럼 쉽게 파졌다는 것 입니다. 그는 자기 가족 5명을 죽이고 암매장했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사단이 이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 죽어라, 무슨 낯짝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 조카를 죽인 네가 무슨 낯짝을 가지고 살려고 하느냐, 죽어라, 죽어라” 계속해서 죽으라고 충동질을 했습니다.
정말 죽으려고 자살을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박효진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기도를 받았습니다. 사단이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되었습니다. 교도소 안에는 그가 전한 복음으로 예수믿는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이 어찌 그리 아름답습니까? 세상에 죄가 많고 또 저같은 죄인이 있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눈으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당당하게 찬송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호성’ 이라는 청년의 두 얼굴은 누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그의 얼굴은 살인마였습니다. 흉악범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단의 얼굴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지배하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나의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사람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내 얼굴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사단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데서, 아무도 모르는데서만 사단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을 보세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한다고, 최선을 다한다고, 충성한다고 한 것이 예수님 보시기에 사단의 얼굴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단의 얼굴을 쓰고 교회를 방해하고 교회 진로를 막고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3. 내 마음을 성령님이 지배하게 합시다.

어떤 얼굴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여기서는 이런 얼굴로, 저기서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까? 우리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천사와 같은 얼굴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단이 심어주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사단의 얼굴을 보이면서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얼굴이 결정되어 집니다. 여러분은 때로 자기 얼굴이 사단의 얼굴로 변하는 것같아 고민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이런 얼굴로 살아서는 안되는데, 이런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고 그렇게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까? 지킬 박사처럼 자기 얼굴이 하이드로 변하고 하이드의 손으로 변한 것 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습니까?
사도바울도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자기 속에 두 개의 자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절규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마음속에 선을 행하려고 하는 자기와 진실을 행하려고 하는 자기,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자기,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기, 충성하려고 하는 자기, 헌신하려고 하는 자아가 있는 반면에, 같은 마음 속에 악을 행하려고 하는 자기, 거짓된 자아, 불성실한 자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고 하는 자아가 동시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자아가 진실된 자아를 이기고 멸망으로 끌고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고민을 한 적은 없습니까? 진실되게 살고 싶습니다. 참되게 살고 싶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예수 잘 믿고 살고 싶습니다. 충성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지지 않아서, 다른 얼굴로 살아져서 고민하고 괴로워한 적은 없습니까? 술 끊고 싶습니다. 담배 끊고 싶습니다. 마약이나 더러운 습관 끊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른 얼굴로 살아져서 고민하고 있지는 않숩니까? 왜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마음은 내 몸 속에 있어서 내 것 같지만 내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께서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우리 속에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우리나라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미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내 몸 안에 있지만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배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지배하도록 만들어 놓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아니하고 내가 들어 있다든지, 다른 것으로 채우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가 악한 사단의 얼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 마음을 하나님이 지배하느냐, 아니면 악한 영이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얼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조종을 받을 때에는 사단의 얼굴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는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살아서 천사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했던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했듯이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성령님을 모시면 우리도 이와 같이 승리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사단이 악한 생각을 넣지 못하게 사단이 들어오지 못하게 늘 우리 마음을 귀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진공상태를 허락치 않습니다.

사울에게 사단이 들어가서 결국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해 죽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어떻게 죽습니까? 자살해 죽습니다. ‘이 호성’이도 죽으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단이 들어가면 죽고싶은 마음이 생겨요. 여러분들 마음 속에도 때대로 ‘죽고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는 마음이 아니고 사단이 주는 생각인 줄 알고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사단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탐욕하는 생각을 마음 속에 막 집어 넣습니다. 이런 것들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는 사단이 직접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그 마음이 얼굴로 나타나면 사단의 얼굴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정말 귀한 것들, 예수님으로, 성령님으로, 말씀으로, 믿음으로 충만히 채워 놓아야만 사단이 주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실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실 때에, 말씀으로 채워질 때에 사단의 얼굴이 사라지고 천사의 얼굴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끊지 못했던 것이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해결하지 못했던 습관들이 고쳐지게 될 것입니다. 변하지 않았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 말씀, 믿음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때 이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습니다. 어떤 권능요? 사단을 쫓아내고 성령님을 모시는 이런 권능을 얻게 됩니다. 성령님 모시는 삶을 살게 될 때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천사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두 개, 세 개, 네 개 있는 얼굴 때문에 내가 고민하며 이 얼굴들을 벗어버리려고 발버둥친 적은 없습니까? 우리 속에 어떤 존재가 거하느냐에 따라서 내 얼굴이 달라지는 줄 알고 오늘 이 시간 예수그리스도를 내 가슴 속에 모셔서 악마의 얼굴들을 찢어 버리고 성령님을,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심으로 내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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