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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의 힘, 우리의 힘 / 삿 1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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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6:28-31
"삼손의 힘, 우리의 힘"

오늘 저녁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독일과 브라질의 결승전'을 끝으로 6월 한달을 뜨겁게 달구었던 '2002 한일 월드컵'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월드컵으로 시작해서 월드컵으로 끝나는 이 6월 한 달은 전에 맛보지 못한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 나날들이었습니다. 월드컵 참가 48년 역사상 감격의 첫 승리도 거두었고, 거기다 상상조차 못했던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는 가운데 온 국민들이 자긍심과 화합과 감격을 만끽했던 한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이 늘 그렇듯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원호의 달',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이 무거운 6월이 월드컵으로 그 무게가 좀 덜어지려나 했었지만 여전히 6월은 우리에게 삶의 무게를 더한 채 지나가고 있습니다. '6.13 지방선거'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권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또 어제는 '북한과의 서해 교전'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과 그 이후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 속에서도 '심판 판정에 대한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6월을 보내면서 제게 떠오른 단어는 바로 '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힘...' '실력, 체력, 권력, 무력, 국력...' 이 모두의 공통점은 바로 '힘'입니다. 연예인 몇몇이 방송에서 '한국이 실력으로 4강에 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가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4강에 오르고도 '실력이 아닌 심판판정 덕이니 운이니' 하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들의 경우 또한 국력이 약한 우리가 불평등한 소파(SOFA) 협정의 덫에 걸려 번번히 억울한 일만 겪는다는 여론이 팽배합니다. 그리고 어제 연평 앞바다에서 일어난 남북의 불행한 해상무력충돌도 다 힘겨루기에서 기인되는 일들인 것입니다. 정계에서는 '대권'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힘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생이 제일 불행한 인생입니다. 실력도 있어야 하고, 기술력도 있어야 하고, 국력도 더욱 신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힘이 다 같은 힘이 아닙니다. 깨끗한 힘도 있고 더러운 힘도 있습니다. 실력으로 말미암는 힘은 깨끗한 힘이지만 로비로 말미암는 힘은 더러운 힘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로부터 나오는 힘이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힘인지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힘의 근원과 방향이 중요한 겁니다. 사실 힘이 없어서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힘의 남용과 오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어디서부터 우리의 힘은 비롯되는 걸까요?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삼손은 남들이 따를 수 없는 강한 힘의 소유자로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 시대에 삼손을 이길만한 힘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벽한 힘이었습니다.
행17:2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사는 존재'라고 아덴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이 힘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삼손은 특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나실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13:5절에 보면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려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자였습니다. 그 목적 하나로 인해 삼손이라는 인생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결코 나실인답지 못했습니다. 그 힘으로 인해 영웅적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동족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 힘으로 공연한 분란이나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뢰가 가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실인 답지 않게 한 이방 여인을 정열적으로 사랑하여 아내로 맞고 그의 경솔한 힘의 남용으로 아내와 장인까지 잃게 됩니다. 나중에는 드릴라라는 한 블레셋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녀에게도 배신을 당하여 그 긴 머리를 깎이우고 두 눈을 뽑히우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나중에 그 힘이 다시 돌아오고 그 힘으로 수많은 블레셋 원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복수를 하게 됩니다만은 그 자신도 그들과 함께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삼손의 생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남다른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남다른 힘으로 얼마든지 멋지게, 보람있게 살 수 있었음에도 그런 아름다운 길을 가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삼손의 이야기에 빨려드는 것은 성공적인 여느 장사들의 영웅담보다는 그의 비극적인 삶 속에서 훨씬 더 자신에게 와 닿는 그런 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쉬움과 연민이 가는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멋지게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살지를 못했으니 얼마나 아쉬운 일생입니까?...

삼손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나실인'으로 정해집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에겐 몇 가지 지켜야 할 준수사항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술을 먹어서는 안되며, 둘째는 머리를 깎아서도 안되며, 셋째는 시체를 만져서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는 평생을 조심스럽게 삼가며 금욕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보상으로 남다른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손은 이러한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비극의 씨앗은 여기서 배태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삼손은 자기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나실인으로 정해져서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을 늘 못마땅해하고 답답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멋대로 행동합니다. 기존의 가치나 도덕과 예절에 도전하는 반항아로 자라갑니다.
보십시오. 그가 아내로 맞이한 여자나 나중에 그가 사랑하게 된 드릴라 모두 하나같이 이방 여인들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여인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그 결혼을 극구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삼손은 자기가 택한 불행의 길을 가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삼손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삿14:3절에 보면 그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정들을 엄격히 요구할 이스라엘 여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규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이방 여자에게서 그런 간섭 안받고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겁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그의 일생은 망가져 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창창한 미래와 함께 수많은 유혹이 있는 길을 가야할 우리 젊은이들은 이 삼손의 생애가 주는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권고를 경홀히 여기지 마세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지 마세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신의 생을 긍정하며 비전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의 제목들임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가장 잘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잊지마세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도 그랬지만 이 삼손도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보여주는 실패자 삼손의 모습입니다. 그는 나실인으로 살았어야 할 사람입니다. 만일 나실인으로 살기를 원치 않았다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존재의 이유인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거부합니다.
그는 죽은 사자의 주검에 벌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꿀을 떠서 먹음으로써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나실인 규정을 어깁니다. 또 창녀의 집을 드나들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격분하여 무고한 사람을 서른 명이나 죽이고 노략질을 하고 쌓아 놓은 곡식가리에 불을 질러 농원들을 태워버립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남용하여 제멋대로 살므로서 점점 패륜아가 되어 갑니다.

그래도 그가 나중까지 지키고 있던 한 가지 나실인 규정은 머리를 깎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머리카락을 고수한 것은 바로 그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조차도 이기적 이유에서 지킨 겁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드릴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므로 원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깎이우고 맙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삼손은 매우 감성적이고 무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실수하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결혼했을 때 신부측 하객들과 즉흥적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내기를 했는데 그걸 못 맞춰서 큰 손해를 보게 된 블레셋 사람들이 신부에게 그 답을 알아내 달라고 을러댑니다. 삼손은 아무리 아내라도 그것만은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 조르는 아내에게 결국은 답을 말해 주고 맙니다. 그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지게 되고 그에 격분하여 무고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태워 죽임으로 삼손에게 복수합니다.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대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드릴라와 사귈 때 블레셋 사람들이 그녀에게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라고 채근합니다. 삼손은 수 차례 물어오는 드릴라를 몇 번은 속이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만은 눈물로 거듭 애원해 오자 번민 끝에 사실을 내뱉고 맙니다. 그래서 머리를 다 깍이우고 두 눈이 뽑히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그가 입도 가볍고, 실수도 잘하는 무른 사람인 것은 나실인으로서 거쳐야할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훈련없는 인생은 쓰일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머리가 깎이우고 난 다음 그에게 이상한 변화가 생기는데 그건 힘이 떠나가고 평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우리는 그가 머리를 깎인 다음에 힘을 잃었고 그 다음 감옥에서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언급이 있은 다음 힘을 회복했으므로 머리카락이 그의 힘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이 힘의 근원이라는 것은 삼손의 입에서 나온 말일뿐입니다. 삿15:14절을 보면 그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그에게 덮쳐 그에게 힘이 주어져 그 팔을 묶었던 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그의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 자체가 아니라 그 머리카락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말하는 겁니다. 16:20절에서도 보면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그는 힘을 쓸 수 있고 하나님이 그를 떠나면 그는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머리카락이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감옥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한 머리털이 그의 힘의 근원이라면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삼손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지만 그 힘의 사용은 삼손의 의도나 소원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그 힘을 남용하기도 하고 오용하기도 하고 또 마지막에는 블레셋을 향한 복수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신앙의 철이 들어 모든 것을 깨달은 때는 언제였습니까? 나실인으로서의 마지막 규정인 머리조차 다 깍이우고 힘을 잃고 눈을 뽑힌 처참한 신세가 된 후에 비로소 잘못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해 후회하게 됩니다. 힘도 다 잃어버린 무력한 자로서 짐승처럼 묶이어 연자맷돌을 돌리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겁니다.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질 않았습니다. 반항하고 거역하며 자기적으로 살아온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저는 뼈저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의 힘이 사라지게 한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부르심에 대한 거역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쓰고자 나실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선별되어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 은총을 몰랐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겠느냐'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삼손은 자기 출생에 깃든 은총을 에서처럼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경거망동합니다. 그 결과가 눈이 뽑히고 지하 감옥에 내려가 어둠 속에서 연자맷돌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만 것입니다. 크게 될 행복자가 될 운명으로 태어난 그가 주어진 힘의 남용과 오용으로 가장 비참한 불행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삼손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힘삼고 살며 또 그 힘을 무엇에 쏟고 있습니까?...
복음서는 예수님을 힘센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증언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귀신들을 내어쫓자 '저가 바알세불에 들려서 그 힘으로 저런 짓을 한다'고 모함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힘이 그만큼 컸고 위력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힘은 분명 삼손의 힘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삼손의 힘은 신전 건물을 무너뜨리는 괴력이지만 예수님의 힘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사람, 억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는 그런 힘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중심적으로 그 힘을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자기비움적으로 그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철저하게 무력했고 인간을 향해서는 완벽하게 유력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고서는 그 힘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눅11:20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는데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힘이었습니다. 삼손과 주님의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무엇이 이렇게 삼손과 주님의 삶을 갈라놓은 것일까요?...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능력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고, 적대자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무능해지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적대자들에게 위협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힘은 삼손의 힘입니까, 주님의 힘입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는 인생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이 힘삼고 또 그들을 힘쓰게 하는 것은 두툼한 월급봉투, 넉넉한 물질, 승진, 성공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무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의 근원을 그런데 두고 사는 사람은 삼손처럼 일순간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그런 때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진정한 힘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39편 기자는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힘의 근원을 바로 아십시다. 배터리를 빼면 일순간에 쓸모없는 고철이 되어버리는 노트북처럼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콘센트에 꽂혀져서 끊임없이 동력을 지원받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힘을 우리의 힘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를테면 IMF가 닥쳤을 때, 주가가 폭락했을 때, 환난과 시련이 닥쳤을 때 그냥 무너져 버리는 그런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게 세상을 힘삼는 자가 경험하는 인생의 좌절입니다.
돈버는 재미도, 주식이 오르는 재미도 우리에겐 삶의 근원적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는 존재라는 의식, 어떤 형편에 있든 무엇을 하든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 안에서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의식, 이 사회에서 진리를 따라 살므로서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을 나눔으로 작은 사람들이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을 이루는데 기여한다는 의식, 자신이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 안에서 역사의 주체로 서 있다는 의식,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의식만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마르지 아니하는 힘의 근원에 잇대어진 인생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확고한 의식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사셨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장사였던 것이고 삼손은 그렇지 못했기에 거짓 장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진정한 힘의 근원에 자신을 연결지으십시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소명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참 힘의 근원인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십시다. 말씀과 더불어 기도와 더불어 우리는 그런 힘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의 전사들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힘과 실력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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