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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곡을 가리자 / 사 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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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곡을 가리자 / 사 40:12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려 보았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느냐? 누가 온 땅의 티끌을 되로 되어 보고, 산들을 어깨 저울로 달아 보고,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보았느냐?

구약의 말씀: 이사야 40:28 ~ 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1:4 ~ 9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모든 면에서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언한 것이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은혜의 선물에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여러분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지게 해주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3:24 ~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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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과 백성들이 모였을 때,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방법은 아주 기묘했습니다. 대학의 강의식도 아니고 대중강연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의 언어로, 보통의 상식을 전제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잘 알고 있는 일상적인 일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그런 설명 중의 한 장면이 오늘 복음서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당시 농경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 비유의 소재가 됩니다. 밀을 심고 보리를 심은 밭이 있는데, 그 밭에 씨앗을 다 뿌려 놓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평안히 잠을 자는 밤에 누군가가 와서, 보리 씨앗을 뿌리고 밀 씨앗을 뿌린 옆에다가 '가라지'라 이름하는 또 다른 씨앗을 몰래 뿌리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이삭이 자라다 보니, 밀, 보리만 아니라, 가가지라는 또 다른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이 '가라지'라는 이름의 식물이 뭔가 하고, 성서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가 이렇습니다. 이 가라지는 그냥 잡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고대근동이나 팔레스타인 땅에서 굉장히 위험한 식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책을 찾아 봤더니, 학명(學名)도 있었습니다. 학명을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로리움 테물렌툼(Lolium Temulenfum) 저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학명입니다만, 이런 학명을 가진 잡초는 요즘말로 표현하면 독이 든 보리씨, 또는 가짜 밀을 뜻합니다. 이 가라지가 얼마나 위험했던지, 당시 팔레스타인 땅을 통치하던 로마의 법조문에도 이게 나와 있다고 합니다. 법에 보면,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를 펴지 않은 평온한 밤에 가라지를 심어 보복을 일삼는 일은 철저히 금하며, 발견 즉시 중죄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처벌 규정이 로마법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가라지 얘기는 흔히 생각하듯이, 알곡과 가라지를 대비하는 통속적인 비유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현실을 담고 있는 비유하고 생각합니다. 가라지는 그것을 곡식인 줄 잘못 알고 뽑아다가 먹으면 설사를 하거나 구토를 일으키고, 또 양이 많으면 죽을 수도 있는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풍성한 추수를 꿈꾸며 밀을 심고 보리 씨앗을 뿌려 놓았는데, 누군가가 와서 치명적인 가라지를 뿌려 놓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유 안에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집니다.
"주인 어르신,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려 놓았는데, 가라지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아마 원수가 와서 그렇게 하였는가 보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을 몽땅 뽑아 버릴까요?"
주인의 답입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아라. 만약에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게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에게 내가 이르기를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태워 버리고, 그 다음에 알곡만 모아서 추수하여 내 곳간에 두라고 하겠다."
이 비유 이야기 서두에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이라고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 먹어서 생명이 되는 씨와 먹어서 죽는 씨, 그런 두 식물이 천당과 지옥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악마의 나라! 요즘 말로 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선과 악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오늘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니까, 선이 뭐냐 선이 누구냐 하는 추구는 없고, 악이 뭐냐 악이 누구냐 하는 것이 오늘 세계의 관심사인 듯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최근에 미국이 북한을, 우리 겨레의 북쪽 땅을 악, 그 중에서도 악의 주구, 악의 축(軸)이라고, 악의 대들보 중의 하나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만약에 미국이 그 축을 꺾겠다, 그 대들보를 무너뜨리겠다고 나서면 북에서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난리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유의 말씀과 똑 같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시각을 따라서 북쪽을 가라지라고 하고 남쪽을 알곡이라고 칩시다. 그럴 때, 북의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혹시 남의 알곡까지 뽑힐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북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쪽도 함께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은 제거해야 하겠지만, 악을 뿌리뽑는다면서 남북 모두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가라지 비유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시간에 세계 정치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비유를 좀더 깊이 생각하고, 비유의 현실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몇 가지 일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악이라고 규정한 나라가 일곱 개입니다. 지금 북한, 이란, 이라크 이 세나라가 악의 축이라고 합니다. 악의 축까지는 아니지만, 악의 나라, 말하자면 테러 지원국, 불량국가에 그 세 나라 외에 쿠바, 시리아, 수단, 리비아, 이 네 나라가 속합니다. 미국이 보기에 세 개의 축과 그 나머지 네 나라를 포함한 일곱 개 나라가 없애 버려야 할 악입니다. 그런데 일곱 나라 중에서도 유독 북한, 이란, 이라크 세 나라에만 "축"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왜 축입니까? 그 설명은, 이 세 나라는 인명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생산, 보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사일이 없는, 대량 살상 무기가 없는 쿠바, 시리아, 수단, 리비아는 축은 아니고, 악에 속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일곱 나라를 비교해 보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돌출 변이 나라라고 치고, 미국 밑에 있는 쿠바라는 나라만 제외하면, 이란, 이라크, 시리아, 세 나라가 중동 국가이고, 수단, 리비아는 근처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인데, 문제는 이 다섯 국가 모두 다 아랍권에 속해 있고, 전부가 다 회교 국가이거나, 회교권력이 통치하고 있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쿠바와 북한은 이들과 성격이 조금 다른 국가입니다. 그러니 혹시나 이 대립구도가 계속 고착되고 강화되어서 폭발할 경우, 그것은 부정하든 않든 아랍 회교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충돌입니다.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가 다 국가 이익을 얘기합니다. 자기 나라 이익이 우선입니다. 어느 나라든 똑같습니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외교 정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국 이익을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는 알곡이라고 전제하고, 적대적인 다른 나라를 가라지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는 북한이 가라지인지 아닌지 다 압니다. 아는데, 만약 가라지라면 뽑을까요?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가라지를 뽑기는 뽑아야 되겠는데 지금 뽑으면 알곡까지 다 뽑히겠다. 지금 북한을 쳐버리면 남한까지 다 뽑히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가라지를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국가 이익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미국의 국가 이익, 또는 테러를 방지해야 하겠다는 나라들의 국가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 미사일을 팔아서라도 먹고살아야겠다는 북한의 국가 이익도 보장하고, 전쟁이 없이 평화를 지켜야겠다는 남쪽의 국가 이익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정치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도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기도하면서 얻은 통찰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량 살상 무기, 미사일이라고 하는데, 북쪽은 먹고살기 위해서는 미사일을 중동에 팔아야 한다고 합니다. 팔지 말라고 하면 안 팔 테니까, 생산을 안 할 테니까 대신 그 보상금을 달라고 합니다. 미국은 못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방법이 있다고 하면 이런 것입니다. "대량 살상 무기 미사일이 정말 문제라고 하면, 미국이여, 당신네들부터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팔지 마시오! 그리고 북한 미사일을 그 생산시설까지 합하여 몽땅 사시오! 그래서 폐기 처분하시오!
당신들이 싫다면,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시오. 우리가 쌀 주면 군용미로 둔갑한다고 하니까, 우리가 뭐를 도와주면 북한에서 군사용으로 전용된다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혼자 사기 싫으면 미국과 남한이 북한 미사일을 그 시설과 함께 몽땅 사서 폐기 처분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 방법이 어떻습니까? 정말 평화를 위한다고 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어느 나라가 되었든지 간에 대량 살상무기가 없는 평화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론보도를 보았더니, 미국은 2003년 국방예산이 3,790억 달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동안 미국과 쌍벽을 이뤘던 러시아가 같은 해의 국방예산이 90억 달러, 말하자면 미국 국방 예산의 2.5% 밖에 안됩니다. 경쟁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러시아의 국가 예산 전체가, 미국 국방 예산의 17%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국방 예산이 많다고 반드시 힘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기 개발, 전략 전술 개발은 돈이 없으면 못할 겁니다. 미국에 대해서 유럽 국가들이 항상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토(NATO) 회원국인 유럽 국가들의 국방 예산을 모두 합치면, 미국 한 나라의 국방 예산의 이분의 일 이하!
그러면 지금 미국의 국방 예산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 많은 예산 중에서 북쪽 정도의 대량 살상 무기와 생산 시스템까지를 몽땅 사다가, 필요하면 우리도 참여하여, 다 사다가 그걸 폐기시키는 거야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테러와 전쟁의 위험은 없어질 것 아닙니까?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여러분 세금 좀 더 내는 것 괜찮으시죠? 평화가 목적이라고 하면! 그래서 북도 가라지에서 알곡으로 자기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다 가라지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알곡을 모아두는 곳간으로 갈 수 있다고 하면!
이 한반도를 알곡의 땅으로 만들어 보십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 보십시다. 사실, 가라지는 누가 가라지라고 규정하느냐가 중요하겠지만, 하여튼 가라지는 세상에 많습니다. 가라지는 누구입니까? 누가 악입니까? 일곱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선은 누굽니까? 아까 일곱 나라는 악이요, 세 나라가 그 악의 축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만, 그러면 선은 어느 나라고 선의 축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감히 답변을 못할 것입니다.
혹시 다른 나라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나는, 우리는 선의 축이라고 자부하십니까? 선의 증거가 있습니까? 물어봅시다! 평화를 만듭니까? 사랑을 나눕니까? 어느 나라가 자부할 수 있습니까? 어느 개인이 자부할 수 있습니까?
미국의 신학자요 정치 분석가였던 라인홀드 니버라는 분이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현실세계를 보면서 한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 인간이나 인간집단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인간세계에서 온전한 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악이 있고, 보다 덜한 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것을 "evil" 또는 "lesser evil"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부자 청년 한사람이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를 보고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선은 아마 이 땅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악이 많으냐 적으냐, 죄가 크냐 적으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라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비유에 등장한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심는다고 하시더니, 왜 하필 밀 씨앗 옆에 가라지라는 악의 씨앗을 뿌리도록 가만 내버려둡니까? 그게 하나님의 전능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전지입니까? 하나님은 그래도 되는 겁니까? 인간의 질문입니다. 왜 사람에게 죽음이 있습니까? 왜 사람에게 약함을 주십니까? 왜 병을 주십니까? 이러고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까? 당신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존재 방식, 하나님의 정의 그건 뭡니까? 풀리지 않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수천 년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나의 오묘한 뜻, 누가 감히 규정할 수 있겠느냐?" 이제 이사야의 말을 빌겠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만드신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일일이 헤아려 보았느냐? 가능이나 한 얘기냐? 누가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손 뼘으로 재어서 넓이를 재어 본 일이 있느냐? 누가 하나님이 만드신 땅의 티끌을 몽땅 모아다가 되로 되어 본 일이나 있느냐? 누가 하나님이 만드신 산들의 무게를 재어보려고 어깨 저울로 달아 본 일이 있느냐? 누가 하나님이 만드신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본 일은 있느냐?"
이사야의 말을 이렇게 이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엄청난 창조의 질서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냐?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기술로, 인간의 이성으로 아무리 재어 본들, 어떻게 하늘의 신비하고 오묘한 뜻을 확정하여 말할 수 있다는 거냐? 악이 왜 있냐는 그대들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오묘한 뜻은 그대들의 이성과 지혜로는 판단할 수 없다."
이사야가 답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그 주님은 영원무궁하신 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 피곤치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 지혜가 무궁하신 분, 그분의 목적은 인간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서 독수리처럼 날개를 달고 훨훨 날게 하는 것이다." 가라지와 곡식과 하나님의 마지막 복, 그것은 우리의 손바닥으로 잴 수가 없습니다. 미사일 가지고도 잴 수가 없습니다. 군비 예산 가지고도 잴 수가 없습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말합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리자! 그때가 되면 가라지는 알곡을 맺지 못해서 꼿꼿이 설 테고, 밀 이삭은 알알이 맺어서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추수하는 일꾼을 시켜서 가라지를 다 뽑아다가 불태워 없애고, 알곡은 하늘 곳간에 모아들이겠다. 하나님이 정하신 추수 때에 우리 인생이, 우리 세계가 하나님이 주신 평화와 사랑으로 알알이 익어 가는 그때, 그 추수 때에 가라지가 있을 곳은 없을 것이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에 원수가 뿌려놓았다고 하는 악은 병이든 제도든 종교든 무엇이든 반드시 불로 태워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건강을 좀먹는 질병,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불행, 그것도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온갖 종류의 개인적, 사회적, 가정적 가라지는 때가 되면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질 것입니다.
그 '때'는 누가 정합니까? 그때는 우리로 보면 알곡이 익어 가는 때, 추수할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그래서 성서 말씀에 "그때"라는 표현을 독특한 용어로 썼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냥 흘러가는 때, 이것을 헬라어, 고대 그리스말로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그런 "때"와는 다른 때, 인간들의 계산이 미치지 않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회의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가 되면, 가라지와 알곡은 반드시 분리됩니다. 그리고 알곡은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은 채 하나님의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정하시는 그때가, 남북한의 경우에는 바로 지금이었으면 참 좋지 않겠습니까?. 내년, 내후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가라지가 없어지고 평화의 알곡이 곳간에 쌓이는 그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심 걱정에 시달리시는 분들이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시는 행복의 때, 하나님이 정하시는 사랑의 때, 그때를 뒤로 미루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일의 행복을 앞당겨서 지금 순간에 주옵소서. 정초가 되는 오늘로부터 한해 내내 언제나 이"때"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진실된 기도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서의 말씀대로, 이때가,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어서, 기도하고 매달리고 그런 사람들한테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다. 간구하면 반드시 주신다고 했습니다. 카이로스를 달라고 했는데 크로노스를 줄 리가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뱀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믿어야지요.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 본문에 보면 마지막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보고 "우리 주님",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 유대 사람들은 항상 예수를 부른 다른 용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말로 "랍비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선생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선하신 선생님"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주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당신은 예언자, 지혜자, 우리보다 앞선 사람, 선생님!" 그것입니다. 선생님, 일본 사람들은 센세이, 좋은 말이죠. 그러나 선생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냐 하면, 선생님보다 전지전능하고 훨씬 월등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가라지를 몽땅 단으로 묶어서 자기 십자가로 불사를 수 있는 분,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고 죽을 수 있는 분,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부활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그 분입니다. 그 분만이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강토가 변화되고, 강퍅해진 세계의 양심들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선생님"으로는 안 됩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가능케 한 그분이 오셔야 합니다. 죽음을 삼키고 부활을 이루신 주님이라 이름하는 분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퀴리에 엘레이 송"을 많이 부릅니다. "주여(퀴리에), 주님(퀴리오스)께서 오셔서 이 나라를, 저 자신을 구원해 주옵소서. 죄도, 병고도, 거짓도, 잘못도, 허물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아 주옵소서.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소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랍비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나와 운명을 함께하시는 주님, 퀴리오스! 이런 관계가 없이는 우리에게 주님은 멀리 계시는 분일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런 가정은, 그런 사회는 반드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습니다. 물론 죽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이렇게 결말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라고, 주님이라고 부르시는 분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가라지 없이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약속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약속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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