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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창 18:20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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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약의 말씀: 창세기 18:20 ~ 21
주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서신서의 말씀: 빌립보서 3:17 ~ 21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20:20 ~ 26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이들이 의로운 사람인 듯이 행세하면서 예수께 접근하게 하여 그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 주려고 하였다. 그들이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임수를 아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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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의 찬양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노래를 귀로 듣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면, 우리는 더없이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사람의 목소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혼자서 아니면 가족과 더불어 한번 산과 들로 나가 보십시오. 대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와 만나 보십시오. 나무와 숲과 새와 더불어 한번 노래해 보십시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들과 교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세기 초엽에 성자로 존경받았던 아씨씨 출신의 프란시스는, 기록에 보면, 새와도 대화했다고 합니다. 흐르는 시냇물과도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과도 대화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글쎄요, 그런데 성자들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대자연에 나가서 영혼을 열면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합니다. 같은 언어가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서서 자연과 노래하고 교감하는 사람은 비록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진실한 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맑은 자연 속에서 탄성을 듣습니다. 오염된 자연 속에서는 질책도 듣습니다. 그 모두가 대화입니다.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그 모든 것들을 통한 대화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연과는 대화하고 만나고 교감하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는 대화할 수도 없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만날 수도 없는 이상한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게 이름하여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이런 말 많이 들어 보셨죠? 오늘 우리 교회에 많은 분들이 앉아 계시는데, 여기 계신 어느 분이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시면서, "나는 고독하다."라고 느끼신다면, 오늘 제 말씀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심방하거나 여러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 경동교회 왔을 때는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걸기도 미안하고 그래서 얼마 동안 외톨이로 지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한 사람 두 사람 알다 보니까, 친교가 아주 깊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경동의 친교가 진해서, 접촉하기는 어려웠지만 한 번 하고 나니까 끊어지지 않는 깊은 교류가 있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우리 교회를 찾아오시는 새 교우 여러분, 또는 그냥 방문하신 여러분 조금 서먹한 느낌을 가지게 되더라도, 고독을 느끼지는 마십시오. 처음 접촉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접촉하고 나면 굉장히 좋습니다.
고독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제가 외국에 나가 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제가 목사였기 때문에 본부에서 선물을 하나 주는데, 휴가였습니다. 제 직책과 근무 연한, 안수 받은 이후의 연한 등 법적으로 정해진 것을 다 합해서 1년에 26일 휴가를 준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야! 휴가기간 길구나." 근무 첫해에 26일 휴가를 받고서 온 가족이 집을 떠났습니다. 제일 아름다운 곳에 가자고 해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근처 티롤 지방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아서 갔는데, 밤새도록 차를 달려서 새벽녘에 도착을 했습니다. 여장을 풀고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나자, 애들이 말합니다. "아빠, 심심해." 그 다음날이 되자, 아내와 저까지도 심심해졌습니다.
왜 심심하게 느끼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묵고 있는데 거의 가족 단위로 왔더라구요. 그래서 놀이터에도 가면, 전부 가족 단위입니다. 물론 우리도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만 해도 저는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서는 먹고 잠잘 줄만 알았지, 가족들이 둘러앉아 눈과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하고 즐기고 놀고, 이런 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밤낮으로 가족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게 되었으니 심심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지요. 그래서 1주일 계획 세우고 갔다가 3일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애들이나 어른이나 다 외로움을 느낍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있는데도 외롭고, 다른 사람하고는 더 외롭다고 느낍니다. 제가 독일 살면서 느낀 것입니다만, 그쪽 사람들도 접촉하기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왜 저렇게 딱딱하냐 싶었지요. 그런데 한번 사귀고 났더니, 정도 깊고 오래가고, 사람들이 좋더라구요. 처음에는 "아 이곳은 인간미도 없고, 냉철하고 아주 차디찬 곳이다. 나쁜 사람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좀 정이 드니까,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을 바꾸면서부터, 고독을 느끼지 않고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일만에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왔는데, 도시 전체가 죽은 듯했습니다. 다 휴가를 떠나고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고독! 그 일을 겪으면서, 7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도 있기도 하였습니다만, 한 가지 반성을 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스케줄에 따라 끌려 다니면서 일만 할 줄 알았지, 막상 휴가를 주었더니 휴가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휴가는 철저하게 자유로운 시간입니다. 혼자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의 시간입니다.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제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시간을 얻고서 스스로 알아서 계획하고 즐기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그게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고, 지금 보면 농담 같기도 합니다. 지금 저에게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26일 아니라 100일도 즐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그 당시에 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까닭 없는, 그러나 제 자신의 생각 때문에 생겨난 이유 있는 고독을 느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군중 속의 고독이요, 대화와 만남이 없는 고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고독 자체는 악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런 고독에서는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란 이런 고독이 없는, 서로간의 만남과 대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그런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에 관한 얘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라는 분이 공적으로 활동하기 이전 30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있는 것은 베들레헴에서 낳았다는 것과, 또 잠시 이집트에 피신했다가 돌아왔다는 것과,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 등에 관한 기록뿐입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3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세주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기록입니다. 예수께서는 군중에 둘러싸여 다니셨으니, 아마도 예수께서도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고 딱 나선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독한 길을 갑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고독의 현장을 하나 보여 줍니다. 예수를 로마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 제거해 버리기로 결정한 유대 지도자들이 그 책략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세금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있고 세금을 바쳐야 할 납세의 의무도 있습니다. 세금 내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은 없겠지만,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깨집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대백성들도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이 납부한 세금이 자기들의 국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액 로마 황제에게로 가고, 거기서 일부만 유대 나라를 위해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백성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낼까, 어떻게 하면 세금을 좀 안 내 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위임을 받은 세무서 직원들, 소위 세리들은 어떻게 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서 황제에게 바치고도 남아서 착복도 하고 직급도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탈세자를 잡아내어 세수를 올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백성과, 유대인이면서 세리로 있었던 자들의 갈등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세금을 많이 걷자, 적게 내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나 세금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세금을 바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바치지 않고 탈세하자니 범법자가 되고, 바치자니 기분도 나쁠 뿐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오는 분깃이 없습니다. 때로는 생활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납세자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유대공동체에 가장 민감한 문제인 세금 문제를 가지고 예수에게 옵니다. 목적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 죽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해보자는 것입니다. 질문이 이렇습니다. 당신은 현명하신 분이고 훌륭하신 분이니 저희들 질문에 답변해 주십시오. 우리 현실 아시죠? 우리 현실에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습니까, 그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예스, 노를 좀 해주시죠. 이 사람들이 예상한 답변은 세금을 바쳐라, 아니면 세금을 바치지 말아라,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많은 질문이 우리에게서 만들어집니다만, 대부분의 질문들은 이미 답변이 준비된 질문입니다. 답변을 만들어 놓고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답변에 맞게 질문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이미 답변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에게는 세금을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 백성이 다 하나님의 선민이요 구원받은 백성일텐데, 이런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제기되는 그 현실이 문제였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대화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수많은 군중이 모였지만, 예수는 완전히 소외자, 국외자입니다. 예수의 고독, 하나님의 아들의 고독과 외로움, 그것은 단지 유대인과의 관계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전체가 다 예수에게는 이방지대나 똑같았습니다. 예수 자신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의 답변이 주어집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답변합니다.
"동전을 보여달라. 동전에는 누구 초상화가 들어 있느냐?"
"황제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뭐라고 쓰여 있느냐?"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이 답변이 첫째 대목입니다. 바쳐라, 말아라가 아니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라는 이 답변 자체가 질문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바쳐라"가 아니면, "바치지 말아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황제 것이면 황제에게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답변 속에는 예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를 고소하여 총독으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모든 스케줄은 유대백성과 로마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것이고 유대백성들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 가운데에서 예수가 혼자 고독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너희 유대인의 것, 로마의 것! 나는 간섭하지 않겠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고독했는지,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한테 뱉은 말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버려 내가 극심한 고독을 느끼고 있는데, 나는 혼자인데, 하나님마저 나를 혼자 두려 하십니까?"
산상칠언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어찌하여 버리십니까?" 하는 말은 처절한 고독을 보여줍니다. "나는 대화의 상대를 잃었습니다. 마음도 줄 데도 없습니다. 나는 어디 가라는 겁니까? 군중들 앞에서의 고독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숨어버리시니, 이 고독을 어떻게 견디라고 하십니까?" 예수의 항변입니다. 고독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숨을 거두기까지의 모든 스케줄을 진행하라. 로마가 할 일을 하라. 유대백성아 그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로마 관원들과 타협하는 것도 그렇게 해라. 내가 권유 안 한다. 그것은 그대들의 계략이므로." 이 답변에 유대 백성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치라는 말도 아니고 바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너희 식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논란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냐? 가이사에게 주어라."고 한 뒤에 묻지도 않은 대답을 예수께서 하십니다. 모든 질문 속에는 답변이 포함된 것 같지만, 질문한 자들이 전혀 예상치 않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답변이 예수 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질문한 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언제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얘기했습니까? 가이사의 것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내게는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항상 같이 있다. 그대들은 인간의 문제를 질문하지만, 나는 신의 문제까지 얘기한다. 그대들은 땅의 얘기를 할 지 모르지만, 나는 땅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얘기까지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유대 백성들은 충격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 사람으로 땅에 와서 굉장히 외롭게 살았습니다. 세상일에만 관심하고 모든 관점이 세상의 일상에만 놓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는 고독했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예수께서 오셔서, 이 강단에 서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인간의 얘기와 동시에 하늘의 얘기도 함께 들는다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실 거고, 세상 얘기 외에는 관심 없다면서 하늘 얘기를 딱 젖혀놓으면 예수께서는 "외롭고 고독하다." 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이사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만든 것은 세상의 일이요 가이사의 일이지만, 그 십자가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일,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을 창출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질문자들이 보지 못한 또 하나의 진실입니다. 이 진실은 부활을 통해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갖고 있는 모든 질문과 의문과 불만 불평 속에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극복하고 그 위에 다시 서는 부활의 새 생명을 언제나 약속하고 계시고, 지금도 의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대화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 오늘 창세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적 타락과 인간 쾌락이 최고조에 달한 곳, 그래서 "타락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라고 그랬습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고달픈 소리, 괴로워하는 소리, 신음소리. 신음소리는 그 속에서 피해를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인간들의 절규입니다. 또 다른 소리는 사람들을 절규하게 하면서, 착취하면서 돈 버는, 요즘 말로 말하면 소돔 고모라의 조폭들의 소리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느 것이 진짜 괴로운 소리인지, 어느 것이 내 가슴속에 와닿는 슬픔이며, 어느 것이 착취하는 목소리인지, 내가 가서 구분 좀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가슴에 닿는 목소리이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목소리인지 가서 구분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어떤 소리가 세금의 부당한 징수 때문에 고통당하는 백성의 소리인지, 어떤 소리가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려고 사람의 피를 짜 내는 소리인지 내가 가서 구분해야 되겠다. 하나님의 소리와 가이사의 소리를 구분해야 되겠다." 그런 구분 속에서 오늘 예수께서는 괴로워하시고 외로워하십니다. 예수의 말씀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끝났더라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뜻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인간의 죄악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목소리 그것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 그걸 찾을 수 있으면 여러분은 이제부터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시민권이 있습니다. 땅 속에 있는 사람들의 하늘 시민권, 이것이 얼마나 귀한 줄 아십니까?
예수께서 "주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주기도를 드릴 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아멘." 하고 기도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저희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들어와 살라고, 하늘 시민으로 들어와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여러분이 응해서 복 받는 사람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기십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복된 주인이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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