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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쇠하여 지는 자의 행복 /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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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하여 지는 자의 행복
요한복음 3:22∼30

요즈음 사회적으로 최고의 문제 중에 하나가 얼마 전에 막을 내린 솔트 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쇼트트랙 선수인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빼앗긴 이야기입니다. "도둑 맞은 금메달"이라는 제목으로 나라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금메달 감인 우리선수를 미국이 반칙을 하고 심판들이 담합하여 편파적인 판정을 해서 금메달을 강탈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인터넷에는 연일 미국을 비방하는 글이 도배를 합니다. "약소국의 비애"라느니 "스포츠 외교의 실패"라느니 심지어는 "미국이 테러 당해도 싸다"."빈 라덴이 이해가 간다"는 등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더니 드디어 코카콜라 안 마시기 운동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가하면 맥도날드를 먹지 말자는 등 미국제품 불매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온 국민이 시퍼렇게 뛰는 것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4년 간의 고된 훈련을 감수하며 얻으려고 했던 것은 금메달이라고 하는 단순한 물질적 가치 그 이상의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달렸고 그것을 위해 인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무하게 강탈당했다고 생각하면 무너진 행복과 기쁨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온 국민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가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그 틀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가치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요즘 많이 사용하는 말로 패러다임(Paradigm), 즉 <공유하는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사고의 틀이 있다는 거죠.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불행하기도하고 행복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 틀을 <고정 관념>이라고 표현 하기도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의 경험했던 그 행동, 혹은 들어서 배운 것, 오랫동안 흘러오면서 그 되풀이되는 가운데서 자기 나름의 가치관과 철학이 됩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행복과 불행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고착된 자기철학 내지는 고정관념 때문에 좋지 않은 습관들이 생긴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변명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변명한다는 것은 내 잘못을 감추어야하는 하나의 위선이요, 내심 나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허영입니다. 사실대로 인정하며 그만 입니다. 그런데 꼭 변명을 합니다. 아주 좋지 않은 악습입니다. 잘못 된 것을 그때에 인정하고 "아, 그 내가 잘못 알았더라." "지나고 보니까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돌이키면 흔적이 채 남기 전에 깨끗하게 사라질 일을 변명을 해버렸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게 얼마나 나쁜 체질이라는 걸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명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변명 없이 사는 사람 자유 합니다. 심리적인 면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동계올림픽 심판 봤던 사람은 지금 불안할 것입니다. 세상의 이목이 자기의 고치지 않으려고 고집했던 잘못 된 판단에 머무르고 있으니까요.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만나면 "아, 이 사람 옛날에 이랬는데 또 그럴 것이다"."이 사람의 평가는 언제나 부정적이었는데 또 그러겠지"이렇게 되는 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가치관이라는 걸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이고 하나는 긍정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긍정적으로 보며, 행복을 찾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꼭 부정적으로 보고, 어둡게 보고 그래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어디에서 찾느냐하면 내가 가지는데서 얻으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유가 곧 행복이요, 많이 가진 자는 많이 행복한 자요, 적게 가진 자는 적게 행복하다는 등식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동메달보다는 은메달의 가치가 더 행복한 것이요, 은메달보다는 금메달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1등 문화에 젖어있는 우리나라사람들의 <행복추구 열>은 유별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동메달만 목에 걸어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동메달, 은메달은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금메달이어야 두 손 번쩍 들고 웃습니다. 2등, 3등에는 시큰둥합니다. 꼭 1등이어야 축하가 배가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논리 속에 길들여진 모습입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이란 내가 가진 것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서는 가져야한다는 소위<보이는 행복론>이 전부란 말입니까? 아마 이보다 더 귀한 행복은 나를 버리고, 나를 낮추고, 나를 희생하는데서 오는 <보이지 않는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사랑 받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더 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내가 한 걸음만 낮아지고, 조금만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그 얼마나 가치 있는 기쁨입니까?
세상에는 내가 사랑 받아야 되고, 내가 제일이 되어야 하고, 내가 가져야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내가 사랑하므로, 내가 희생하므로, 내가 주므로 행복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싸워 내가 이기면 좋겠지만 내가 져줌으로 저 사람이 행복해합니다.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 사람이 하면 더 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양보"란 처음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포기"란 버티다 버티다가 마지못해 하는 것이 포기이거든요. 그리고 "양보"란 그것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하지만"포기"는 두고두고 마음 속에 앙금이 남아 있어 도무지 기쁨이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져 주지만 언젠가는 도로 찾으리라"는 보복심리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어요, 행복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우두머리 되는 게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 행복이란 언제든 잃을 수 있는 위장된 행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를 떠나가면 이 행복이란 함께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그 행복을 잃을 염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어도주어도 행복은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얻어지는 행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는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행복 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자 입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 유치환이 <행복>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주는 자가 분명 더 행복한 것입니다.
또 하나 무엇이 문제냐 하면 질투가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질투하는 마음은 사람을 썩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 시기는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하고 골수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로든지 간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질투 없이 살아야 됩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생리적 욕구가 있고, 안전 하려는 욕구가 있고,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인간적인 가장 높은 차원의 욕구는 자기 실현의 욕구입니다. 자기 존재를 확실히 하고자 하는 정신적 욕구가 있는데, 이 욕구가 어떤 일로나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방해받거나 침해될 때 작용하는 것이 질투입니다.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자유경쟁, 혹은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는 강한 자만 살아 남는다는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일류 대학에 가야하고, 결국 머리 좋은 사람, 강한 사람, 똑똑한 사람 그 몇 사람만 살아 남는다는 것이 생존경쟁이라는 것인데요 이 말은 <칼 막스>의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마음입니다. 경쟁에서이기는 사람만 살아 남고 나머지는 죽는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철학입니까? 물론 강한 자가 삽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오직 하나입니까? 일등은 하나가 아닙니다. 한사람은 운동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음악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얼굴이 예뻐 일등이요, 한사람은 말을 잘 해 일등이요, 다 일등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한경쟁이 아니라 무경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의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늘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결코 누구와 경쟁해서 하는 게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느냐하면 내가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을 죽이려고 한단 말입니다. 남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정신이 없습니다. 나만 사는 경쟁, 이건 공산주의 이론이요, 결국은 같이 붕괴되는 겁니다. 이 경쟁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로부터 구원받아야 참 행복이 있습니다.
자 이제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 합니까? 그는 자기 앞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 때 요한도 가까운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또 누가 와서 고자질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감정을 충동질하는 제자들 앞에서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분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기분이 썩 좋지 않을 수 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나에게 몰리던 사람들이 안면몰수하고 저에게 가버린다 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받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입니다. 내게 주었고 그에게 주었고. 내게 주신 것처럼 그에게 주었어요. 요한 자신도 지금까지 자기의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무엇에든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한다"했으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요. "참는다"했으면 끝까지 참아야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했든 간에, 누구 말도 이 이상들을 필요가 없지요. 요한처럼 하나님의 일이다 했으면 아무리 주위사람들이 바람을 넣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주어지면 모두가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입니다. 내 사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산을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주를 많이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도 주었고, 모두에게 하나님이 적당하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단지 받은 것뿐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이 옳아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남에게 주신 것에 시기, 질투 할 것 없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내게 주신 은혜 여기에 충실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하고 질투로부터 벗어 날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더불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손에 들어 온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남 잘 되는 것을 내가 잘 되는 것처럼 좋아합니다. 그 마음이래야 행복한 것이지요. 항상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 그것이 행복의 근본입니다. 좀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쇠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참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에서 좀더 나아가서 물러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기쁨에는 시작하는 기쁨도 있고요, 끝내는 기쁨도 있는 것이거든요. 늘 내가 저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어서 내 말 한마디에 움직여 줘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어야 되지 않겠어요? 이게 행복의 비결인데, 우리는 그렇질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요한의 고백이 그의 행복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쇠하여지는 자의 행복을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자기 희생과 양보와 낮아짐에 있습니다. 이 가치를 아는 자만이 행복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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