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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목자의 관심 /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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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5:1-7   
제목  어떤 목자의 관심 


인류역사상 최대의 격변기는 1900년대 전반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인류는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스케일의 세계적인 규모의 대전쟁을 두번씩이나 겪어야 했습니다. 소위 세계 제1차, 2차대전이었습니다. 이 두번의 전쟁후에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은 그전과 비교하여 바뀌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회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소위 코페리니스크적 대변화, 대전환이 있었습니다. 이런 전후의 변화를 대표적으로 그린 한 문학가의 작품이 1940년대에 출판됩니다. 이 작품은 그전이라면 말로 안되는 작품이라고 비난받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가는 이 작품의 출간을 계기로 오히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됩니다. 현대인의 변회된 의식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작품속의 주인공은 어느날 어어니의 사망전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는 별 느낌없이 매우 무덤덤하게 장례를 치릅니다. 어머니가 좀 누워서 실컷 쉴수 있으시겠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기뻤다고 합니다.그리고 장례를 치른 같은 날 마리라는 이름의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섹스를 합니다. 그는 여인에게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사랑은 잘 모르겠고 섹스는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후 그는 건달 친구와 어울려 해변에서 놀다가 한 아랍인을 죽이게 됩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살인의 동기를 대낮에 사정없이 내려 쪼이는 태양으로 눈이 가물거려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진실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카뮈는 이 작품에서 순간의 자기 실존, 자기 쾌락과 자기 편리외에는 모든일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하게 된 현대인의 출현을 예고했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말에 와서 이런 현대인의 실존양식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이 제일 많이쓰는 말이 무엇인가 조사된 일이 있었는데 "Who cares?"(알게 뭐야)와 "I don't know"(몰라)라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미라는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베스트 시집을 냈을때 결론을 기억하십니까?-"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슷한 때에 이땅의 틴 에이저를 대표하는 원태연이라는 시인이 베스트 시집을 냈는데 제목이 "넌 가끔마다 내 생각을 하지 난 딴 생각을 해"였습니다. 우리의 시대-한마디로 말하면 내 욕망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기로 작정한 시대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이웃의 구원에 대해서도, 우리의 삶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관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없이 우리를 외로운 존재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편리외에는 아무 관심없이 살면서도 역설적으로는 이 세상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다는 현실 때문에 처절한 외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현대인 모두의 의식속에 잠재된 현대인 공통의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한마디로 대답을 말하자면 "이 세상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만은 너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향한, 아니 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 어떤 관심일까요? 흔히 선한 목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예수님의 이야기속의 어떤 목자 우리는 그에게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목자의 관심, 그것은 곧 하나님의 관심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어떤 관심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현대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현대가 극도의 개인주의의 시대이면서도 오히려 개인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인정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숫자로 처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숫자로 기억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12동 1304호집 사람--5234자동차 주인--031-264-9195전화번호를 쓰고--주민등록 번호 끝자리 1162511--이 숫자들은 다 저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이사를 간다든지 전화를 바꾼다든지 제가 세상을 떠나든지 하면 이 모든 숫자는 다시 저와 상관없는 숫자가 됩니다.여러분이 교회에 등록하면 역시 고유 등록번호 숫자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장기결석을 하시면 어느날 그 숫자는 다른 교인의 이름으로 대체되고 당신은 우리에게서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속에서도 당신을 끝까지 잊지 않으시고 당신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당신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당신을 구원하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본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양이나 하나 찾아 대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 보면 '그(정관사) 잃은 것'을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설교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가 어느날 일반적으로 정통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던 사마리아 길을 가신 이유-사마리아 여인 한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여리고 길에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던 이유-삭개오라는 한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1:9에 보면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모습을 증언하며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개인적인 관심이십니다. 그가 이땅에 계셔서 사람들을 만나실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을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민족 반역자가 아닌 삭개오야 라고, 죽은 친구야가 아닌 나사로야 라고--욕심부리다 귀신들린 여인 막달라 마리야가 아닌 그냥 마리야라 라고--그는 지금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에게 다가 오십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동일하게 당신이 관심있는 이웃들에게 당신이상의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당신이상의 사랑을 갖고 사랑하십니다. 그는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이웃들이 구원받는 것을 당신이상으로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의 관심은 개인적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집중적인 관심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찾는다는 단어가 중복되어 사용된 것은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신분의 집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찾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한마리의 양을 잃은 이후 이 목자의 존재이유는 양을 찾는 것입니다. 목자의 유일한 관심 그것은 잃은 양 찾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 이후 그의 전적인 관심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도 찾습니다. 점심에도 찾습니다. 저녁에도 찾습니다. 밤에도 찾습니다. 우리에서 찾습니다. 우리 밖에서 찾습니다. 골목에서 찾습니다. 거리에서 찾습니다. 들에서 찾습니다. 동네에서 찾습니다. 시장에서 찾습니다.직장에서 찾습니다.어제도 찾았습니다. 오늘도 찾습니다. 내일도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관심 때문에 어느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아십니까? 나 한사람을 찾기 위해 친구를 보내시고 목사님을 보내시고 선교사님을 보내시고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은 성령으로 내 마음을 두드리며 내게 찾아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유일한 미션 그것은 나를 찾는 일이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19:10에 "인자가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야망은 영혼의 야망이셨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야망은 지식의 야망이고, 시져의 야망은 권력의 야망이고, 진시황의 야망은 장수의 야망이고, 록 펠러의 야망은 부의 야망이고,빌 게이츠의 야망은 비즈니스의 야망이었다면 예수님의 유일한 야망은 잃은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개인 기도시간에 우리교회 비전센타 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중 갑자기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츠의 이야기가 마음에 떠오르면서 마음에 큰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윌리암 부츠가 그의 구령사업과 사회사업 사역이 확장되면서 여러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때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스태프들은 여왕의 도움을 받을 기회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왕을 만나 그의 사회사업의 업적을 치하받으면서"내가 도와줄일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그는 "전도자에게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말고 무엇을 구할일이 있겠습니까? 더많은 영혼을 제가 구원할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을 만나고 나온 그에게 참모들이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가 주님의 유일한 관심을 이행한다면 나머지는 그분이 책임지시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우리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집중적인 관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일에 집중하면 나머지 교회의 필요는 주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집중적 관심에 우리교회의 관심도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침 10월에는 이웃초청 사랑의 축제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여기에 나는 우리 교회와 교인의 모든 관심이 집중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는 한가지 관심밖에 없습니다. 잃은 자식 찾는 것입니4? 먹는 시간에도,일하는 시간에도, 자는 시간에도 그의 관심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십시오. 목자는 드디어 양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이야기가 끝납니까? 아닙니다. 5절에 보면 찾은후 즐거워 하며 목자는 이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옵니다. 여기서 '어깨'가 원문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어깨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은후 두 어깨에 양을 태운다음 두손으로 두다리를 꼭 잡고 돌아 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잃은 양을 찾은 감사의 잔치를 벌립니다. 저는 이번 우리교회 전도잔치에 불신자 뿐만 아니라, 전에 믿다가 낙심한 많은 낙심자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기도 합니다. 왜 그들이 낙심했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어쩌면 먼저 믿은 우리들의 그들을 향한 관심이 일회용 관심, 혹은 짧은 관심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책임, 무관심의 결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목자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두어깨에 양의 두다리를 잡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난 이제 너를 놓을 수 없어. 넌 내꺼야. 내 품을,내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게 할거야" 이런 목자의 집요한 지속적인 관심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품을 떠난 낙심자들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돌아올때까지 다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을 예수님이 말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아십니까? 당시의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예배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눅18:11을 보시면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감사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책임을 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돌아오면 받아는 주겠지만 그렇게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릇된 하나님 관이었다고 리온 모리스(Leon Morris)라는 학자는 지적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찾아 다니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예배는 선민의 자만심이 고백되는 이고(ego)의 전시장이었고, 영혼의 구원의 기쁨이 결여된 장례식을 방불케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기도는 어떻습니까? 믿지않는 이웃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얼싸안고 춤추고 기뻐하는 잔치, 그것이 하늘나라의 모습이고 오늘의 진정한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10월이 그런 기쁨을 우리교회의 예배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한주간 우리사회의 최대 쇽킹 뉴스는 소위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 발견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전 1991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등학생 5명이지방의회 의원선거로 임시 공휴일이었던 이날 5명의 소년은 인근 와룡산으로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올라간후 흔적을 남기지 않은채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당시 전국 경찰과 공조수사를 벌려 연인원 32만 천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뿌려진 전단만도 무려 810만장, 모두 667차례에 걸쳐 수색에 나섰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5명의 소년 가운데 종식군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직장을 그만두고 1,4톤짜리 화물 트럭을 구입하여 전국을 누비며 아들을 찾고 찾다가 병을 얻어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1년만에 이들의 자취를 그들이 실종된 곳에서 멀지 않았던 같은 산자락 반대편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이 소년들은 이미 생명이 떠나간 유골로 발견되어 우리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전모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는 한가지 안타까움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실종 직후 그정도의 가까운 거리라면 왜 발견할수 없었는가라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의 체온이 남아 있었을때--아직 그들의 맥박이 뛰고 있었을때--아직 그들의 혈관에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을때--아직 그들의 숨결이 남아 있었을때 찾을수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제2의 개구리 소년소녀들 개구리 어른들, 개구리같은 인생의 호기심을 좇아 쾌락의 산으로, 부요의 산으로,권력의 산으로, 혹은 취미의 산을 오른채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있는지요? 그들을 찾아야 합니다. 늦기전에 아직 가까운 거리에서 찾을수 있을때에 그들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이들을 찾기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구조공동체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양들은 종종 마을 공동체의 소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양이 실종되었을때 공동의 노력으로 찾았고 찾으면 잔치를 벌려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연합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이웃들을 찾기위한 노력을 펼치는 이웃찾기 사랑의 축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태신자가 작정되셨는지요? 그들은 과거에 교회다니다가 낙심한 이웃들일수도 있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온 이웃들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친지들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같은 아파트 이웃들일수 있습니다. 우리의 집에 우유, 식품 배달하는 이웃들일수 있습니다. 거래처의 이웃들일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동네 어르신네 일수 있습니다. 젊은 후배 이웃들일수 있습니다. 그들가운데 당신의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웃들이 누구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가 바로 당신과 내가 찾아야 할 바로 그 양인 것입니다. 그 양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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