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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과 쉼 / 막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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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

현대인은 한 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가방을 든 두 여자아이가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한 아이가 제 친구더러 '아이,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어른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피곤하니?' 그랬더니 '아저씨, 유치원 갔다 와서 피아노 치러 가고, 미술 학원에 가고, 무용 학원에 가는데 어떻게 안 피곤해요?'라고 대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 그래? 굉장히 피곤하겠구나'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짐작하건대 그 아이는 집에서 제 부모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듣고 배운 것 같습니다. 어쨌든 현대인은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휴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몸도 마음도 영혼도 지쳐있기 때문입니다.

악보에도 쉼표가 있습니다.

아무리 음표를 잘 배열하여 완벽한 작곡을 하여도 쉼표 없는 악보가 있다면 연주자는 숨이 막혀 끝까지 연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쉼표는 음표를 가장 아름답게 해 주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치열한 삶의 연주에도 쉼표가 필요하기에, 목을 조르는 넥타이, 사람을 규격화하는 와이셔츠와 양복을 다 벗어버리고 가벼운 티셔츠에 날을 세우지 않은 면바지나 반바지를 입고,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영혼의 심호흡을 하고 싶은 마음은 목회자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수고하는 자』라고 했을 때 어떤 수고를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탄생의 수고/성경에도 여자의 최대의 고통과 형벌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여 해산하는 데에는 물론 산모의 수고와 고통은 말로 형언키 어렵지만 태아 역시 목숨을 건 사투의 결과로 이 세상에 출생하게 됩니다. 전혀 다른 환경과 역겨운 냄새를 적응하는데는 육체적 심적으로 받는 충격은 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성장의 수고/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양육의 수고지만 아이입장에서는 성장의 수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고민과 갈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셋째-부양의 수고/공부를 마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나면 아래로는 자식과 옆으로는 아내와 위로는 형제와 부모부양의 의무를 지게됩니다. 이 때의 수고는 가장 힘든 수고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질병과 고독 외로움의 수고/ 부양의 수고가 대우도 함께 받았던 수고라면, 이 시기의 수고는 자식은 출가하고, 젊은 날의 지나친 혹사로 몸은 병들고, 경제적 수입감소로 심각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질병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몸도 마음도 연약하여 인생무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다섯째-죽음의 수고/죽음을 수고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은 일생의 수고와 고통을 모두 합친 분량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은 수고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수고하는 자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이처럼 피곤한 인생들에게 휴식이란 것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을 양떼들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쉬게 하시는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게도 하시지만, 또한 푹 쉬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유한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불면 불휴의 노동이란 불가능합니다. 노동은 때로 창조의 기쁨이 용솟음쳐야 하는데, 불면 불휴의 노동이란 바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쉼, 휴식은 우리의 삶에서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피서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레저와 함께 여행과 휴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 합니다. 휴식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 일의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휴가나 여행은 자칫 사람을 탈선 또는 나태하게 만들거나 피곤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평안과 휴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성도들이 누리는 진정한 안식과 행복은 하나님께로 나갈 때 영생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쉼이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마음과 시간에 여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동네 사람들이 한집에 모여 새끼 꼬며 짚신을 엮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로 꽃을 피우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시계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농경 사회가 산업화 사회로 바뀌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는 여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한 시간 따라 움직이고, 격심한 경쟁 속에서 먹고 먹히는 긴장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쉼'이라든지 '생활의 여유'라는 단어는 점점 사라지고, 과도한 스트레스만 쌓이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온 세계와 경쟁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 때문에 그 힘겨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의 구하는 바는 안식과 위안과 휴식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철이면 휴가를 갖게 됩니다. 일년의 절반을 보내고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좀 해소해 볼 양으로 각각 산으로 바다로 부지런히 찾아갑니다. 그런데 휴가를 갖다 보면 오히려 온갖 종류의 피로와 스트레스만 더 많이 쌓이게 됩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자가용 행렬로 거북이 운행에 교통 지옥을 맛봅니다.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해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면, 시끌벅적한 고성 방가와 취기에 흔들어 대는 모습하며, 아무데나 버려진 오물 더미에서 솔솔 흘러오는 썩는 냄새,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장사치들은 한 대목 잡으려고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으로 골탕을 먹입니다. 이 모든 것이 쉬러 간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만듭니다.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면 남는 것은 올해도 휴가를 다녀왔다는 것과 피곤함과 개운치 못한 마음뿐입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는 고린도의 왕이었는데 죽은 후 지옥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온갖 힘을 다하여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다시 그 무거운 바위 덩어리를 산꼭대기로 올려놓기 위하여 비지땀을 흘리게 됩니다. 올려놓으면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또 다시 올려놓고 하는 일을 영원토록 계속하게 됩니다. 즉 그는 잠도 못 자고 쉼도 없는 영원한 노동을 계속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서운 저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인간의 휴식을 제도상으로 보장하고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 규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계명 4계명을 흔히 하나의 명령인 줄 알지만 사실은 둘입니다.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 이것이 첫째이고, '이레째 되는 날은 온전히 쉬라' 이것이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일하라' '쉬라' 두 계명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일하라!'고 했는데 일 안하고 빈둥거리는 사람은 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놀다가 쉬다가 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킬 자격이 없어요. 그런가 하면 또 '하루를 완전히 쉬라!' 했는데 쉬지 않는 사람도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안식일을 통해서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일에서 떠나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하다 보면 우선 일에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기 쉽고 마음이 자꾸자꾸 좁아집니다. 장사 오래 하다 보면 사돈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푼 한 푼 벌어들이는 것 때문에 그만 어느 사이에 돈의 노예가 돼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와 휴식을 주시기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주시고, 안식년을 주시고, 희년을 주시고, 장차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휴식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가 파송을 받고 각처에서 전도한 다음에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를 드렸을 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동안 많이 수고하였으므로 좀 쉬어야 하겠는데, 그러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와글와글 들끓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는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을 만큼 잠시도 쉴 틈이 없을뿐더러, 쉴 만한 환경도 못되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하였다고 했습니다.

휴식은 영적인 관점에서도 필요다

휴식은 육체 노동 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에서도 필요합니다. 신앙인들은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영원의 빛 안에서 살아가기에, 매사의 삶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의 부단한 공격, 죄와 이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자 하는 끊임없는 투쟁에서 우리들의 영혼은 피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기만 하면 모두 얼마 동안의 휴가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휴가가 올바르고 유용하게 사용된다면 우리는 영혼의 상처와 피로한 심신을 회복하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원기 왕성한 기력을 갖고서 앞으로 닥칠 온갖 갈등과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필요한 휴가를 어떻게 보다 효과적이고 유용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

일을 마치고 쉬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짝을 지워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시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능력을 받아 각 곳에 흩어져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가 일어나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맺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잠간 쉬어라'는 은혜로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휴식이란 원래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 한자에게 안식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자들이 되어 진정한 휴식의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서 쉬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휴식은 어떠합니까? 여름 휴가 하면 의례히 한적한 장소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인파가 들끓는 해수욕장이나 계곡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거의 벌거숭이가 되다시피 한 사람들의 레저 문화에 오히려 영혼이 오염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내가 왜 사는지, 내 본래의 사명은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순수한 어린아이의 감정으로 돌아가 며칠을 지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곳, 내 꿈이 자랐던 곳, 주님과 처음 만난 체험의 곳을 찾아 따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간 쉬어야 합니다

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계속 쉬기만 하면 누가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잠간 쉬라고 했습니다. 휴가 기간이 끝나면 우리는 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피로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따로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하셨을 때 '가라'고 하시지 않고, '와서' 즉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휴식처에 거하신다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모시게 되면 사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휴식처에 최상의 안식의 주인을 모신 셈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휴가에 주님과 함께 떠난다면, 모든 휴식 시간은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꽃들은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이며, 시냇물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우리들의 귓전을 더욱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제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아도 마음이 불편하면 거기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 참된 쉼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깁슨은 "주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이기보다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요, 우리의 영원한 쉼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난 해수욕장이나 피서지가 우리의 쉼터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그 넓고 큰 품이 우리의 쉼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 작가 쿠싱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밤 깊고 비바람 불어 쳐도/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고달픈 인생 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강변에서 무릎을 꿇고 물결치는 잡초와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시인 테니슨은 그의 친구들을 향하여 감탄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운 장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들 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들은 휴가 기간동안 도처에서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파도가 일고 물결 출렁이는 바닷가에 가게 될 때, 우리는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고 한 시인의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산으로 가던지 한적한 시골에 가서 오솔길이나 들판을 거닐 때던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우신 발자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의 걸작품인 '나무'라는 시는 세계적인 명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를 볼 수는/결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하루 종일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나무/여름날이면 자신의 머리카락에다가/방울새의 보금자리를 트는 나무/가슴에는 눈이 쌓이면서도 /비하고도 다정하게 사는 나무/나 같은 바보도 시를 짖지만/나무를 만드신 분은 오직 하나님.

킬머와 같은 신앙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면 우리는 휴가를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쉼터를 찾으신 주님

비단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쉼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도 쉼표를 찍으며 사셨던 것을 성경에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노래 부를 때 쉼표가 적당히 있어야 부르다 호흡이 모자라 노래를 멈추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마치 호랑이를 탄 사람처럼 중간에 내리면 당장 죽을 것 같아 내릴 수도 쉬어갈 수도 없는 처지라면 지치지 않고 얼마나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도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뇌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알려주는 이가 없어서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또는 불치병에 걸려서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씨름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부추겨 주시기도 하시고,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떠보기도 하시고, 때로는 말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밀쳐보기도 하시면서 어떻게 해서든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사람다운 사람, 하늘의 소망과 비밀을 누리는 사람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보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에 떠밀려 지칠 때도 많으셨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보면 답답해서 속 터지는 일도 많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쉬는 시간에

하루를 일하고 밤에 쉬는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그 다음 날 삶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밤에 잠자는 시간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자연질서는 우리가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할 지에 관해 잘 가르쳐줍니다. 하루해가 뜨면서 우리의 몸에는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코티솔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호르몬입니다. 코티솔이 많이 분비되면 신체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가 됩니다. 배고픔, 외상, 출혈, 다툼, 뛰기와 같은 스트레스 상태에 대비하는 겁니다.

이 코티솔은 저녁에 휴식을 취할 때 점차 줄어들면서 대신 멜라토닌이라는 성장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잠을 잘 준비를 하는데 이 멜라토닌은 아침이 되면서 줄어듭니다.

이와 같이 코티솔과 멜라토닌은 24시간을 주기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우리 신체는 휴식을 취할 준비를 하는데, 현대 문명의 문제점은 밤 11시 12시가 되어도 우리의 주변을 마치 낮과 같이 밝게 하여 호르몬의 전환 사이클에 장애를 주어 양질의 수면을 취하는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활이 지속되면(대개는 일평생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신체의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늘 정신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의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는 쉴 때도 상당히 높은 상태로 유지됩니다. 늘 정신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의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는 쉴 때도 상당히 높은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휴식을 취하게 되면 어느 정도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가 저하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 'Post-adrenalin-blue'라는 우울증이 발생합니다.

과도히 흥분한 상태 후에 따르는 허탈감이 바로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 후에 나타나는 일종의 금단현상입니다. 신체적으로 휴식은 바로 이런 아드레날린 금단 현상을 수용하여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를 정상상태로 낮추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체적으로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는 또 다른 흥분을 야기하는 것보다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겉옷을 벗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꾸역꾸역 끼어 입은 옷들이 많습니다. 벗어 던질 때에 쉼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스스로 껍데기를 벗기지 않으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내려놓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겉옷을 벗겨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주간 중 하루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일입니다. 몸이 쉬어야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곤고한 마음이 쉼을 얻으려면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배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쉬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힘을 모으기 위한 절약이다. 여름에 잔디 깎는 사람을 보라. 해가 지기 전에 많은 풀을 베어 낸 후 그는 일을 멈춘다. 그가 게으름뱅이인가. 그는 숫돌에 그의 낫을 쓱쓱 소리를 내어간다. 그것은 나태한 음악 소리인가. 그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연장을 갈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힘으로 훨씬 더 풀을 잘 벨 수 있을 것이다. 어부들도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수선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미래의 섬김을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적 황폐함을 회복시키고, 우리의 연장을 정비해야 한다. 이따금씩 휴식을 취하는 것이 지혜이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습니다. 쉼표를 따라 반 박자나 한 박자 혹은 두 박자를 쉬게 됩니다. 쉬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적당하게 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쉬심으로써 그 원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면서 정말 부지런히 일하셨지만, 쉬어야 할 때는 쉬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일과 안식은 우리들의 삶에 주어진 리듬으로서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처럼 귀한 휴가를 복되게 선용하기 위해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휴가는 1)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 가져야 하고 2)할 수만 있으면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하며, 3)잠간 쉬는 것이어야 하고 4)주님과 함께 하는 쉼이 되어야 하며 5)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여름에도 여러 가지 형편상 휴가를 갈 수 없는 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무더운 여름철에 며칠씩이라도 쉴 수 있는 휴식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달픈 삶, 지친 심신이, 영육이 원기를 회복하여, 건강한 여름 건강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피곤과 수고로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여러분! 여러분을 정중하게 초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능히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분의 멍에를 매고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짐들을 그 분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초청에 순순히 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한한 안식의 자리로 여러분을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분께 우리의 모든 수고와 짐을 맡기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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