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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와 같은 세상 /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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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같은 세상
출애굽기 15:22~27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5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히고 뒤에는 바로 왕이 보낸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오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기적이 일어나 홍해가 갈라져 육지처럼 되는 것을 보고 건너게 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에서 18절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감격해서 부른 찬송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홍해를 경외와 감격 속에 건넌 이스라엘 민족이 사흘동안 길을 걸었는데 수르광야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사실 광야의 길을 걷는 어간 사흘씩이나 마실 물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평 섞인 어조로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고함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흘 전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감격 속에 부르던 찬송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원성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아침과 저녁으로 달라집니다. 갈대와 같이 약한 것이 인심입니다. 이른봄의 날씨처럼 변덕스럽습니다. 금방 햇빛이 내리쬐는 명랑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바람불고 진눈깨비 내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변화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 적인 것은 때를 따라 상황 따라 변하지마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형편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은 결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르광야에 들어서서 사흘 길을 걸었지만 물을 발견할 수 없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곳에 이르니까 물이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고생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 반가워 기다리지 못하고 물을 떠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물은 물인데 너무 써서 구역질이 날 지역이어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는 소리쳤습니다. "쓰다. 쓰다" "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쩌면 마라와 같은 세상입니다. 맛이 없는 세상입니다. 씁쓸한 세상입니다.


1. 수르광야는 고통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르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한 것처럼 우리의 가는 길에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나서지마는 얼마 못 가서 낙심하고 교회에서 떠나고 맙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마는 대개의 경우 예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도 당하지 아니하고 만사형통하고 몸 건강하고, 사업하면 잘 되어서 돈 많이 벌고, 자녀들 출세하고, 남편이 승진하고, 이런 줄로만 알았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그만 겁을 집어먹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뒤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그런 표준의 복이 아닙니다. 세상 표준으로 생각하면 신앙생활 하다가 낙심하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환란을 당하지 않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 믿음으로 화란을 당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데는 어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환란을 극복하고 이기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란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란을 당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환란을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환란을 당하지마는 이 환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얻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수르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생하다가 물을 찾게 되었는데 마실 수 없을 전도의 쓴 물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마음속에 영접할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는 동안에 시험을 만나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내가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것들을 직면하게 될 때 실망하고 낙심되기 쉽습니다.

이때 마귀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네가 예수 믿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네가 그래도 예수 믿기 전에는 육신의 쾌락이라도 있어서 즐기지 않았니? 지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따라 나섰기 때문에 네 마음속에 명랑함이 없어졌어. 너는 지금 이 세상의 그 짜릿한 재미를 다 잊어 버렸어"
그래서 이미 떠나온 애굽을 뒤돌아보며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며 고기 가마 옆에 있던 것이 그립습니까? 지금 당장은 좀 고생스럽다고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마귀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완전히 달라 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을 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하면서 지도자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평을 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옛것은 지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옛습관, 옛성품, 옛지식까지 새로워져야 하겠는데 우리 마음속에 불평이나 원망은 아예 없애버려야겠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아무리 읽어보아도 '불평하라. 원망하라' 한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을 거울로 삼으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옛날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 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이렇게 말해서 욥은 사단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도 욥과 같은 간증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마라의 쓴 물을 입에 대 보고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라느냐?" 하나님을 향해 직접 원망하지 아니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인간심리의 표현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요 불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찾을 수 없는 물을 모세는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로 원망하는 말이 나오면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고 항의한 이 말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말입니다. 사흘 전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쓴 우물의 물맛하나 변하게 못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마실 수 없는 쓴 물이 있습니까? 홍해를 가르신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쓴 마라의 물이 변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실패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는 마라와 같이 쓴 세상을 만나게 될 때는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할 때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해결을 얻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합니다.
기도는 어려움을 해결합니다.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우리 힘가지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직면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오세요. 기도하기 시작하면 문제의 절반은 이미 해결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25절을 보세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그 나무는 여기에 사용하기 위해서 여러해 자라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알지 못하지마는 우리 앞에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쓴 샘물이 있을 때 쓴 물이 단물이 되게 하는 나무를 키우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고난에 대하여 이미 해결책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여러분,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항상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세요. 그러다가 발견하면 "오, 주님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 슬픔과 내 고통을 해결해 줄 말씀,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면서 감격해서 외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쓴 샘물 가에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성령을 통하여 쓴 물이 변하여 달게 하는 나뭇가지를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라와 쓴 물이 단물이 된 것은 아주 신비한 일입니다.
한 나뭇가지를 그 물에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암시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네 주일에 걸쳐서 기적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적은 그 기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기적이 우리에게 누는 영적인 교훈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인류의 조상이 선악과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하신 과일을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쓴맛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생명나무가 있고 그 잎사귀는 우리를 치료하는 약입니다. 이 생명나무로부터 먹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 나무는 인간의 모든 쓴 독을 제거해 줍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역경을 당하지 않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역경과 고난의 쓴맛을 달게 해주는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악을 선으로 바꿔 주십니다.
이 잘려진 나무는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약속 믿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면 이 무거운 죄악의 짐은 다 벗겨지고 생명수 샘을 마시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당장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쓴 물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를 겪어 던졌더니 그 쓴 물이 달아져 당장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당장에 이루어집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고민과 고난의 쓴 물에 십자가를 꽂으세요. 당장에 마실 수 있는 단물이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물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마는 만일 마라가 단물이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 할 필요가 없어,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실 이 땅위에 고난이 전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세상에서 편하게 고난이 없이 사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한번도 병고에 시달려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의 마음속에는 남을 동정하고 가엽게 여기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이별의 슬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가슴아파하는 사람의 슬픔을 알 수 있을까요? 실패의 쓴맛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사업의 실패로 좌절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마라와 같은 이 세상은 우리에게 위로가 넘치는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안겨줍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고난은 어떤 것이고 그 고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고난에는 은혜가 따르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성결해지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으로 연단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간증했습니다. '내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당에 나오시기 전에 마라같이 쓴 물을 맛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마라의 물처럼 씁니까? 전에 나오미라는 여인은 고향에 돌아오면서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마라 부르세요. 왜냐하면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나오미의 생이 쓰고 썼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럴수도 있는 것이 잘 살아 보겠다고 이방에 갔었는데 하늘처럼 믿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이 있어서 위로 받았었는데 가정을 이루고 살던 두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 남편 없는 세 과부만 남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주세요'라고 한 말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볼 때 마라와 같은 세상에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므로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맛보며 승리 적인 행복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마라와 같은 세상입니다. 쓴 경험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며칠 전에 보리빵을 사려고 제 아내와 함께 빵집엘 들렀습니다. 40대 중반의 어느 신사가 빵을 팔고 있는 여자 직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 같이 열심히 알하고 사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행복해 보여요. 나는 내 아내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너무 놀래고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생각할 때 측은한 마음도 들어서 아내더러 '우리가 가지고 잇는 것 다 써도 좋으니 돈이나 마음껏 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위로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슨 큰 재산가는 아니지마는 우리 가족이 먹고사는데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물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아내를 위로하는 일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처분해서 써서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좀 일찍이 돌아오는데 제 아내가 다른 남자하고 호텔에서 같이 다정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괘씸하면서도 이제 얼마 살지 못할 아내를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 갈등을 느끼면서도 용서하노라고 애를 썼고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나 스스로 싸웠습니다. 얼마를 지내는데 아내의 생활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잘 진찰해 보자고 하니 아내는 그럴 필요가 없고 이러다 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번 아내의 병을 확인하고 싶어서 암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의 몸은 모든 것이 정상이고 암과는 상관도 없다고 하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저는 전신이 무너지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배신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만나면 내 타고 있는 이 마음을 이렇게 정신나간 사람처럼 하소연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고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옆에서 빵을 사러왔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혀를 찼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마라와 같습니다. 쓴 경험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것은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는 나무, 죽을 운명에 싸인 인생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을 주는 나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거센 풍랑이 닥쳐왔는데 피난처가 없습니다. 지금의 세대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라같이 쓴 세상을 달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
갈보리언덕에 세워진 그 치료하는 나무는 우리 인생의 삶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의미하게 살던 삶이 의미를 찾게 됩니다. 보람 없던 사람에서 보람을 찾게 됩니다. 슬픔 속에 살던 사람이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미움 속에 살던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불만 속에 살던 사람이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실패 속에서 좌절되어 있던 사람이 새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므로 승리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우리만 소유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아직도 암흑의 세계에서 허덕이고 있는 불쌍한 심령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라와 같은 세상에 여러분의 손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무가 임해서 쓴맛대신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고 새 생명이 약동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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