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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 /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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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 
본문  눅 15:25-32   


여러해전의 일이었습니다. 비교적 저의 목회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한 젊은 초신자 부부의 가정을 심방하여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초신자였기에 이분들의 신앙이 성장하여 열매맺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가정에 열매를 맺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 다시 그 가정의 부부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자매가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아기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 열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제가 영적으로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기도의 뜻을 잘못 육적인 의미로 오해하여 당시 이 부부는 신혼 3년쯤 되어 아직도 피임중이었는데 이제 피임을 끝내고 아기를 가지라는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마 목사님이 자기들이 피임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신 참으로 신통하고 용한(?) 분이로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제 기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매우 엉뚱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의 오해는 결과가 과히 나쁜 경우는 아닙니다만, 어떤 오해는 관계의 왜곡과 관계의 단절까지 초래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맏아들의 사건은 그의 이해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가정과 자신의 삶의 영역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초래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만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15:1-2의 말씀이 이 배경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을 함께 기뻐할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본문의 이야기속에서는 동생이 집에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했던 형님 곧 맏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여기에서 심사숙고하고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이해하지 못함이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교인들의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혹은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들)은--무엇일까요?

1. 아버지의 잔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맏아들이 집에 돌아오는데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소리들이 자기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잔치 소리였습니다. 26절에 보면 종을 불러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27절에서 그는 이 잔치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너무 기쁘셔서 잔치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28절이 보면 그는 함께 기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는 이 잔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잔치를 이해하지 않기로 작심했다고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잔치를 연 아버지의 마음(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 아들의 존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동안 집에 있어서 아버지를 도왔던 아들이나 집밖에서 방황해온 아들이나 동일하게 소중한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 잔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우리교회에서는 이웃초청 사랑의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 잔치기간 나흘동안 우리교회에 처음으로 교회에 참석한 태신자들이 모두 1,268명이었고 그중에 547명이 결신했고 109명이 상담의사를 밝히셨습니다. 감사해야 할입니다. 이제 잔치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잔치를 평가하고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이 잔치기간에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신의 태신자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당신은 몇시간이나 참여 하셨습니까? 주님께 돌아오는 당신의 형제들을 보고 함께 즐거워 하셨습니까? 잃어버려진 이웃의 영혼을 찾는 이 잔치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셨습니까? 무엇보다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들을 찾고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셨습니까? 실패는 결코 그 자체로서 후퇴가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못한 사람은 결코 진보된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번 잔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그렇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새로운 잔치의 교훈을 얻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잔치는 결코 일회용 잔치로 끝낼 잔치가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인생의 날들에 아버지의 성숙한 자녀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계속되는 잔치에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아버지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항변하는 대목에서 그는 "나는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어느정도 이 말의 신실성을 믿어주고 싶습니다. 틀림없이 이 아들은 아버지의 여러 명령들, 심부름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명령만은 순종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아들이 잃어 버려진 상황, 그리고 그 아들의 소식이 끊어진 안타까운 형편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내릴 명령이 "네 동생 좀 찾아오라"는 부탁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동생이 돌아온 이후의 상황이라면 "네 동생 사랑해 다오"라는 명령말고 다른 무슨 아버지의 부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중요한 아버지의 명령들을 저버리고 살아왔으면서도 왜 이 맏아들은 자기는 아버지의 명령을 지켰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들의 우선순위를 혼동한 까닭이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명령인가를 혼동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의 일상적인 심부름, 일상적인 의무에 성실하게 반응하는일 중요하지요? 그러나 잃어버린 동생 찾는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돌아온 동생 환영하고 사랑해 주는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결코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인 기준에서 볼 때 비상식적인 사람들이나 부도덕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아주 양질의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의 삶을 살고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에게 질타당할만큼 책망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교의 우선순위를 혼동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관리하고 지키고 의식을 집행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떨까요? 오늘의 한국교회내에서의 평신도 지도자들의 이미지를 누가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교회내에서 어떤 직분을 차지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위원장이나 팀장,--위원들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교회가 공동체로서 유지되기위해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지만 혹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비교적 성실하게 감당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할 일을 다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맏아들의 오해요 바리새인들의 오해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카터가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었다는 뉴스를 접한바가 있습니다. 무엇이 오늘의 세계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그분이 위치를 추구하기 보다 소명을 추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통령이 중요한 것이 나니라, 전도하고 사랑하는 일이 중요했고 그래서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간 다음에도 동일하게 그일에 성실했고 그런 그의 삶이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면 정말 훌륭한 평신도들은 교회내에서 주어지는 직책과 상관없이 소명(전도와 사랑의 실천)에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적지않게 그 자리만 물러서면 신앙적인 모습에서 후퇴해 버리는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결국 이분들은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신분의식이나 체면 때문에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맏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 동일한 이유들이었던 것입니다.

3. 탕자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이 둘째 아들과 자신의 관계였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동생을 동생으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30절에 그가 이 동생에 대해 사용하고 있었던 호칭을 주목해 보십시오. 뭐라고 불렀습니까?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또한 '이 아들'이란 말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아들'(your son)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끝까지 "내 동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32절에서 이떻게 맏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아버지는 물론 "내 아들"이라고 말씀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맏아들에게 "네 동생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본문의 이야기의 배경을 만들었던 바리새인들도 자기끼리는 형제의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과 조금 색깔을 달리하는 세리나 창기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형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 찾아야하고 사랑해야 했던 형제들이라고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전도를 생활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들이 아버지가 찾고있는 아들이요 내가 찾아야 할 나의 형제라면 그렇게 침묵과 무관심만으로 이웃들을 대하시겠습니까? 그들이 때로 세상에서는 지탄받는 탕자와 탕녀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여러분과 내가 찾아야할 아버지의 잃어버린 자녀들인 것입니다. 당신의 잃어버려진 형제들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선교현장, 혹은 전도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붙여준 별명들(레벨)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천민 자본주의자, 한나라당 사람-새천년 민주당 사람, 호남사람-경상도 사람, 부자-가난한자, 지식인-무식인, 진보주의자-보수주의자등등--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잃어버려진 당신의 형제로 보실수 없을까요? 세계 제1차 대전이 남긴 최고의 영향력있는 작품이 있었다면 레마르크라는 작가가 쓴 "서부 전선 이상없다"일 것입니다. 이 소설이 남긴 가장 큰 기여는 이데오로기를 넘어서서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장의 막바지에서 주인공 폴 바우머는 갑자기 총을 던지면서 적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이 도대체 왜 나의 적이란 말입니까? 당신이나 나나 우리를 전쟁터에 보내놓고 가슴저리고 있는 부모들의 불쌍한 자식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는 인간이란 말이오.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폴이 10월의 맑은 하늘 아래 적군의 총의 맞아 숨을 거두던 날 최고사령부는 짤막한 전황 보고서를 발표합니다.-"서부전선 이상없다"고. 그렇습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다시 한번 우리주변의 이웃들을 잊혀지기엔 너무나 소중한 인간으로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지만 잃어버려진 존재-그래서 전도해야하고 사랑해야할 인간으로 다시 보아야할 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애타게 찾고 계신 당신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을 부탁하는 내 형제들로 보아야 합니다.

그때 오직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과 저는 세상마당에 존재하는 이웃들에 대한 숱한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서 우리의 이웃들을 복음으로 전도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맏아들이 살아갈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떤 맏아들이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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