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 막 2:13-17

  • 잡초 잡초
  • 230
  • 0

첨부 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막 2:13-17 )

부름 받는 자의 가치 

명강사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세미나에서 그 강사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사는 갑자기 호주머니에서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돈을 갖고 싶지요? 어디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그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10만 원짜리 수표를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구겼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 수표를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사의 그 행동에 놀라면서도 역시 거의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좋아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10만원 짜지 수표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으며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 10만 원짜리 수표를 집어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또다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때 강사는 힘찬 어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아무리 10만 원짜리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했을 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수표는 항상 10만 원짜리 수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실수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수표와 같은 영원한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David Humble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있었는데 이 분은 많은 발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 연구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 결혼식 날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연구실에 가서 시험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어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 사람을 보냈더니 작업복을 입고 연구를 하고 있을 때 "박사님 무엇을 잊어버린 것 없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신부는 "결혼식 날짜도 잊어버리는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다" 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본질이 무엇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에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인생의 본질, 신앙의 본질, 교회의 본질, 가정의 본질, 실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고 그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인생의 본분은 성경 잠언이나 전도서를 보면 "다 헛되고 헛되다"고 부인합니다. 모든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도대체 성경에서 인생의 중요성, 삶의 중요성, 가정의 중요성, 자녀의 중요성 등 중요한 일들이 많고 일하고 먹고사는 것이 중요할 텐데 그것이 다 헛되다고 결론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줄 착각하고 사는 모든 것은 헛된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이렇게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무엇이 본질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그 외의 모든 삶은 헛되다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서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분을 높이는 일에 인생의 본질을 두어야 되고, 인간의 목적을 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가진 모든 먹고 마시는 일과 모든 일이 아름답고 선하게 이루어진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질을 제쳐놓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그곳에 목적을 두고 인생을 소비하면 마침내 어느 시간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본질은 행복한 것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워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고 모든 우선순위를 두고 노력하면 행복은 마치 나무가 자라 꽃이 피듯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행복과 기쁨이 오고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프의 황제라고 말하는 잭 니콜라스가 쓴 책 "프로와 비프로의 차이"에서, 비프로는 골프가 되지 않으면 핑계를 대고 이유가 있지만, 프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고 내가 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 타를 잘못 치면 자기의 실수를 고치느라 피눈물나는 노력을 통해서 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프로와 아마츄어의 차이는 불평을 너에게 하는가, 나에게 하는가의 차이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너에게 있느냐, 나에게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나 때문에 그대는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왜 행복하지 않은가를 물어보고 잘 고쳐 가면서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있으십니까" 평안하지 않다면 어느 점이 평안하지 않은지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입니다. 물어볼 때는 대답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고칠 준비가 되었거든 물어보고 그렇지 않으면 묻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본질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는 고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쓸 때에 거기에서 행복한 가정의 본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올바로 갖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이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완전하신 분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거룩하신 분이 그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서 자기의 생명을 쏟아 주시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를 영접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원죄 가운데 빠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



그러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성도의 본질,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의 본질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영혼들을 건지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몇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 양육, 변화시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더 전도하고 일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주님께로 가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기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훈련받은 다음에 우리는 반드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수고하고 애씁니다. 사실 이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는 제도화되어 갑니다. 이 본질을 떠날수록 교회가 종교화, 예식화 되어갈 뿐 아니라 세속화 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본질을 이해하고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을 짓고 여기서 우리끼리 화목하고 여기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처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서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을 마태복음 9:9에서는 마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무 공무원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권에 빌붙어 먹고 사는 매국노로 취급되었습니다. 보통 죄인을 지칭할 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직업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그만큼 세리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리 마태를 예수님은 세관까지 찾아와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태는 구원받은 사실이 감사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입니다. 마태의 집에 마태와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는 세리와 죄인이라는 이들 그룹과는 별도로 이들을 멸시하며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그룹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비판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 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즉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자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입니까? 스스로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배하러 나오면서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주님을 사랑했던 사도 바울이 죽기 직전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는데 우리야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자이면서도 날마다 죄를 짓는 죄인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미화하고 보호함으로 남에게 죄인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죄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죄 자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지적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교회 안에서도 죄를 말하면 싫어합니다. 죄를 말하지 않는 교회, 죄를 말하지 않는 설교자를 찾아다닙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낀 사람은 자신을 개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니까 죄인 된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그와 같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였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통해 교양이나 얻으려는 사람들. 영적인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 십자가 밑에서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나의 것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도 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싫어합니다. 죄인은 죄에 대하여 말할 때 자기 위선, 죄 등으로 인하여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므로 그렇게 좋지 않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내어놓고 반응합니다. 자기 노출을 꺼리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척 위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만 다루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숨기며 문제삼지 않는 것이 옳은 태도로 취급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병드는 증상입니다. 교인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막대한 심리적 피해를 가져다 준다



죄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 국가를 파괴합니다.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은 죄 때문에 와집니다. 불안, 불면, 무력증, 우울증, 열등감, 고독, 증오, 복수심에는 어떤 형태로든 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모글러라는 현대 심리학자는 인간이 고백하지 않고 속죄 받지 않은 죄로 인하여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병들어 있는 존재가 현대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가정 불화의 원인도 대부분 죄 때문입니다. 서구 선진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신과 의사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바로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잠이 안 오고 불안합니다. 죄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 국가를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가 이 죄의 문제를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죄에 대하여 자기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관계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여야 합니다. 무슨 방법으로든 이 문제는 해결해야만 합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그런 갈등, 그런 고통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도 죄 사함을 받았으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확신은 열매와 연결되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았다 하면서도 마음대로 죄를 밥먹듯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보아도 모순입니다.



죽어 지옥 갈 사람의 죄 문제나 구원받은 성도의 죄 문제를 다같이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 되심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무 죄 없이 나의 죄를 지고 피를 뚝뚝 흘리며 그는 돌아가셨습니다. 짐승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여러 다양한 구원의 방법이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걸까요.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으면  죄 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레위기 17:11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마귀가 죄의 항목을 하나님 앞에 열거하며 낭독해도 "내가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했다"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나의 모든 죄를 씻고도 남음이 있는 보혈의 피입니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경건의 진통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경건의 진통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 옆에, 내 위에, 내 아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큰 은혜와 감격 속에 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래야 십자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새롭게 체험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책을 느낄 때마다 '너 십자가를 다시 쳐다보아라!' 말씀하십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날마다 체험하는 감격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일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있는데 대통령이 특사로 풀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용서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깊은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불안, 초조, 불평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지금도 예수님은 아직도 여전히 죄인인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의사는 오직 병든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의사는 병든 사람이라면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가려서는 안됩니다. 벼슬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환자라면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직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이런 의사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낮이나 밤이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영육을 살리시기 위해서 탄식하시며 일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영혼도 고치시는 의사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찾아오는 아픔과 고통과 좌절과 낙심과 절망으로 신음하는 인간들을 고치시는 의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마태와 그의 친구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암'입니다. 암이라는 병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무지 아프지 않아서 증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손가락이 잘려나가면 즉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에 걸리면 10년이고 15년이고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손을 댈 수가 없는 말기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증상이 없으면서 서서히 퍼지는 병이 암이기 때문에 암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병자들입니다. 자기가 병에 걸렸는지 모르는 사람도 병자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환자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로운 죄인들은 매우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험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허준이나 히포크라테스보다도, 슈바이처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의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즉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하나님께 모입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 받은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나와 여러분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대답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매일매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 오라고 하십니다.



차별이 없이 다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는 사람은 다 오라고 하십니다. 짐 진자들도 다 오라고 하십니다. 병든 자도 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들도 오라고 하십니다. 사업에 고통 당하는 자도 오라고 하십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오라고 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도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짐들로부터 우리를 쉬게 해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눌린 우리들을 고치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왜 주저하십니까? 왜 의심하고 계십니까? 왜 흔들리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살려고 힘을 쓰십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의사입니다. 만능의 의사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품으로 매일 매일 달려가셔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고침을 주시고, 회복을 허락하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셨을까?



15,16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죄인들로서 서로 같이 먹고 마시는 자들과 그 죄인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부르셨습니까? 깨끗하고 정결하고 고상하다고 스스로 말하며 저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생각이 틀린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부르셨습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그냥 같이 있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은 편견 없이 서로 같이 사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같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자들, 같이 동무가 될 수 있는 자들 이런 자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서로 반목하면서 살아갈 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서로 따뜻하게 대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비록 그들이 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배운 것이 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똑똑해서 서로 싸우고 자기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은 서로 따뜻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2,3)"



우리가 이 시대에 사람에 대한 좁은 생각들, 편견을 넘어서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과 공동체들이 얼마나 큰 능력과 감동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러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좁은 인간관과 좁은 편견들 때문이 아닙니까?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보면 꼭 몇 사람하고만 같이 교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끼리만 잘 어울립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삶에 풍성함이 없고, 그것 때문에 예수 공동체인 교회가 능력이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 사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버리고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지고 다가갈 때 그때 새로운 선교의 장, 새로운 능력의 장, 새로운 부흥의 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능성을 보는 자들이 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정을 보고, 서로 편견이 없이 사랑하며 같이 살아갈 때 이 교회는 정말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수 공동체가 되는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함과 배움과 고상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고 그 속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나갈 때 우리는 정말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더하여 주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즙으로 지정하여 이것을 먹고 마시도록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몸이 희생됨을 의미하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서로 교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즙을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거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만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로의 인침이라면, 성만찬은 그 인침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아먹고 마실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새롭게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만찬을 받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내대신 죽음을 당하시고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여러분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 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