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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 중에 부르는 노래 /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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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중에 부르는 노래 (벧전1:3-7)


우리가 자주듣는 성가곡 중에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 9번을 잘 알고 계시죠. 저도 감명깊게 늘 듣습니다. 베토벤은 57세에 죽었다고 하는데 스물 여덞때부터 청각장애 질병을 앓았습니다. 곧 죽을 것 같아 서른 두 살 때 두 형님(카알과 요하네스)에게 유서를 쓸 정도였습니다. 그 유서내용을 보면 청각장애자로서 그가 당했던 고통, 특히 작곡자로서 자기가 쓴 곡이 어떻게 연주되는지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그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만이라고 한순간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곧 죽지 않았고 그로부터 24년 후에 (죽기 1년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엄청난 교향곡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향곡 9번 합창입니다. 그런데 그 합창 교향곡의 내용이 기쁨에 드리는 송시(쉴러)입니다. 그 후 160년 뒤인 1989년 10월 23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되던 날 동서독의 성도들이 모여 불렀던 노래가 베토벤의 그 합창이었습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사람입니다. 고난을 노래로 이긴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지금의 터키)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그 믿음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시련 중에라도 노래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노래해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586년에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본토를 떠난 이후 유대인들은 본토를 떠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의 유대인은 약 100만명 정도였고 해외교포, 디아스포라는 2백만에서 4백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를 읽는 소아시아 지방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하는대로 흩어진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해외에 흩어져서 정처없이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본토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항상 본토를 그리워하며 본토로 돌아올 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그네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핍박이 있었고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유 때문에 불과 같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그네의 삶의 특징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그들의 삶이 고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그네의 삶은 늘 순탄함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시험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으로,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또 어떤 이는 물질적인 손해로, 어떤 이는 정신적인 문제로 고난을 받습니다.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난을 만난 사람들은 근심합니다. 두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같은 문제로 고민하며 근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우리 가운데도 근심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문제를 생각하면서 담임목사님의 부재로 인한 걱정과 근심으로 한숨을 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만난 이런 저런 시험의 문제로 걱정하며 근심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 자녀교육, 건강 문제 등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처럼 시험을 만난 사람들에게 그 시험을 기쁨으로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시련중에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시련의 때에, 마치 광야 길을 가는 것 같이 힘든 그 때에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시험을 만날 때에 어떻게 노래할 수 있습니까?

3절을 봅니다. 왜 우리가 고난의 날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광야 길을 갈 때에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거듭남의 축복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찬송해야 할 이유입니다.
살면서 저절로 입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좋아서 입이 벌어지는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직장의 승진으로 인해 등.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님들의 가정에 그런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듭남의 기쁨 때문에 입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까?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 때문에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런 기쁨을 누리신 적이 있다면 그분은 고난 가운데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광야 길을 가면서도 주께로부터 받은 그 구원의 은혜로 인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누가 고난 가운데 노래할 수 있습니까? 누가 죽을 것 같은 근심의 때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고난의 때에 노래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절을 다시 봅니다.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소망입니다. 이는 3절의 문맥에서 볼 때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산소망에로 낳으신 자라는 문맥에서 볼 때, 죽음과 대치되는 산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에게 전달되었고, 이 생명이 소망을 산소망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소망은 시체처럼 싸늘한 죽은 소망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하고 없어집니다. 새로운 집을 사는 기쁨도 잠시,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것도 잠시,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잠시가지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대로 그것 가지고 나면 금방 마음이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소망은 산소망이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아름다워집니다. 세상의 소망은 대개 실망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신자의 소망은 결코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롬5:5).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너머에도 있는 것이며,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자식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모리아 산으로 올랐던 아브라함의 소망을 아십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던 그의 소망. 죽을 것 같은 고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했던 욥의 소망을 아십니까?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무서운 환난과 죽음 앞에서도 얼굴에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산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소망을 가진 자라면 고난의 길에서, 시련을 지난 때에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을 스쳐가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지만 산소망을 가진 우리들은 저 너머를 보면서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산소망은 너무도 확실하고 안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자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산소망이 있는 자는 광야 길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4절을 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됨으로 하늘의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얻은 하늘기업은 썩지 않는 것입니다. 더럽지 않는 것이고 또한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기업의 특징이 유한한 것이고 썩어지고 더럽고 쇠하는 것인 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얻을 하늘의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거룩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기업입니다. 보장된 기업입니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과 부패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재산 중에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혹시 썩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사망이 찾아오면 다 놓고 가야합니다.
눅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고서 더 많은 곳간을 짓고자했던 부자이야기입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곳간마다 곡식으로 가득 채워 놓았으니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되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와 비슷한 이야기 하나가 또 있습니다. 한 임금님이 보기에 땅에 욕심이 많은 부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그대가 오늘 이곳에서 출발해서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려서 저녁쯤에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시오. 당신이 돌아올 그 출발 지점에서 도착지점까지 돌아온다면 그 땅을 당신에게 주겠소" 그래서 이 노인은 해가 뜨자 마자 출발을 합니다. 저녁쯤에 그 지점에 노인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노인은 지쳐서 죽고 맙니다. 임금님이 그를 위해 묘비를 세웠는데 그 묘비명이 이렇습니다. "이 무덤 속에 묻힌 노인은 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소유는 누워있는 한 평의 땅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에서 썩어지는 것의 특징입니다.

"더럽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 부정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재산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기와 부정으로 얻어진 것들입니까? 하지만 성도의 기업은 도덕적인 부정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과 시간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합니다. 권세도 십 년을 가지 못합니다.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권세는 다 꽃처럼 시간이 가면 시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기업은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대리석도 녹이 슬고 부스러집니다. 강력한 왕조들과 제국들도 붕괴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하늘 기업은 녹도 슬지 않고 붕괴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이 어떠합니까? 똑똑하고 잘 사는 것 같은 그들이 살 소망이 없어 허무주의자가 되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썩는 것이고 쇠하는 것이고 더러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원히 변치 않는 기업, 즉 영혼의 구원받음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기업은 세상의 것과는 달리 분명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분명히 영원한 기업이라면 말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는 성도는, 지금 그가 가는 길이 비록 눈물나는 길리라고 할지라도 노래하며 갈 수 있습니다. 저 너머에 있는 단단하고 견고한 기업 때문입니다.

5절을 봅니다. "보호하심"이란 '보초를 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보초를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시121). 이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상속자의 안전보장입니다. 여기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는 "보호하심을 입고 있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는 과거에 한 번 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러니 노래할 수 밖에요. 하나님이 마지막 날 우리가 구원받는 그 날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데 이것보다 더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 고난 가운데 있고 현재의 삶에서 눈물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심을 믿음으로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 잠간 근심하지만 크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련이 우리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주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었듯이 성도들의 시련도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벧전4:12).

7절을 봅니다. 성도들에게 시련과 환란이 필요한 것은 시련들이 믿음을 제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환란은 오히려 믿음의 연단이 됩니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닙니다. 반짝이는 것을 용광로에 넣어보면 진짜 금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납니다. 믿음으로 보인다고 하여 모두 믿음이 아닙니다. 시련의 용광로에 들어가봐야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진짜 금이라고 할지라도 용광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마찬가지로 참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교만과 허영, 이기심, 세속성 등의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동양의 제련공은 금속 속에 자기 얼굴이 비췰 때까지 그것을 용광로에서 끄집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 속에서 주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비췰 때까지 우리를 고통의 용광로에서 끄집어 내지 않으십니다. 분명 나그네인 성도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시험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으로, 어떤 이는 불의로 사고로, 어떤 이는 물질적 손해로, 어떤 이는 정신적인 문제로 고난을 받습니다. 더욱이 국가적 박해로 무서운 고난을 겪기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면 누구나 이러한 고난이 다가올 때 피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도가 당하는 시련은 금보다도 더 귀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환난은 가면을 쓴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환난은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하지만 그 가면을 벗기고 보면 거기 축복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레냐 마리아라는 여인을 아십니까? 그녀는 스웨덴의 34세된 여인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스펠 가수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녀가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는 짧은 기형아로 태어났을때만 해도 그 부모가 의사들부터 시설로 보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슬픔과 절망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슬픔의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은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많은 활동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입니다. 슬픔과 고난 중에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느냐고! 그녀가 세 가지 이유를 드는데, 그 첫째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둘째는 사랑하는 부모, 셋째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였기에 절망 가운데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였고, 비록 장애인이고 고난의 삶을 살지만 그분이 사랑하시고 지키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눈물 골짜기에서도 노래하며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보고 실망하고 낙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급이라는 완성된 작품을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완성된 작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괴로움도 있고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아름다워져 갈 것입니다. 점점 연단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상급 주실 만큼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면입니다. 시련 가운데서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눈물나는 광야 길이라도 기쁨으로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거듭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이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 기업을 유산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 가운데 이 은혜와 감격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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