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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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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03:1-6>

□ 여호와를 찬양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
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
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
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시편 103장 1절-6절)
   
1.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요리문답 제 1조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
거워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이름을 찬양함입니다.
찬양은 목소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내 속에 있는 것’으로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속에 있는 지식, 내 속에 있는 감정, 내 속에 있는 의지, 이 모든 것으로 하나
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호흡이 있는 자마다 모두 찬양하
라고 하였습니다.
즉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란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보내는 경우들
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약하고 힘없는 죄인들 인고로 하나님께 구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
문에 그런 줄 압니다
마는, 너무 정도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찬송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주로 기도(祈禱)라고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
다.
그래서 기도에 관하여는 늘 많은 말들을 하면서도, 찬송에 관하여는 그렇게 많
이 정성을 쏟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속에 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매주일 예배 중 찬양의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개혁자 루터는 찬송은 곡조 붙은 기도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찬송을 정성으로 부르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찬송은 열린 마음에서라야 불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닫혀진 마음에는 찬송이 나오질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 예배할 때 보면, 입을 벌리지 않고 속으로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찬송은 소리를 내어 불러야 합니다.
시편 66: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를 지르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를 지르라는데, 입을 열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건강진단은 찬송 부르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뭐 신나는 일이 있어야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닙니까?
신나는 일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노래를 부르라고 한들 불러집니까?

구약의 다윗왕 때 보면 성가대원이 1,000명에서 4,000명까지 있었습니다.
288명의 관현 악대가 있어 저들은 밥먹고 찬양만 준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상 6:31절에 보면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
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때 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렬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고 하였습
니다.
역대상 25:6-7절에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혜만은 왕
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서 익숙한
자의 수효가 288인이라”고.... 이 얼마나 웅장하였습니까?
열린 마음이란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찬송가에 보면, 곡조가 네 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줄로만 찬송을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각각 자기가 부를수 있는 것으로 부르라고 네 줄로 음표를 적어 놓았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앞으로 그렇게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화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즐거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첫번 구속 사역을 시작할 때 찬송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
니다.

주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였을 때, 천군 천사들의 찬양 속에 구원의 소식이 전
해졌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그러면서 천군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찬송 속에 임한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찬송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그러면 왜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해야 하는가?

첫째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감사할 줄 모르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찬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① 하나님은 나의 죄를 사하시고,
② 나의 병을 고치시고,
③ 내 생명을 멸망에서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④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병을 고쳤다는 말에는 그렇지 않게 들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① 우리 어머님 병을 왜 고쳐주지 않는가?
② 우리 아버님 병을 왜 고쳐주지 않는가?
③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 병을 왜 고쳐주지 않는가?
그렇게 의심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이나 영혼의 병이나 결국 병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데, 그 죽
음의 문제에서 해결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죄의 값이 사망인데, 그 사망을 해결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죄 없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죄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함으로 나를 사망
에서 구원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내 죄과를 도말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죄과를 도말하신 분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전과자의 기록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도 보면, 지난번 내란 음모 죄로 사형을 언도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신의 기록이 없어지도록 무죄 선고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
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죄과를 도말했으니, 어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마땅한 일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과를 도말해 주었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
것이 제일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죄입니다.
여기 <도말 하였다>는 말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사야 44:22절에“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도말 하였다는 것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경책하십니다.
하나님의 경책은 심판 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식을 바르게 하
려는 경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
라 갚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즉, 나를 죄인으로 다루지 아니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탕자처럼 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죄과를 기억치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210장을 지은 마틴 목사는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내 죄 사
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길이
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 나의 모든 것 변하고 / 그 피로 구속받았네 / 하
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 내게 정죄함 없겠네 / 라고 감격의 찬송을 불렀습
니다.

셋째, 하나님은 나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체질을 제일 잘 압니다.
어느 부분이 약한지를 그를 낳은 어머니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하나님은 어머니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49:14-15절에“오직 시온이 이르기를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
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어린아이를 낳은 어머니에다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성적인 사랑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체질을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질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과를 이미 기억치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돌아와야 구원시키는 하나님이라기 보다, 이미 구원시키려고 작정해 놓았으니
돌아만 오면 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
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1-2)


그러기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아직도 죄의 자리에서 방황하는 생활이라면, 이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
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해 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달려 나와 나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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