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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3) / 마 5:5 , 마 11: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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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3)
< 본 문 > 마5:5, 마11:29~30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H. 스펜서가 처음 사용한 말인데, 생존 경쟁에서 외부 환경에 작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또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말이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강한 자만이 약한 자를 이기고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단 동물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집단과 집단 사이,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것은 공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강해지려고 애를 씁니다. 육체적인 힘을 키우고, 소유를 늘이고, 권력을 지향합니다. 국가들도 경제 대국, 군사 대국이 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앞서야 된다는 강박관념까지 갖게 됩니다. 정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선 그런 논리로 살아야 겨우 자리를 지키고 먹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살벌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전혀 딴판입니다. 오늘 읽은 팔복 세 번째 말씀 마5:5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쉽게 수긍이 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이라면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가 부드러움, 우유부단, 허약함 ... 등인데, 어떻게 그렇게 약해 빠진 사람이 살벌한 세상에서 성공을 하고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팔복의 말씀 하나 하나가 다 그렇듯이 이 말씀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속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험한 세상에 살다 보니까 매사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서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진정한 행복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마음문을 활짝 열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함의 의미가 무엇이며, 온유한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며, 그 축복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온유한 사람이 되는지 차례차례 살펴보기로 합니다. 부디 이 말씀 듣고, 참 온유한 사람이 되어서 행복의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의 의미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단순히 부드러운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그 시대에 이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 또 예수님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를 파악하는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우리의 편견을 갖고 지레짐작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팔복 말씀을 강해하면서 부득불 성경 원어를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라오스’(πραος)인데, 이 단어는 ‘부드러운’, ‘겸손한’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힘이 없고 약해서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힘이 있지만 잘 조절되고 다스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을 받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결코 강한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이 있지만 ‘잘 다스려지고 절제된 인격’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이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 그 용례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여러 가지 중에 아주 쉬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맹수가 잘 훈련되고 길들여진 상태를 가리켜 온유하다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예> 곰 - 그 힘을 마구 사용하면 사람 잡아 먹는 것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지니까 우리 밖에 내 놓아도 괜찮습니다. 마치 순한 양처럼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줄넘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온갖 재롱을 부립니다.
예> 바람 - 허리케인처럼 통제되지 않은 바람은 그 힘이 파괴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잘 다스려지면 건설적으로 사용됩니다. 산들바람처럼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바람이 되기도 하고, 풍력 발전을 하는 바람처럼 생산적인 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 물 - 홍수처럼 통제(=治水)되지 못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댐을 막아서 잘 조절하면 전력도 생산하고, 농사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 그렇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욕심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며 그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2] 온유한 사람의 특징

예수님은 온유함의 표본(model)으로 당신 자신을 소개합니다. 마11:29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 그랬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온유한 사람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닮은 신앙의 인물들을 봐도 온유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① 하나님에 대한 태도 : 겸손, 순종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므로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순종합니다. 때로는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 하나님의 뜻과 달라도,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손해를 볼 것 같고, 잘못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에 순응합니다. 옥토 같은 심령의 소유자(teachable spirit)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실은 유약하고 비겁한 게 아니라, 큰 용기가 요구됩니다.

예> 예수님 - 겟세마네 기도(마26:39) “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53:7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예> 요셉과 마리아 - 처녀가 잉태해야 되는데, 자기 약혼녀가 잉태해야 되는데 ... 하나님의 뜻이기에 겸손히 순종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예> 대학생 시절 수련회 ... 동해 바다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학생을 구하려 들어가던 K 선배(졸업생, 교사) ...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에 순종한 것입니다. 다행히 두 명 다 구조되었지만 ... 그 바람에 제가 결정적으로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함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창시자인 쟝 깔뱅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추라.” 말씀의 멍에를 메고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② 사람들에 대한 태도 : 관용, 용서, 섬김, 사랑, 의분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인정하기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순종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관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이 죄를 지어도 용서할 줄 압니다. 그리고 섬깁니다.
예>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눅23:34 가상칠언 중 제1언 “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

예> 다윗 -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갈 때 ... 시므이가 저주 ... 그때 흥분해서 죽이려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16:10~11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진압 후 환궁할 때 시므이가 태도를 바꾸어 용서를 빌자 그대로 봐 줍니다.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는 겁니다.
예> 모세 - 구스 여인과 재혼한 자신을 비난하다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에 걸린 마리암 ... 모세는 그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예> 요셉 - 애굽 총리의 권력으로 보디발의 아내,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섬겼습니다. 두려워하는 그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게 온유함입니다.
예> 우뢰의 아들 요한 - 성급하고 거칠고 ... 그런 성품이 예수님 만나서 변화 ...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니까 ...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은 스스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갈5:1,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부들부들하고 생전 화도 내지 말아야 하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지만 진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성전 청결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종교 지도자들과 장사꾼들에게 채찍질하며 분노하셨습니다. 모세도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고 범죄했을 때 분노하면서 3천명이나 처단합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기심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입니다. 또 그는 분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해 울면서 기도합니다. 이게 온유함의 양면성입니다.(출애굽기 32장 참조)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온유함은 무조건 부드러운 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강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3] 온유한 사람이 되는 방법

마11:29 다시 보면 ... 예수님께서 “내게 배우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 그랬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통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셀프 컨트럴은 예수님의 컨트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속박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사랑에 감동되어서 자진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구하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 왕좌에 좌정하셔서 우리의 언행심사(마음, 생각, 언행, 인격)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의 인격 속에 저절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갈5:2~23. 그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온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온유하기 원하십니까? 늘 말씀과 가도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안에 온유한 인격이 아름답게 형성될 줄로 믿습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되면 행복해집니다. 어떤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마5:5 다시 보시면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

여기서 땅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온유한 사람은 참된 하나님 백성이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복락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업이라 말이 상속재산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라는 겁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런데 이 세상 살 동안에도 땅을 정복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창조 당시, 인간의 타락 이전에 주셨던 세상을 다르시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알렉산더 대왕이니 나폴레옹처럼 땅을 정복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은 정복했지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비참한 인생으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 소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가 되든지 그것을 잘 다스리는 능력을 얻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시37:11 보면 온유한 자의 복을 뭐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의 소유는 아무리 많아도 독이 들어 있는 떡과 같고, 오염된 공기와 같습니다. 양도 중요하지만 질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본래는 학자요, 부자요,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예수 믿고 나서 분토처럼 다 버렸습니다. 분명히 육신적으로 보면 그는 가난했고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외칩니까?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기에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 살아간 것입니다.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영적인 부자, 진짜 부자의 모습입니다. 잠언에서 아굴이 기도하며 열망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잠30:8~9 “ ...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여러분,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이 땅에서 얼마를 가졌든지 모든 것을 가진 최고의 부자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부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게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행복을 위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할까 오늘 예수님의 행복론에 비추어 곰곰이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일 잘못된 세상의 허구적인 행복론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면, 속히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유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저 천국에 들어가서도 부요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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