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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4) / 마 5:6, 엡 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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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4)
< 본 문 > 마5:6, 엡4:21~24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슬픔이 제일 크다.” 그렇습니다. ‘배고픔’은 인간 생존을 위해 가장 긴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배고픔’보다 더 큰 고통이 있죠. ‘목마름’입니다. 비근한 예로, 며칠 동안 굶을 수는 있지만, 계속 물을 마시지 못하면 큰일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너무나 목이 타면 군인들이 자기 소변을 받아 마신다고 합니다. 평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극도로 목이 타면 이런 해괴한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5:6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희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 굶주리고 갈증으로 괴로워한다면 말이 될텐데 복이 있다니! 다행히 그 앞에 ‘의에’라는 말이 있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팔복의 말씀이 다 그렇듯이 이것은 육신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채워지지 않아서 걱정이지 채워질 수만 있다면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건강하니까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안 먹고 안 마셔도 전혀 느낌이 없습니다. 또한 병든 사람은 벌써 입맛이 가셔서 진수성찬도 그림의 떡입니다.

중병에 결렸다 회복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한참 항암 치료를 받고 기력이 쇠해서 음식 먹고 기운을 차려야겠다 싶어 부인과 함께 식당에 갔답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설렁탕을 시켰놓고 막 먹으려고 하는데, 입이 깔깔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 부인과 함께 숟가락을 놓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주림과 목마름도 정말 축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또 그런 사람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복론또 한 가지를 배우시고,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주리고 목마름’의 의미 : 강렬한 소원(갈망)

이 말은 우선 절대 궁핍에서 느끼는 고통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의 의미를 속속들이 공감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럴 겁니다. 혹 6.25를 겪은 분들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절대 궁핍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리고 목마른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 인간은 자연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말은 ‘강렬한 소원’이나 ‘갈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육신적인 차원이 아니고, 영적인 차원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을 찾듯이 당연한 일입니다. 시63:1 말씀을 보면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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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더욱 실감나는 것은 시42:1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설명할 때도 인용한 바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영적 결핍을 느끼므로 영적으로 갈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보다 한층 더 열렬히 갈망하는 겁니다. ‘갈급해하다’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영어 성경 보니까 ‘pant’라는 단어입니다. ‘헐떡거리다’ 이런 뜻입니다.

[2] 주리고 목마름의 대상 : 세상 것이 아니라, 의(義)를 향한 갈망

주리고 목말라 하되 특별히 대상이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의 육신적인 것들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망의 대상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것 대신에 이제는 ‘의’를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① 세상 것을 향한 갈망 :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육적인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 등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육신의 갈망은 채울 수도 없고, 설사 다 채운다 할지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 음식을 먹을 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질립니다. 싫증이 납니다. 그리고 자꾸 더 좋은 음식만 추구하다 보면 웬만한 음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디
음식만 그렇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게 그렇습니다. 온갖 물질, 권세, 명예, 쾌락 등 ...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세상에 속한 육적인 것들은 무한대로 추구하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육신의 욕망은 만족을 모릅니다. 잠30:15~16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거머리를 상상해 보세요. 착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습니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족을 모릅니다. 불도 그렇죠. 아무리 많이 태워도 또 태우려고 합니다. 마치 소금물 마시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것들은 오히려 적절히 절제할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욕망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다스리는 데 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욕망은 육신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예> 라처드 칼슨(미국의 스트레스 치유 상담가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저자) -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 - ‘욕망지향적 인생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갖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다가 하나 이뤄지면 다른 것을 또 추구하고 ... 이런 과도한 욕망이 스트레스가 되고, 마침내 질병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딤전6:8 “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러나 말처럼 이게 쉬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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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죠. 정말 이렇게 되려면 ‘갈망의 방향’을 영적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지면 참 만족을 누립니다. 이렇게 되면 육적인 것은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고, 있는 것만큼 그 범위 내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② 의를 향한 갈망 :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영적인 갈망’을 의미합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의라고 하면 흔히 옳은 것, 바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단순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에게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범죄 타락하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롬3:23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참다운 의는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의의 절대 기준입니다. 인간은 상대적입니다. 자기는 옳다고 주장하지만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존 스타트 목사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를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i) 법적인 의 :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가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속죄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그 피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옷을 입히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창3:21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줍니다. 이때 어린 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그 피로 죄를 덮어준 것입니다.(속죄 = 히브리어 ‘카파르’ = 우리 말 ‘덮다’)

눅15:22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의의 옷)을 입힙니다. 자격없는 사람이지만 아들로 인정해 준 것 입니다. 의를 덧입혔다고 합니다. 칭의라고 합니다.(이신칭의) 그러므로 의에 주린 자는? 나 자신에겐 의가 없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옥형벌 당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받아 주실 것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의로운 자'가 행복하다고 하면 우리는 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에 주린 자'가 행복하다고 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나의 주린 마음만 보시고 의인의 신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 속에 구원의 기쁨이 넘칩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참 평안입니다.

ii) 도덕적 의 : 법적으로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가지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이 와서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곧 도덕적인 의를 갈망하는 것이요, 교리적으로 말하면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런 갈망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세상의 욕망과 추악한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모습을 닮아가고자 기도하고 노력해야 됩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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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라”

iii) 사회적 의 :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도덕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룬 사회 속에서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해야 됩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자주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암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합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5:13~16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착한 행실로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 헨리 나우웬 - 예일대, 하버드대 교수 역임 - 자신의 이론과 학문이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무슨 유익인가 고민하다가 대학 강단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서 여생을 살다가 천국에 갔습니다.
예> 유관순 열사 - 감리교 신자 ... 일제 치하에서 불의가 판칠 때 나라가 독립을 하고 의로운 사회가 이뤄질 것을 기대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10대 소녀의 가슴 속에 사회적인 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를 갈망하면서 무엇보다 모든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런 의를 모두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하나님의 의를 갈망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풍성한 은혜로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앙생활 하면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관습화입니다. 신앙이 형식화되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보니까 영혼이 냉랭해지고, 가슴이 식어갑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합니다.(고전10:12 참조) 소위 ‘라오디게아 병’에 걸리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신적으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피폐해져갔습니다. 결국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계3:16~17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육신은 지나치게 갈망하면 채움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불만족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영혼은 갈망할수록 더 풍성히 채움을 받습니다. 본문의 “주리고 목마른 자는 ... ”에서 두 동사가 현재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복 : 흡족한 은혜(영적 포만감)

마5:6 후반절 보면 “ ...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 그랬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르타조’(χορταζω)인데, 풀과 곡식으로 가축을 배불리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실컷 먹여서 포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영적인 포만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영적 충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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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잠시 있다 마는 겁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갈보리 채플이란 교회가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이 심하는 교회인데, 수만명이 모입니다.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처음에는 히피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히피들은 거리를 헤매며 마약이나 음란 등 닥치는 대로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행락의 한계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역설적으로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절망했지만 이제 영적 갈망을 갖고 에수님께 돌아왔을 때 풍성한 은혜로 만족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서도 만족을 얻을 뿐 아니라, 장차 천국에 들어갈 때 완전하고도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수 강이 흐르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곳입니다.(계 21:6, 22:1~2) 반면에 지옥은 채움받지 못하는 갈망만 있는 고통의 장소입니다.(눅16:23~24 참조)

에 세상에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만족함을 얻고 저 천국에서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 세상에서 세상 것만 갈망한 자들은 drl서도 제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 불꽃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행복은 무엇입니까? 올바른 갈망을 가질 때 하나님이 그 영혼에 풍성한 만족을 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되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 살 동안 주님 주시는 충만한 만족을 누리시고, 이 세상 떠날 때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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