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예수님 울리시나? (눅 19:41-44)

  • 잡초 잡초
  • 371
  • 0

첨부 1



왜 예수님 울리시나? 
누가복음19:41-44

☞본문: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경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받아드리지 않아 결국 큰 낭패를 당하여,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셔서 우시고 계십니다. 왜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시냐고요?

일찍이 선민으로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받을 엄청난 심판을 면하게 하시려고 그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들이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하고 자기들의 걸림돌된 것처럼 하여 배척하므로 이제 저들이 얼마후에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아프고 쓰리고 괴롭습니다.

병아리들이 마당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놀고 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솔개한 마리가 날아와 그 병아리들을 보고 입에 침을 흘리며 공중을 빙빙 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들은 조잘거리며, 물 한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모이를 주워 먹으며 놀고 있습니다. 이때 어미닭은 위험상항을 눈치 채고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얼른 병아리들을 날개아래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가 도무지 어미닭에 품속에 들지 않습니다. 안 들어간단다! 답답하단다! 어미닭은 자꾸자꾸 그 병아리를 날개 아래로 끌어드립니다. 구구구 하면서 안타깝게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병아리는 자꾸 어미 품에서 멀리 떠납니다. 갑자기 쓔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삐약 소리와 함께 그 병아리가 날카로운 솔개의 발톱에 채여 어느새 공중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어미닭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눈에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예수님이 우신 것은 바로 유대백성들이 지금 어미닭 품을 거부하던 그 병아리가 막 솔개에 채여가기 직전에 있는 것과 같이 위험지경에서도 끝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고, 헛소리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배척하고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이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눅가복음13:34-35)하십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아무리 살리려고 애를 써도 점점 더 멀리 갑니다.

본문에서 보세요. 예수님은 곧 멸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도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왜 저들의 눈이 가리웠습니까? 바르게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은 돈 욕심에, 명예욕에 권력욕심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합니다. 참 평화이신 예수를 영접하여야 하는데 영접하기는커녕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무지하여 참 평화이신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장차 주어질 엄청남 심판을 보지 못하고 우선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과연 예루살렘성은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신지40여년 후 주후70년에 로마군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은 예루살렘성 주위에 토둔을 쌓고 보급로를 차단하였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 아이들을 잡아먹기도 하였습니다. 정복군은 산모들도, 어린아이들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성은 무너지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게 망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말을 듣지 아니하는 그들을 보실 때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까.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아직도 주님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그때 유대인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미닭의 품을 멀리하는 병아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우시고 계십니다. 왜 또 예수님 울리십니까? 감격하여 기뻐서 웃게 하여야 하는데, 왜 아직도 마음 아프게 하여 울게 하십니까?

여러분 히브리서4:14-16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세요. 은혜라는 것은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은혜는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좋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 꼭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의 비밀을 알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미식가(美食家)라고 해 봅시다. 이 사실을 알고 돈 많은 사람이 와서 ‘당신이 미식가이니 내가 매일 맛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할테니 돈 걱정일랑 말고 마음껏 먹고 싶은 것 드시오!’ 했다면 이것은 분명히 은혜입니다. 그러다가 배탈이 났습니다. 먹기만 하면 줄줄 쏟아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와서 왜 안 먹느냐고 더 좋은 고급 음식점까지 데리고 가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때를 따라 주어질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거저 준다고, 좋은 것 준다고 다 은혜가 아니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즉 때에 적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을 “맞춤형 은혜”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물론 맞춤형 은혜가 있으니 “주문형 은혜”도 있습니다.

주문형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은혜입니다.

맞춤형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내려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중에 “맞춤형 은혜”가 “주문형 은혜”보다 월등하게 좋은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문형은 내 필요에 따라 주문하는 것이기에 자칫하면 욕심과 감정이 개입되어 나의 주문대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반드시 내게 유익이 안 될 수도 있고, 달라고 할 때는 필요한 것 같았는데 막상 받고 보니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받고 보니 이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문하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고 항상 불완전하여 100%다 활용하지 못하여 허실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맞춤형은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때에 우리에 꼭 맞게 주는 것이기에, 허실이나 손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 무엇을 주십시요.” 라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필요를 아시오니 필요에 맞게, 때에 맞는 은혜를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제사장으로 혹은 중보자로 하나님 우편에 있으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 즉 하나님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피로 값 주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경을 주었습니다. 그 성경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웠습니다. 찬양대를 세웠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받도록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찬양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구역예배등 다양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내게 임하는 통로들이지요! 그 외에도 은혜받는 통로는 많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왜요? 내가 알아서 한대요! 내가 필요할 때 주문할테니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심판 날이 다되는데! 생명이 곧 끝이 나는데! 안타까워 우십니다. 여러분! 정말주님 눈에 눈물나게 하시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전 갯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며 울게 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절규하며 울렸으면 되었지! 왜 또 울리십니까? 도대체 주님과 무슨 감정이 있어서 또 울리십니까?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격과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만 울리세요. 너무 못땠습니다. 너무 완악해요. 교만해요. 심판이 두렵지 않으세요! 목사인 저도 마음 아파요.

성도 여러분 이제 예수님 그만 울리고 은혜의 품으로 들어와 제발 웃게 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