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 (겔 34:23)

  • 잡초 잡초
  • 431
  • 0

첨부 1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겔 34:23

태초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어내 놓자 크고 작은 물음과 부탁이 잇달았습니다. 그중에는 머리가 좋지 못한 당나귀도 끼어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빈번히 제 이름을 잊어먹고 찾아왔습니다. "또 깜박 잊었습니다. 저의 이름을 뭐라고 하셨지요?" 창조주는 당나귀의 두 귀를 조금 늘어지게 잡아당겼습니다. "다음에도 네 이름을 잊어버리거든 귀를 생각해라. 나는 귀가 길다, 내 이름은 당나귀다 하고 말이야." 당나귀가 돌아가자 이번에는 벌을 에워싸고 여우와 오소리와 토끼가 징징거리면서 나타났습니다. "침을 가진 벌을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조금만 뭐해도 침을 마구 쏘아대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벌의 침은 일회용이다. 침을 쏘아버리게 되면 생명도 끝나는 거야. 그러니 벌은 명심하거라. 네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될 때만 침을 쓰도록 해야 할 것이야." 여우와 오소리와 토끼는 좋아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벌은 앵하고 볼이 부어서 돌아갔습니다. 창조주가 한숨을 돌리는데 또 발소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는 양이었습니다. "아버지, 다른 짐승들이 저를 얕잡아 보고 못살게 굴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의 이 고통을 좀 덜어주십시오." "네 말도 맞다. 너를 너무 곱게만 빚었구나."창조주는 한참 있다가 은근히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이를 옥니로 하고 네 발톱을 갈퀴발톱으로 바꿔 줄까?" "아, 아닙니다. 저는 육식하는 맹수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의 풀을 뜯어먹고 사는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럼 너의 입 속에 독을 감춰둘까?" "아이고, 그건 더 싫습니다. 뱀들처럼 미움을 받고 살기는 싫어요." "그렇다면 너의 이마에 뿔을 달아주면 어떨까?" "그것도 안되겠어요. 염소는 걸핏하면 뿔로 받으려 하거든요." 창조주는 말했습니다. "참, 딱하구나. 너를 해치려 하는 자를 막자면 너 자신이 그들을 해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그래야만 하다니..."양은 한숨을 쉬면서 쓸쓸히 말했습니다. "그러하시다면 아버지, 이대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누구를 해칠 능력을 가지면 해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기 보다는 옳지 않는 일을 당하고 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양은 돌아갔습니다. 이를 본 창조주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큰 축복을 양에게 내렸습니다. "오, 착하고, 착한 양아! 너는 힘이 없어도 땅에서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이름은 어진이들의 상징이 될 것이며 어느 힘센 짐승보다도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베론 포로로부터 해방시켜 고토인 유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목자' 같은 심정에 의하여 달성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넘치는 계획의 술회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23 절)하신 하나님께서는 목자 없이 흩어진 양들을 찾아 건져 낼 것을 약속하시고, '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릴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흩어진 양떼를 한 곳에 모으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를 열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유다와 바벨론, 그리고 열방에 흩어져 있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목자'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고토에 모으고 '좋은 꿀'을 먹이고 '좋은 우리'(14절)에 눕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약속은 모든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진리의 꼴을 먹여 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되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하는 달입니다.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1. 양을 찾는 목자를 본 받아

우리는 양을 치는 목장이나 동물원 외에서는 양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먹어 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방에서는 양이 매우 중요한 동물로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양에 대한 얘기는 성경에 500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가축으로 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귀중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굵은 꼬리가 달린 양이 가장 흔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양은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그 꼬리의 무게는4.5-6.5kg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꼬리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꼬리 먹기를 즐겨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을 다 그렇게 중요한 동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양을 가지면 매우 기뻐했습니다. 양은 맛있는 요리가 되기도 하며 의복을 위해서는 털을, 아침에는 젖을 공급해 주기도 합니다. 만약 집이 필요하게 되면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튼튼한 천막을 만듭니다. 물건을 사고 싶으면 돈 대신에 양을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원하면 양 뿔로 나팔을 만들어 감미로운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양은 이렇게 유용한 동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양이 혹사당하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들도 사람과 같이 일주일에 하루는 쉽니다.

  이스라엘에 양을 사육하는 많은 목자들이 있습니다. 양이 쓸모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진 이후 양은 소유주에 의해 조심스럽게 돌보아졌습니다. 그는 종종 양과 함께 들에서 잠을 자거나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항상 살핍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늑대와 사람들이 양들을 훔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밤에 없어진 양이 있나 살펴보고, 한 마리라도 잃어버렸으면 곧 찾으러 나갑니다. 그는 나머지 양들을 울타리 속으로 집어넣을 후, 밖으로 나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하루 종일 찾으러 다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많은 양들을 놔두고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피곤하고 지쳐 있지만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온 산과 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 마음에는 집도,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먹는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양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양을 부르고 또 부릅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이리저리 헤맵니다. 혹시나 도둑에게 잡혀가지나 않았을까? 맹수에게 잡혀 먹히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며 찾아 헤맵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에 집중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은 즉 즐거워했습니다. 자기의 잃어버렸던 양을 찾자 그 양을 자기의 어깨에 메고 너무나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목자와 동료들을 잃어버리고 그 동안 어두움과 추위 무서운 맹수들의 위협에서 떨어야 했던 양은 오랜만에 목자의 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집으로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눅 15:6)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의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이 그 얼마나 깊고 큰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은 찾는 목자의심정은 단지 찾는 다는 것 보다는 구원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쉽게 길을 잃고 맹수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는 시인의 고백처럼 양은 목자가 있어야만 안전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각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고치셨는데, 그들 불쌍한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벧전 5:8), 그 양무리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아니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4 절)한다면 많은 영혼을 실족케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우상을 섬긴 죄로 그 우상이 속해 있는 열방으로 사로잡혀 흩어져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범죄에 대한 '징계' 이지 '유기' 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 기간이 차면 그들을 다시 모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배은망덕으로 타락한 본성을 표현하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찾아다니시는 긍휼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열국으로부터 찾아 모으실 것입니다.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극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나타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

  2. 인도하는 목자를 본받아

동방의 나라를 다녀온 이가 한 목자가 그의 양떼에게 냇물을 건너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합니다. 그 목자는 시냇물로 들어가서 양떼를 불렀지만 양떼는 목자를 따라 물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그 목자는 어떻게 해야했을까요? 그는 자세를 단단히 갖춘 다음 양팔에다가 어린양하나씩을 끼고 시냇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시냇물을 건넜습니다. 목자가 어린양을 치켜들자 나이 많은 한 양이 그 쪽을 바라보더니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양은 시냇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미 양들이 그 뒤를 따라 물로 뛰어들고 그리고는 양떼 전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양떼가 시냇물을 다 건너왔을 때 그 목자는 어린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때 어린양은 재빨리 어미 양에게로 다시 가서 기쁨의 상봉을 하였습니다.(목자의 뜻-예화뱅크)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13 절)인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우리는 자기가 전에 살던 그 우리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가장 좋은 우리는 자기가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이며, 보다 더 좋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집입니다(요 14:2, 3). 거기에는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거주지는 고국 유다입니다. 자기 나라 이상 살기 좋은 나라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3. 좋은 꼴로 먹이시는 목자를 본받아

양들에게는 묘한 습성이 있는데, 생리상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한 양들은 절대로 눕지 않으며... 목자라도 양을 눕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합니다. 첫째, 양들은 본래 겁이 많은 동물이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둘째, 양들은 집단 안에서 사회적 행동을 하는 동물이기에 저희 들간에 싸움이 쉬지 않으면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셋째, 만일 파리나 기생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받는 경우에도 양들은 누우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넷째,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는 한 양들은 누우려 하지 않고 일단 자신의 배가 불러야만 자리에 눕는 법이다라고 합니다.(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인터넷정보클럽)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겁니다. 왜요?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초장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어요.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을 봅니다. 

'좋은 꼴로 먹이고…살진 꼴을 먹으리라'(14 절)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 은 '율법'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은 '복음'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좋은 꼴' 은 신. 구약성경 말씀입니다.

좋은 꼴 말씀으로 먹이며 양육합시다.

흩어진 양을 찾는 목자 인도하는 목자 좋은 꼴을 먹이는 목자를 본받아 양육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