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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목(7)(마 5:9)(고후 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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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7)
< 본 문 > 마5:9, 고후5:18~2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평화를 희구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를 보면 그 어느 때에도, 그 어느 곳에도 온전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 다툼과 전쟁이 줄을 이어왔고, 지금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죠. “곳곳에 세워진 평화의 기념비는 그만큼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는 증거에 불과하다.” 역사 상 가장 크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1945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평화를 표방하며 창설된 것이 유엔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후에도 인류 역사는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국가나 민족 안에서도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개인과 개인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불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혈연 공동체 가정에서조차 평화가 없습니다. 때때로 부부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동기간에 불화와 갈등, 미움과 다툼이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마음 속으로는 모두다 평화를 원하는데 현실 속에서는 평화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은 ‘평화의 금치산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불행이요 비극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화평은 평화와 동의어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행복론 인 팔복 중 일곱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이 말씀으로 주님이 예비해 두신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화평(평화)의 의미

성경에 보면 평화라는 말이 무려 400회 정도 나옵니다. 그마만큼 성경은 평화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보통 평화를 어떤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갈등이나 다툼, 전쟁이 없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 게 평화라면 어디에 가면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공동묘지입니다. 그곳에는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이 없습니다. 고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 없겠죠.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떻게 갈등이나 불화가 없겠습니까? 그런 평화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 갈등이나 다툼이 없을지라도 금세 문제가 터집니다. 그러므로 혹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 ‘휴전’ 상태 혹은 ‘휴화산’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잠시 잠깐 갈등을 봉합하고 전쟁을 억제하려고 하는 노력만으로 평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참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평화라는 말은 신약 헬라어로 ‘에이레네’(ειρηνη), 구약 히브리어로 ‘샬롬’이란 단어인데, 이것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 보면 곳곳에서 평화를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으로 언급합니다. 삿6:24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중 ‘여호와 살롬’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평화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롬 15:33, 고후13:11 등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4:33에도 보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참 평화는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차원에서 ‘샬롬’이란 인사말을 사용했습니다. 바울 서신에도 보면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환경 조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것이므로 환경과 상관없이 물밀듯이 우리 마음에 밀려드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갈등과 문제들을 극복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있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를 가리켜 바울이 뭐라고 표현합니까? 빌4:7 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평화’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직접 체험한 바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빌립보서는 옥중 서신 아닙니까? 그는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 악조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이것은 환경적으로 잠깐 문제가 없어지고, 갈등이나 다툼이 없어지고, 편리한 환경이 조성됨으로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세상적 평화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평화가 있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 이런 평화를 전파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더 큰 행복을 맛보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초청하시는 행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으로 참 행복을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화평케 하는 자의 모습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화평케 하는 자 즉 평화를 조성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일까요?

①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 성경은 인간의 죄를 지은 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영적인 사망입니다.(롬6:23) 육신이 멀쩡히 살아 있어도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빚어진 불행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에 단절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환경도 좋았죠. 물도 많고 나무 열매도 많고 기후도 온난하고 ...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아담과 여자는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피조물(물질, 환경)의 친밀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완전한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모든 게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헬라어에 ‘코스모스’란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 안에서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는 우주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평화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이것이 깨져서 ‘카오스’ 즉 혼돈과 무질서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롬5:10 “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 ” 그것은 또한 모든 관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끼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죄로 인하여 어떤 이들이 벌어지는지 일련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단절이 이뤄집니다. 아담은 범죄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죄책감과 불안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담이 그 아내와 친밀한 관계가 깨지고 불화하게 됩니다. 서로 핑계대고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보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 형제의 갈등으로 살인 사건꺼지 벌어집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피조물의 갈등과 불화개 생깁니다.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비극과 불행을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죄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의 단절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게서 화목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피흘려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평화의 회복자이십니다. 사9:6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에수님ㅇㄹ 가리켜 ‘평가으이 왕’이라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는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 이후 부활하서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평강을 축원하셨습니다.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마음에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과 갈등이 사라집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이런 평화를 위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다른 사람들과 화목한 사람 :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되는 근본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관계에서도 죄 때문에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겁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욕심, 이기심, 시기심, 교만, ... 등입니다.(약4:1 참조) 성경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하고도 화목해지라고 명령합니다.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그것이 우리가 행복해 지는 길이요, 다 같이 잘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해도 불행하지만, 사람들과 불화해도 불행합니다. 인간은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잘 돼야지 나만 잘 되고 다른 사람은 잘못 되는 것은 일시적인 평화요 사이비 행복일 뿐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견제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둘 다 같이 살아야 정말 잘 사는 겁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서로 미워합니다. 어느날 말다툼을 하다 기어이 충돌합니다. 치고 받고 싸우다가 센 물고기가 약한 물고기를 물어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물고기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연못에는 죽은 물고기가 썩어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고, 남은 물고기는 병이 듭니다. 마침내 그것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풍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자기 욕심만 주장하면 갈등과 다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 다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우화도 있습니다. 사자와 소가 만났는데 서로 마음에 들어 함께 살게 됐습니다. 허니문 기간에 그들은 서로에게 잘 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자는 살코기를 잔뜩 갖다가 소에게 줍니다. 맛있으니까 먹으라고 ... 소는 싫어도 먹는 시늉을 했습니다. 소는 풀을 가져다가 사자에게 줍니다. 맛있느니까 먹어 보라고 ... 사자는 싫었지만 먹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흘렀고 둘은 다투기 시작합니다.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다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입장은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았던 게 불행의 원인입니다.

요즘 시국을 보면 정말 염려가 됩니다. 탄핵 정국으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민심이 갈라져서 서로를 헐뜯고 싸운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결정날지 몰라도 걱정입니다. 어느 쪽이든 서로 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사실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지 않습니다. 양쪽 다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의견을 경청함으로 합의점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됩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화해의 조정자(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공의가 무엇인지 잘 헤아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중심을 잡고 서서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빌2:5)을 품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가 드린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③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사람 : 우리가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들도 각각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과 영생이요,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책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고후5:18~20 “ ...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릅니다. 귀찮으니까, 오히려 혼란스러우니까 그냥 내버려두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그냥 있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혹시 그게 속편하게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장 평화’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 무슨 말씀입니까? 부딪히기 싫다고, 박해받기 싫다고 침묵하면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럴 때는 복음을 전함으로 부딪히는 게 우선순위입니다. 그것이 당장은 불화 같지만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거룩한 충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평화의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그들 자신이 평화를 누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이 더욱더 평화로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3] 화평케 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

마5:9 “ ...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인정되고 칭찬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녀’(테크나)라는 말을 쓰지 않고 특별히 ‘아들’(휘오스)이란 말을 썼습니다.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들이란 말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존엄과 영예를 포함합니다.

① 절대 보호 :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소중한 아들이요 상속자가 되었기에 절대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시17:8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 ” 눈동자는 아주 예민한 부분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눈동자를 향해 무언가 날아오면 얼른 눈을 감아버립니다. 보호 조치인 셈입니다. 영어로 눈동자가 apple(사과)입니다. 빨갛게 반짝거리는 사과처럼 소중한 눈동자! 눈동자처럼 소중한 아들과 딸!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을 그들을 절대 보호해 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② 평화의 나라 상속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맛보지만 그래도 세상에서는 갈등과 어려움이 계속 닥쳐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헤쳐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노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완전한 절대 평화를 갈망합니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얼마나 평화로운 정경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와 꼭 같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천국에는 절대 평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나라를 우리가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평화를 누리고 영생하게 됩니다. 천국의 절대 평화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행복의 길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 이 말씀을 마음에 꼭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얻으시고,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함으로 정말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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