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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義)는 올바른 방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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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아모스 3장 1 - 15절
제 목 : 의(義)는 올바른 방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예언이 선포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우리가 누구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들 아닙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우쳐 줍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라고 깨우쳐 줍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2절>

남의 자식 같으면 매를 들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니까 무관심하게 놔 두지 않고 매를 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매를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세상적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으로, 누르심으로 간섭하십니다.

지난 번에 보았던 히브리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저희가 보았었습니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설마, 하나님이..."하며 지금 안정과 풍요를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평안과 위로의 맛사지에만 귀가 익숙한 백성들에게는 아모스 선지자의 멧세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모스가 자신의 선포하는 메시지가 공갈이 아님을 깨우칩니다.  <3-8절>까지 원인과 결과의 논리를 반복해서 선포하심으로 깨우치십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자가 잡아먹을 것이 없는데도 숲 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사자가 움켜잡은 것이 없는데도 굴 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창애에 내려와 걸리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창애가 퉁겨 오르겠느냐?

성 안에서 비상 나팔이 울리는데 놀라지 않을 자 있겠느냐?

성 안을 휩쓰는 재앙, 야훼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으시고는

주 야훼,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내가 괜히 억한 심정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예언하는 것이니 흘려 보내지 말고 잘 들어야 한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심판이 어떤 모습일지를 예고합니다. <9,10절>이 심판을 자초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씀이고 그리고 <11-15절>은 심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예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희가 제일 주목하고 싶은 구절이 <9,10절>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심판을 자초한 죄악의 실상을 밝혀 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잘못,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죄악이 무엇입니까?

<9,10절> 다시 읽어 봅시다. "아스돗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스돗 사람들, 애굽 사람들이 보니까 사마리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요는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행 행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AP통신, 로이터 통신, CNN, NHK, 인터넷을 통해서 전세계에 중계된 대한민국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을 보니까, "야 한국 민주화가 다 된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나, 한국의 국회의원들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는구나" 이렇게 확인하는 것이지요.

바른 일이 특별나게 따로 있는데 그것을 안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바르게 행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할 줄 모르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9,10절>의 네 단어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요란함"과 "학대함"과 "포학"과 "겁탈".

"요란함(great terror)"은 전쟁 상황과 같은 패닉 상태,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요란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학대(oppression)"는 상대적으로 힘이 강한 자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자를 누르는 것,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같은 류를 말합니다. "포학(violence)"은 말과 행동으로 치루어지는 폭력을 말합니다. "겁탈(robbery)"은 약탈행위, 거짓으로 탈취하는 날강도짓, 날치기를 말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어느 장면이 생각나십니까? 지난 금요일의 국회 본회의장이 생각나지요? 백성들이 국회를 보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바른 법을 세워야 하는 사람들이 바른 일을 행할 줄 모르고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것, 쪽수가 많고 힘쎈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을 들어 옮기도 누르는 것, 고성의 언어와 폭력, 날치기...훤하게 다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 아주 딱 걸린 예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당신의 백성들에게 정의가 실현되고 세워지기를 기대하셨는데, 사마리아 나라 안을 보니 바르게 진행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 살기를 원합니다. 가치있게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그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느냐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상에 악을 위해 악을 행하는 자는 없다. 다만 악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 명예, 쾌락을 얻으려는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악의 목적을 표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의 목적을 표방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름에 거하는 궁, 겨울에 거하는 궁 따로 있듯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고 나름대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서 잘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른 모습이 아님을 깨우쳐 주십니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빈부격차가 현저히 있는 것, 약자는 더욱 소외되는 것, 거짓된 방법에 의하여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안정을 이룬 것은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무엇이 정의입니까? 무엇이 의로움입니까? 바른 방법을 행할 줄 아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방법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더디 달성이 되도, 아니 목적이 달성되지 않더라도 바른 방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바른 방법입니까? "요란함"과 "학대함"과 "포학"과 "겁탈"과 정반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란함(terror)의 반대는 적막함이 아니라 질서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학대(oppression)의 반대는 반항이 아니라,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포학(violence)의 반대는 무기력이 아니라 인자함입니다. 겁탈(robbery)의 반대는 fair play, 인격적인 존중의 관계를 말합니다.

내 개인생활에서도,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교회 가족들,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질서의 아름다움이,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인자함으로 대하는 감동이, 인격적인 존중을 나누는 사랑이 있게 하십시오. 그것이 정의입니다.

우리 사회 중에 왜 정치판이 제일 개판(?)입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에 대한 야망,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성취, 자기 뜻의 달성에 목매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모든 것을 힘의 논리로 풀고 맙니다. 힘의 논리로 풀어가는 물에서는 약자를 배려하고 인자함으로 대해 주고 기다려주고 양보하고 이게 찾아보기가 참 힘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인생에 어떤 목적, 비전을 갖고 있습니까? 이 비전이 달성이 안되면 "꽝"인 것이라면 인생 목적을 다시 찾으셔야 합니다. 예컨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고아원도 세우고 선교사님들에게 헌금 많이 하고 그것이 비전이라면,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하는 비전이라면 비전 설정을 잘못하셨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 이것도 만약 안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이 길을 가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가치가 있는 인생의 비전을 세우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무엇을(what) 성취, 달성해서 의미를 찾는 것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how) 인생길을 갈 것인가, 삶의 철학,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자의 도에 비로소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위 비전, 너희는 이런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만큼의 목표 달성을 이루어야 한다고는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큰 그림을 그려 주시고, 그 큰 그림에의 소망을 안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인생 방법론, 제자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큰 그림,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안고 살아간 제자들, 어떤 제자는 90세 가까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역을 하기도 하였지만 반면 사역의 장을 크게 펼쳐 보지 못하고 일찍 순교를 당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올바른 인생을 산, 가치있는 인생을 산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왜 오늘날의 교회, 그리스도인이 부패하였습니까? 교회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방법인 제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철학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적과 성취를 위한 종교적 수단으로 교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가 미신집단이 된 것입니다.

교회 부흥이라는 이름하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기 하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화려함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요약하여 우리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제일 큰 계명과 지상명령, 그 안에 성취,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흔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셨듯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방법, 제자도를 배우고 실천하는 데 목숨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비전을 강조할 때 인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29:18> "묵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이 말씀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야망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잠언, 시편과 같이 히브리 문학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문학양식이 대조 반복입니다. 예컨대,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니라"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앞 절과 뒤 절이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원에 가면 새벽예배 때 시편, 잠언 읽으면서 중간에 한번 쉬지요? 그러면 박자가 딱 맞습니다.

그러면 <잠29:18> 후반부에는 어떤 말씀이 나왔는지 혹시 아십니까? "묵시(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가 있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같은 뜻입니다. 묵시가 있다, 성경적 비전이 있다는 것은 나는 인생의 달성할 목표가 있다, 꿈이 있다, 야망(野望)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 이렇게 살아라는 인생의 방법론, 철학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올바른 방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올바른 인생은, 그 인생의 소망이 무엇이든지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철학이 반듯하게 세워지고 지켜지는 것입니다.

내 야망을 부추기는 성취 목적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큰 그림, 예수님의 마음 안에 그려져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들 마음 안에 그려져 있었던 큰 그림,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인생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배우고 세우십시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하여 자조적이지만,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제일 빠른 시일내에 정착시킨 나라로 꼽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보편적 이유가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모두가 다 자기 임기 동안 끝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어거지로 임기를 늘리려 하든지, 아니면 무리수를 두어서 겉의 모양새는 갖추었는데, 오래도록 후유증을 앓든지.. 대표적인 예가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입니다. IMF 때의 기업의 부채를 금방 해소하고 그러면서도 은행의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가계대출과 신용카드를 남발한 것이 결국은 기업의 부채가 가계의 부채로 전이되어 나라 빚은 여전히 암초로 남아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수출이 잘 되어서 경상수지 흑자를 경험하지만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이고 그래서 극소수의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다수의 백성은 빈자가 되어 중산층이 엷어지고 있는, 경제정의와는 반대의 양상을 보입니다.

경제정책,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옛 성현들이 그렇게 깨우쳐 주었건만, 언제 퇴임될 지도 모르는 장관이 자기 재임동안 금새 교육개혁을 다 이루어 보겠다고 하니.. 결국 공교육의 불신을 낳고 세계 제 1위의 사교육비 나라가 되게 하고 이것이 가계부채의 주원인이 되었습니다.

소위 군사 문화, 무슨 일이 있어도 고지는 점령해야 한다는 전쟁판 가치관에 휘둘리기 때문에, 목표는 달성하지만 인간성이 메마르고 황폐해지고 순박한 인정미는 사라지고...그러니 이혼율 세계제일로 대표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하나님의 정의, 올바른 방법을 무시하고 성취, 목표달성에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꿈이 있습니까? 내가 끝을 보지 않아도, 중간에 바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지라도, 달려가는 길 자체에 가치가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삶에 헌신하십시오.

예) 3월달 학기초가 되면, 초등학교 학생조사서가 학부모에게 전달됩니다. 가족사항을 기록하고 집 약도를 기록하고 그 가운데 부모가 바라는 장래 희망, 본인이 바라는 장래 희망 난이 있습니다.

제가 제 딸들, 장래 희망에 이렇게 씁니다. 하은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름답게 전하는 사람. 하영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 이름을 지으면서 마음에 그려 보았던 소망이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그 기도에 은혜를 주시지 않나 소망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은이는 좀 비실비실해도 쉽게, 쉽게 무난하게 잘 큽니다. 하영이는 한 영광 할 조짐이 좀 보이는 것 같구... 죄송합니다. 애들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작년 3월에는 하은이 선생님이 학생조사서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 희망, 그런 것 말고 다시 써 오랩니다.

초등학생 때, 많은 어린이들이 실현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한, 극도의 경쟁을 이겨야만 가능한 목표달성과 성취의 꿈을 주입받습니다. 대통령, 판사, 프로야구선수, 국가대표축구선수, 탤렌트...  그리고 교회 다니는 엄마들, 그래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그랬어 하며 유치원 때부터 과외를 시킵니다.

그러다 이 어린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가 되면, 더 이상 그 꿈을 갖지 않습니다. 그게 현실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정작 시야를 넓히고 직업적 소명을 생각해야 할, 청소년 때는 전혀 생각도 안합니다. 예전의 망상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소박한 꿈은 꿈도 못됩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의 꿈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다 중년이 되면, 어렸을 때의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고.. 평범하게 살면 패배의식을 갖아 버립니다. 그래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결론내리고 서른 이후는 패배의식의 그림자 가운데 삽니다.

어린이들의 부모님, 어린이들에게 목표달성의 망상을 주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에게 처음에는 이해를 못해도 아름다운 삶의 가치관을 그려주십시오. 하담이, "너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야.."

성인이 된 우리들, 서른 잔치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가치의 인생, 새로운 꿈을 꾸고 소망을 품는 것은 일흔이 되어도 늦지 않았습니다.

목표달성의 야망이 아니라, 이러한 삶의 모습, 이 길을 걷다가 어디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예수님이 부르시면 평안히 가고.. 그 날까지는 아름다운 가치의 삶을 노래하며 즐거워하며 인내로 걸어가십시오.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인생의 방법론, 가치관을 바로 세움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입니다. 그 삶이 진정한 행복의 삶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 우리의 나라의 모습.. 목적에만 급급하였지, 방법, 철학,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가 안중에도 없어서 이런 혼란스러운 진통을 겪습니다.

뒷거래를 해서라도 국회의원 자리 지켜야 하고, 뇌물과 이상한 대접을 해서라도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고, 광란을 떨고 장사식으로 해서라도 교회를 성장시켜야 하고, 선행학습을 시키고 고액과외를 시켜서라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하고 딴지를 걸어서라도 저 사람보다 내가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당이고 회사고 교회고 학교고 다들 테러당한 것처럼 뒤죽박죽, 엉망진창이고 약자는 짓밟히고 폭력과 거짓이 횡횡하는 것입니다.

작금의 나라의 사태를 보며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탄핵 때문이 아닙니다.

상당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다고 사회 각 영역에 요란함과 학대와 포학과 겁탈이 난무하고 있는 모습을 우려합니다.

겉으로는 유사 이래 최대의 경제적 안락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보이고 있으나 바르게 행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듯이, 이 나라에도 하나님의 심판의 팔이 들어지는 모습을 우려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더 한숨쉬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되었을 때, 제일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모습이 종교와 경제의 급속한 몰락입니다<14,15절>.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보십시오.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는 나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그렇게 급속도로 변할 수 있는가 의아할 정도로 종교와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황폐해 졌습니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고려말의 승려들에게 책임이 돌려졌습니다. 조선이 무너졌을 때, 유생들에게 책임이 돌려졌습니다.

당신은 이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심령의 평안만, 내 가족의 행복만 우리 교회의 성장만 매달려 기도하시겠습니까? 좀 내 삶이 덜 풀리는 것같아도, 우리 교회가 좀 더디 성장을 하여도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한 책임의식, 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책임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식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 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 아닙니까?

나라와 민족이 진통을 겪고 있는 데도, 사회가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도 내 먹고 사는 것, 내 마음이 편안한 것, 우리끼리 희희낙락하는 것만 찾고 있는 것을 공의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대학가에 선교단체들이 다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이 가중되는 영적인 혼란함 앞에서 내 먹고 살 것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돈 버는 것, 내 마음 편안한 것, 내 가족 잘 되는 것 이것만 생각하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제 밥그릇 챙기기만 하는 국회의원과 똑같은 인간들이지 않습니까?

교회는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는 세상에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올해 초에 저희가 장 지오니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 단편영화를 보았습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한 남자 그는 조급하지 않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팔기 보다는, 말없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꾸준하게 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을 사는 올바른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올바른 인생에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해에 당신이 소망으로 품었던 나무를 기억하십니까?

차중근 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올해, 2004년 초에 영국의 세계적 경제지인 파이낸셜 타임즈가 컨설팅업체 프라이스 워터하웃스 쿠퍼스(PwC)와 함께 20개국 기업가 903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받는 기업&기업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기업, 기업가는 단 두 곳, 두 사람이 선정되었습니다. 삼성전자와 유한양행입니다. 특히 유한양행은 우리 나라 기업 중에서는 유일하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 부문'에서 42위로 평가되었습니다.

차중근 씨는 유한양행의 현 사장으로서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43위로 평가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유한양행은 우리 나라 안에서 기업 매출 규모로 볼 때에 그렇게 손꼽히는 큰 기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0위 안에도 못드는 기업입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존경받는 좋은 회사로 평가받는 것은 창업자 유일한 박사에 이어 회사의 직원들이 더디 성장하여도 '올바른 방법'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창업이념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우수 약품 생산을 통하여 국민 보건 향상, 성실한 납세를 통한 국민 경제발전에 기여,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을 통한 사회 복지 증진" 이 창업이념에는 소위 성취와 경쟁에서 이기는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회사를 경영하는 철학, 방법론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름다운 가치의 철학, 방법론, 인생관이 바로 설 때에 아름다운 인생, 보람있는 인생, 진정 성공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내가 뭔가 되고자 발버둥하는 야망을 내려 놓고, 우리의 마음과 인생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인생의 철학, 인생의 올바른 방법론을 배워 반듯하게, 아름답게 세워갑시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비검처럼 마음에 품으며 바람처럼 몰아가는 세상의 광풍 가운데, 의연하게 서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정신.. 정성되이 하나씩 하나씩 배워서 세워갑시다.

나와 내 가족이 경제적 안정이 조금 더디 되어도, 내 자녀들이 1등을 하지 않아도 올바른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이 조금 더디더라도 성경의 원리에 정직하게 적용하는, 올바른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추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마침내 황무지를 아름다운 동산으로 만들게 하시는,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나무가 가득한 세상,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은혜의 영광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야망을 버리고, 큰 그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으며 우리의 인생에 올바른 방법, 제자의 도를 배우고 세워가기를 힘써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정의의 인생, 올바른 인생 배우고 드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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