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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씻고 보니 (요 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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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을 씻고 보니
본문 : 요한복음 9:1-41


나이 들면 몸은 점점 쇠하여집니다. 머리털이 흰색으로 변합니다. 피부는 윤기가 떨어지고 주름이 집니다. 기억력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노쇠하면 다섯 가지가 망가지는데 제일 먼저 망가지는 일망은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벌써 눈에 이상이 왔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 전보다 보이는 것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이망은 귀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삼망은 치아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사망은 문자 그대로 사망입니다. 죽을 고비를 잘 넘기면 오망이 옵니다. 오망은 노망입니다. 여기까지 가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노망들지 않는 건강한 노년을 보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장애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는 은혜를 받은 후 예수님을 다시 만나 그 앞에 엎드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체험을 또 다시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눈을 뜨고 사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삼중고에 시달린 헬렌 켈러가 한 말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보다 큰 고통은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만일 3 일만 볼 수 있다면」이란 수필을 남겼습니다. 이 수필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20 세기의 가장 위대한 에세이라고 평했습니다.

(Three days to see) 내가 만일 3 일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누구보다 먼저 나에게 이 세상을 보게 해 준 나의 스승 설리번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 아기의 순결한 얼굴도 보고 싶다. 오후가 되면 숲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 저녁이 되면 불타는 저녁노을을 기도하며 지켜보고 싶다.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다. 나는 이날 인류 역사의 과거 현재가 숨 쉬는 뉴욕 자연 박물관을 꼭 방문할 것이다. 그곳에서 선사시대의 공룡들과 인류의 찬란한 유적을 보고, 다음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할 것이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아름다운 그림, 조각품들, 나의 손의 촉감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없었던 그 신비한 색깔의 하모니를 감상하고 싶다. 저녁이 되면 극장에도 가서 영화도 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거리의 풍경, 강이 흐르는 모습, 보트가 떠내려가는 모습, 높이 솟은 엠파이어 빌딩 모습도 보고 싶다. 5 번가에서 시작하여 슬럼가도 보고 싶다. 그리고 외국 문물이 숨 쉬는 곳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싶다. 마지막으로 밤이 깊어 나의 마지막 문을 닫을 때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을 삼중고 때문에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지식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세상에 언어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뭘 가르치면 들어가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듣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이 막힌 그녀의 머릿속에 지식을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헬렌 켈러에게 아직 촉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펌프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펌프 꼭지에 손을 갖다 대고는 차가운 물을 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바닥에 물(Water)을 써주었습니다. 물의 촉감과 함께 그녀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헬렌 켈러는 그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 물의 촉감을 느끼는 순간 마음속에 한 창이 열리면서 희망의 빛의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는 그 때부터 만져지는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무서운 속도로 학습이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는 순간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옆에서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빛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빛을 모르니까 당연히 어두움도 모릅니다.

그는 걸인이었습니다. 구걸하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님께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절망적인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에 띈 것입니다. 1 절입니다. “예수께서 갈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우리가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은혜는 주님께 발견된 은혜입니다. 전능하신 주님 눈에 발견되면 그 사람은 운명이 바뀝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택해주신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택함을 받을 어떤 능력이나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걷으면서 부정을 하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냉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를 제자 삼는 일은 앞으로의 사역에 커다란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태가 세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를 발견하신 주님은 즉시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마태는 그 부르심을 받고 즉시 응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발견되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도 세리였습니다. 삭개오는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을 뵙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삭개오를 택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소경을 택하셔서 고치십니다. 그런데 고치는 장면이 특이합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실 때는 훨씬 간단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말씀만 하셨는데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소경은 절차가 복잡합니다.

흙을 사용하셨고, 침을 섞으셨습니다. 또 실로암 연못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흙과 침과 물중에서 어떤 것이 효력을 나타내는 성분이 있을까요? 세 가지가 섞일 때 효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원 재료가 흙입니다. 하나님은 흙을 빚어 사람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 때 생령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고장 난 곳이 눈입니다. 예수님이 흙을 빚으셔서 눈에 바른 것은 마치 망가진 작품을 다시 수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미술가가 진흙을 빚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한 부분이 망가졌다면 어떻게 합니까? 진흙 조각을 덧입혀서 수리해야 합니다. 흙을 빚으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당장 물이 없으니까 침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구두를 닦을 때 구두약에 물을 약간 묻혀서 문지르면 광이 납니다. 구두는 대부분 길에서 닦습니다. 물을 구하기 어려우니까 급한 대로 침을 뱉어서 문지릅니다.

예수님이 흙에 침을 섞어서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실로암은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실로암 못의 생수를 떠서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7 절에 실로암의 뜻을 풀어 놓은 것은 실로암에 보낸 것이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생수로 그 눈을 씻게 하셨습니다. 생수로 눈을 씻었더니 눈이 떠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눈을 뜨고도 소경처럼 사는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습니다.

본문 마지막 40-41 절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던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실로암은 생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 생수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생수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었더니 눈이 떠졌습니다. 그에게 찬란한 광명의 세상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모두 신비로운 것들뿐입니다.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되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상상만 하던 세상을 직접 보면서 확인할 것들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아줌마가 눈꺼풀 수술을 했습니다. 눈 아래 처진 심술보도 빼고, 눈꺼풀 지방도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수술하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눈에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수술자국도 남아서 오히려 수술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혹시는 하는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눈도 시야기 되나요?” 시야기는 마무리, 끝손질을 뜻하는 일본말이죠.

실로암의 생수는 진흙 치유의 ‘시야기’였습니다. 생수로 눈을 말끔히 씻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눈이 밝아지는 순간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한 놀라운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놀라움을 만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놀라운 치유가 동네에 커다란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공회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부모까지 잡혀가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출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사형 다음가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 출교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입니다.

사실 출교까지 받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회 심문 과정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공회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회원들을 향해서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변호했습니다.

그의 당돌한 태도로 인해 괘씸죄가 적용되었습니다. 공회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를 출교시키고 맙니다.

본문 34 절입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이 사람은 심문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11 절에 “예수라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 차 심문을 받으면서 17 절에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 심문에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당시 공회 분위기로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22 절을 보면 당시에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를 하기로 결의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고백이 문제가 되어 출교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했지만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네가 보고 있고, 너와 말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라고 밝히셨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이 사람의 고백은 이제 주님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에서,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에서 이제는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 한 고백으로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육적인 눈을 떴는데 이 고백으로 그는 영안까지 열게 되었습니다. 신비로운 세상을 보았지만, 그 후 그가 만난 세상은 너무 차별이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사실 보고 싶지 않은 세상이었습니다. 공회가 그를 출교 시킬 때 상처가 되는 판결을 남겼습니다. 34 절을 보면 공회는 이 사람을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고 저주했습니다. 장애도 서러운데 그것으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눈을 떴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의 편견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영안을 뜨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눈을 뜨지 않은 것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의 형편은 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인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안을 뜨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길 충분한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눈에는 누가 진짜 죄인인지 보입니다.

예수님이 41 절에서 분명히 그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는 예수님을 두 번 만났습니다.

첫 번째 만남으로 평생 보지 못했던 눈을 고쳤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서 살다가 만난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는 본다고 하는 경이로움을 체험했습니다. 실로암 생수로 눈을 씻었는데, 그것은 그가 앞으로 보게 될 새로운 영적 세계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으로 그는 주님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엎드려 절하며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세상의 눈뜬 소경들을 위해 보냄을 받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눈을 뜨고도 경이로운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 찬양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소경이 낫습니다. 내가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가슴 벅차게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빛을 아는 것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 눈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눈은 늙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전해줍니다. 아직 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 창조의 세계를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아주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한다 해도 영안까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로암 생수로 눈을 씻으면 우리는 영안을 열 수 있습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보내십니다. 사명을 주시면서 파송시키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바로 보고 계십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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