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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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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한 가지 (눅 12:13-21) 
최 종 천 목사
 
바다와 같은 큰 강을 거슬러 달리던 여객선 하나가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인하여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배에는 금광에서 금을 캐어 가지고 돌아오는 광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배가 파선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구명조끼가 동원되고 사람들은 대피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명조끼가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전원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사람 살리라는 아비규환의 소리로 온통 얼룩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갑판에 나왔습니다. 구명조끼조차 착용하지 못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이제까지 그가 그렇게 귀하게 여겼던 물건들, 심지어는 금덩어리까지도 다 버려두고 맨 몸으로 헤엄을 쳐서 강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한 사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배에 탄 승객들이 버리고 간 모든 금덩어리를 모조리 모아들고, 그것을 전대로 만들어 허리에 차고는 갑판 위로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배는 모든 사람들이 다 탈출하고 배는 무너져 가는 이와 같은 시점에 그는 그 배에 남은 마지막 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멀리서 구조에 동원된 보트를 탄 사람들이 어서 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마지막 남아 있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밧줄을 던졌습니다. 그는 다행히 그 밧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위한 보트를 향하여 가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이 사람은 구조 보트에 도착하기 전에 자꾸 가라앉아서 결국은 구조 보트에 탄 사람들도 그를 구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발굴된 시체를 보니 그의 허리에는 금덩어리 전대가 가득 달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거워서 헤엄을 칠 수도 없고 그 줄을 당겨 구명보트에도 다가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마침내 그 욕심의 포로가 됩니다. 욕심에 정복된 상태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항로를 믿음이라는 배를 타고 항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순간의 세상의 황금 덩어리는 때로는 우리들의 안전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오직 구원의 생명 줄을 붙잡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심지어는 내가 살아 호흡하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가 유산을 남겨 주었는데 그 형이 유산을 다 가지고 동생에게 하나도 주지 않은, 그래서 안타깝고 섭섭하게 여기는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부탁합니다. ‘예수님, 우리 형한테 말해서 그 재산을 나에게 좀 나누어 주게 해 주십시오.’
그 때 예수님은 ‘참 안됐다.’하며 그를 위로하고 그의 원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꾸짖는 투로 ‘이 사람아,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아느냐?’ 라고 힐난하십니다. 그리고 거기다 덧붙여 아픈 소리를 또 한 가지 하십니다. ‘삼가 탐심을 버리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사람으로서는 너무 당황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을 활용해서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받기를 원했는데 오히려 탐심을 버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예수님 역시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진정 인생의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밭의 소출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너무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소출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소출을 얻기 위하여 또 나를 위해 같이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함께 나누고 함께 누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과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 다 내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할까? 그런데 나는 창고가 너무 좁아. 저걸 어디다 들이지?’ 그것 때문에 고민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지혜를 짜낸 것이 ‘창고를 헐어 버리고 더 크게 짓자. 거기다 보관하면 여러 해 쓸 물건이 있으니 나는 일도 안 해도 되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고 누리자.’라고 고민 끝에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너의 영혼을 내가 가져가면 그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부유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재물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고 쌓아두는 모든 것, 그것을 우리가 나만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축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어진 기회와 힘과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부유한 자 되는 믿음의 백성,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백성이 될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따라 몇 가지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다함이 없는 욕망에 따라 움직여 가는 우리 인생의 삶입니다.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은 가진 것이 없어도 괴롭지만 너무 풍족해도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고 새로운 욕망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너무 많아서 고민 고민하게 되고 어리석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말입니다.
없을 때는 없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요. 자신의 불성실함과 무능의 원인에 대해서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다만 공평치 못한 여건, 핑계할 만한 사람, 피치 못할 환경 탓을 하고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늘 불평과 불만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없다는 것의 기준도 자신의 최악의 지경을 기준해서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최고의 상태였던 때를 추억하여서 그 때에 기준하니 늘 ‘내가 그 때에 비교하면 너무 없어.’ 하고 괴로워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것이 생기면 그 많은 것 때문에 또 마음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있으면 그것을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집에 잃어버릴 것 없으면 도둑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잃어버릴 것이 있으니 문단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의 구조가 아닙니까? 무엇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때로는 편안함만이 아니라 불편함도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졌을 때도 결국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나이 들면 늙게 되고 또 생명의 연수가 다하면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내가 가지고 누리려고 했던 모든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마음을 미리 정돈하지 못하면 인생은 늘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서 언제나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다함이 없기에 이제 이만큼이면 됐다 싶은 정도는 없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욕심이 생기고 만족할 줄 알았는데 새로운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 말입니다.
새로운 비교 속에 열등감과 우월감이 생기면 삶의 바른 길을 가기 어렵습니다.
인생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비교 의식이에요. 이것이 긍정적일 때는 참 감사하고 또 마음의 분발을 이루어 자신을 진보시키고 정진시킬 수 있는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그런데 이 비교의식이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면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여건을 탓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에 비교해서 우월감이 생기면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 이 말입니다. 이 때 이미 우리의 마음은 저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거예요. 무엇인가 조금 가져서 남을 업신여기고 무엇인가 가지지 못해서 괜히 낙심하고 이미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고 이미 우리 마음에 고통과 불만과 쌓여지게 된다 이 말입니다.

많은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줘야지 되지만 많은 경우 그 물질의 풍요가 오히려 인생을 쾌락의 길로 빠지게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많은 소출을 보고 ‘어떻게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할까?’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귀한 은혜를 주셨구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답게 이것을 사용해 드릴까?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인데.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여러 사람이 같이 수고했으니 어떻게 같이 나누고 은혜를 나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창고 작다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이 말입니다. 요즘 말로 따지자면 무엇인가 생겨서 유익한 인생의 삶을 가꾸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생겨서 쾌락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림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오히려 퇴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렇게 우리 인생에 주어진 풍요는 그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할 때, 인생을 더욱 더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인생의 꿈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힘써 일하고 소출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익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128편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오죠?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려 먹는 것이 축복이고 은혜예요.
그런데 ‘일하지 않고 먹겠다. 나는 많은 것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편안하게 지내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상의 축복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이 원하심을 이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고 베풀며 우리의 삶을 통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백성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많은 것 가졌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죠? 여러분, 사람들 사이 유명해지고 말이에요. 또 사람들이 박수쳐 주고 어디를 가든지 우리 아는 척 하고 그렇다고 행복할까요? 때때로는 무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때로는 그저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가 며칠 전에 산에 갔거든요. 제가 산에 가서 그 날 작심을 하고 ‘오늘 산에 가서 많이 좀 있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앞에 있는 산에 가서 끝까지 갔다 오려고 했어요. 가니까 우리 성도님들 많이 만나더라고요. 집사님도 만나고 장로님도 만나고 또 권사님도 만나고 저희 교인들이 상당히 많이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사도 하고 가려는데요. 한 두 시간쯤 갔는데 어떤 분이 저를 봐요. 유심히 봐요. 저는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가는데 쫓아오시더라고요. 저를 보시더니 한참 봐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분, 맞죠?’ 뭔가 얼굴이 익었단 말이에요. ‘아, 낯이 익은데, 어떤 방송에 나오죠?’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내일도 나올 거죠?’ 이 분이 뭔가 착각을 한거죠. 제가 보기엔 저를 어디서 봤겠습니까? 교회에서 봤겠죠. 그런데 아마 얼굴을 확실하게 익히지 못하고 제가 또 모자를 썼으니까 더 그러시겠죠. 아,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혹시 분당에 사세요?’‘예. 분당에 삽니다.’ 그러고 저는 갔어요. 오늘 오셨는지 모르겠어요. ‘저 아시겠지요? 이젠.’

여러분, 유명해진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어디 사진 안 내는 이유가 있어요. 그저 자유롭게, 편하게 사는 것이 참 좋은 겁니다.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에요. 정말 우리 마음에 참된 기쁨이 있고 평안함과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감격해서 사는 삶이 있을 때 우리들에게는 진정한 기쁨이라 이 말입니다.
오늘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 많은 소출이 그에게 왜 주어졌는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는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사용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주어진 물질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았어요. 헛된 죄악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39:6을 보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같이 허상이에요. 헛된 일에 분요하고 재물을 쌓지만 누가 그것을 취할는지 알지 못해요.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유한함입니다.
아침 안개와 같은 유한한 인생이에요. 야고보 4:14을 보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개와 같은 우리 인생이에요.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잠깐 나타났다가 햇빛 나면 스르르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삶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해요. 여러분, 내일, 내년 이 맘 때, 내가 3년 후 이 맘 때, 어떤 모습으로 있으리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전에는 정말 어떤 일들이 먼 이야기로 들렸어요. 어떤 분이 갑자기 몸이 아팠다. 그리고 어떤 큰 일이 있었다. 먼 이야기예요. ‘누가 그랬대.’ ‘정말 안타까워, 누가 그랬대.’ 그런데 이젠 그런 이야기들이 먼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내 식구들의 이야기며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이런 시대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저는 의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목사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좀 시간이 됐는데 우리나라 국립 암 센터 소장하시는 분이 나오셔서 강의 같은 것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사람이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그래서 제가 귀담아 들었어요. 그랬더니 50%라고 그래요. 저도 그렇게 높은가 생각했는데 뭐라고 설명 하냐면 즉, 두 사람에 한 사람은 암에 걸릴 확률이 있대요. 그러면서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은 암에 걸리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얼마나 확률이 높은 거예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니까요.

정말 우리는 누구도 앞일을 내다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요지는 이거더라고요. ‘누구든지 암에 걸릴 확률이 있으니 혹시라도 그런 것에 걸렸을 때 너무 큰일이라고 마음에 충격 받지 말고 그냥 찾아올 손님이 오셨구나 생각하고 손님처럼 맞아들이고 잘 관리하며 우리의 삶을 살아가자.’ 이런 이야기를 하시려고 용기를 주시려고 하는 이야기더라고요.
그래요,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해요. 오늘까지 건강했는데 갑자기 병원에 가서 검진 받고 갑자기 인생이 회색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다시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의 용기를 가지고 다시 소망을 찾을 때도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해요.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극적으로 체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도 알지 못하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한다 이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제한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편 39:5을 보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요만한 손바닥 만하게 인생을 보신다 이 말입니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든든히 섰다고 하지만 그것도 다 허사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원해도 하루라도 우리 인생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에 비교하면 우리가 칠십, 팔십, 구십을 산다한들 그것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제한된 삶이고 우리의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마음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처방법은 뭐죠? 시편 39:7에 나온 대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일을 모르고 사는 제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 내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인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내게 제한된 시간밖에 없다면 내가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이뤄야 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그것이 무엇이냐 이 말이에요. 바로 영혼의 문제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목사가 주로 만나는 사람은 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기쁜 일 때문에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분도 계세요. 그렇지만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서, 또 아픔을 호소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눈물 흘리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도 1부 예배 마치고 인사하는데요. ‘목사님!’ 하고 오셔서 손을 잡으며 눈물이 글썽해지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어떻게 하죠?’그래서 제가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고 오늘 처음 오시는 분이 많아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해야 되잖아요. ‘제 옆에 잠깐 기다리십시오.’ 하고 제 옆에 기다리고 저는 악수를 다하고 인사하는데 그 사이에도 계속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너무너무 제 마음이 안타까워서 같이 손을 잡고 기도하는데도 그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아요. 계단 내려가시는데도 제가 맘이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말 울면서 내려가시는 그 분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에 물질의 문제가 전부는 아니에요. 우리 인생에 물질의 문제는 전부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정말 찾아오시는 분의 대부분을 보면 물질 문제 때문은 아니에요. 정말 물질 이전에 있어지는 문제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건강, 아니면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 물질 갖고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정말 심령이 상하고 영혼이 갈급한 상태에 있는 분들을 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마음이 든든하고 믿음 가운데 확고한 마음이 들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안의 마음을 주시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심령이 피폐해 있을 때는 단순한 어려움에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안타까움을 겪습니다. 우리 어려움은 물질의 문제만이 아니라 물질의 문제는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그 다음에 다가오는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분, 몸이 아파 봐요. 정신이 혼미해져 봐요. 그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정신이 좀 들고 나면 병원비도 생각나고 아이들은 지금 학교는 잘 가는가 이렇게 생각나지 않습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면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모든 것이 다 귀찮다. 다 흥미 없어.’ 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내가 어떻게 좀 챙겨 봐야지.’ 라고 마음이 드는 순간 그 다음부터 모든 일이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우리 인생이 어리석어지면 끊임없는 물질의 문제에 내 자신을 묶어 버린다 이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잊고 산다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인생의 문제는 물질을 넘어 선 큰 영혼의 문제가 남아있는 겁니다. 오늘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눈에 보이는 세계, 즉 물질의 세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자신의 생명, 자신의 영혼이 오늘 밤에 하나님께 불려 간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못 가졌던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영혼 저녁에 취해 가시면 그가 창고를 헐고 크게 짓고 그것을 다 채워 놓자고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희 교회는 일 년에 150 가정 정도의 장례가 있습니다. 저도 장례를 많이 치루는 목사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도 계시지만 안타깝게 어린 아이들도 있고요. 사십 초반 되신 분도 꽤 여러분 계십니다. 올 해만 들어서도 최근에 제가 사십을 전후해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을 세 가정이나 제가 연이어 장례를 치룬 적이 있습니다. 한 가정은 아들, 딸 어린 아이들 둘이고요. 한 가정은 딸만 둘 있고 한 가정은 딸만 셋이에요. 다 어린 아이들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언젠가는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언젠가는 불리어 간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의 삶을 설계하고 진행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어려운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들에게 있어질 일을 예상해서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삶의 위기를 관리하고 대처해 놓고 살아가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언젠가 어느 때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라면 그 이후에 관한 문제도 우리는 언제나 생각을 기울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대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자연의 섭리 세계를 보면,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자연에는 소멸이라는 것이 없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요. 그 비가 떨어져서 땅에 스밉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다시 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갑니다. 곳곳에서 증발하면 다시 그것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이루어지고 또 다시 비로 내리게 되는 거죠.
여러분, 나무를 보세요. 요즘 산에 가면 아주 요만한 파릇한 새싹이 고개를 내미는 모습들이 너무너무 귀여워요. 조금 있으면 손톱만한 이파리가 되겠죠. 조금 있으면 손가락 만해지고 손바닥만한 무성한 잎이 되어 여름의 녹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분명히 낙엽이 질 테죠. 이제 색깔이 바래서 낙엽이 지어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나나요? 아니에요. 그것은 떨어져서 나무 밑에 쌓이게 되고 비가 오고 눈이 와 축축해지고 이제 썩어지면 또 다른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의 섭리 속에 소멸이라는 것은 없어요. 언제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세계 속에, 새로운 생명으로 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호흡이 멈추면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진 않아요.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 육신이라는 것은 영혼이 머물러 있는 집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육신의 집이 무너져요. 호흡이 끊어져 무너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이 육신이라는 집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 성도가 소위 말하는 세상을 떠나는 겁니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이 있다면 우리 영혼은 거처를 옮겨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도대체 우리 영혼의 문제가 우리 인생이 무너지는 흙으로 돌아간 이 이후에 우리 영혼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문제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호흡이 멎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엇인가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믿을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한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갈 것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갈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선한 삶을 사는 것이며 믿음대로 이 세상에서 주의 뜻을 이뤄가는 삶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그 보혈의 공로로 씻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우리가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영혼의 문제, 지혜로운 일을 이루는 일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외국에 나갔다가 비행기를 탔습니다. 갈아타는 비행기인데요. 한 두 시간 반 정도 타고 갈아타면 제가 가려는 도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보니까 저는 직접 가는 항로라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가 굉장히 조그맣더라고요. 비행기도 낡고 한 스무 명 정도 타는 비행기인데 제가 뒤에 가방 하나를 맸는데요. 가방하나 맨 것도 조그마한 것인데 못 들고 들어가게 하고 비행기 들어가는 계단에 내려놓고 아래다 싣고 비행기 안에는 몸만 들어가게 하더라고요. 사람이 몇 명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탈 때는 비가 그렇게 안 왔는데 타서 조금 있다 보니까 날씨가 굉장히 나빠졌나 봐요. 갑자기 비행기는 예상된 거겠죠. 그런데 제가 느끼기엔 갑자기 나빠진 거죠. 비가 막 오고 으르렁거리는데 비행기가 워낙 조그마하니까 높게 뜨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막 흔들거리는 거예요. 저는 굉장히 불안하더라고요. 비행기가 막 흔들거리는데 저만 불안했겠습니까? 목사도 불안한데 다른 분들도 불안했겠죠. 그런데 방송에 나오더라고요. ‘기상관계로 흔들리는데 괜찮다.’ 그런 방송이 한 세 번쯤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 다음엔 방송조차도 안 나와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야기도 하고 어떻게 하더니 그 다음엔 방송도 안 나오니 일절 조용해지더라고요. 사람들이 굉장히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일절 비행하시는 분들도 방송을 안 하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가는데 계속 너무너무 심하게 흔들려요. 몸이 막 움직일 정도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기도를 해 뒀죠. ‘야, 기도는 해 두자.’‘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10년 동안이나 은혜 가운데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하시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10년 동안 사용하셨으니 이제 저는 아무런 한이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십시오.’ 기도라도 해 두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일절 말을 안 하더라고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요. 숨쉬는 소리도 아주 다 들릴 정도인 것 같아요. 그 좁은 공간에.

그랬더니 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도저히 안돼서 다시 공항으로 회항하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렸어요. 회항하겠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렸는데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는 것 같이 오더라고요. 그 비행기회사에서 사람들이 와서 조그만 비행기이니까 통로에 못 대고 내려서 걸어와야 되는데 그 우산을 하나씩 주는데 그 비행사 직원이 비를 흠뻑 맞으며 우산을 하나씩 주더라고요.
그래서 쓰고 왔다가 거기서 비행기 편을 다른 것을 마련해 주어서 연결하는 것, 두 시간 반을 가는 것을 한 시간 가고 거기서 또 한 시간 반을 가는 것을 연결해서 탔는데 연결해서 가는 것은 큰 도시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타는 아주 큰 비행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 번에 갈 것을 두 번 갈아타고 가야하는 것인데 하여간 방법이 없으니까 탔죠.

그런데 그 비행기 타고 깜짝 놀랐어요. 그 비행기 타고 속으로 ‘비 오는데 어떻게 하나?’전혀 개의치 않고 비속을 쫙 뚫고 구름으로 올라가더라고요. 그 때 제가 두 가지를 느꼈어요. 첫째는 ‘야, 과연 힘 있는 것이 좋구나.’ 아니, 조그마한 비행기는 흔들거리는데 이 비행기는 비가 오는데도 빗속을 쫙 뚫고 이륙하더니 구름 위로 싹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구름 위로 올라갔더니 비 오고 하던 것이 일절 없어요. 그렇게 평화로워요.
여러분, 구름 위로 올라 가 보신 적 있죠? 비행기 타고. 그 아래 구름만 뭉게뭉게 보이는데 아주 창공한거예요. 그 때 또 한 가지 생각했어요.‘일정한 수준까지가 어려운 거지 일정한 수준까지만 올라서면 그 다음부터는 이렇게 평안해지는 구나. 그래요. 기상의 변화는 구름 아래만 있는 거지 구름 위로 올라가면 기상변화가 안 느껴지잖아요. 다 비 오고 눈 오는 것은 구름 아래서 오는 거잖아요.

제가 그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그래, 힘이 있어야 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영적인 힘이 있으면 고난이 와도 좌절이 와도 난관이 와도 내가 이것 이겨내야지.’ 하고 능히 이겨낸다 이 말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이죠. 그리고 일정한 수준에 올라서면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거예요.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인내하면 돼지. 하나님이 은혜 주실 거야.
우리 실천 사항에도 ‘기본 수준을 넘어서는 의젓한 성도되자.’ 하는 것 있죠? 기본 수준을 넘어서면 그 다음부턴 마음이 의연해질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그와 같은 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정말 우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왜 없겠어요? 왜 하늘에 눈 오고 비 오는데 어려움이 왜 없겠습니까? 바람 부는 날이 왜 없겠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지고 우리는 믿음 안에 굳건히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 저희 교회 처음 오시는 분들 있죠? 또 ‘내가 예수 믿었는데 정말 이제까지 방황하다가 내가 새롭게 결단하고 믿음 안에 살아야 되겠다.’ 하시는 분들 계시죠? 이 시간 마음에 결단하시고 정말 믿음 안에 자유로움을 느끼고 믿음 가운데 힘과 은혜와 능력을 느끼고 하나님을 믿어 믿음의 백성이 되어 구원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마음속에 평안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여서 주의 기쁨을 누리는 은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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