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입맞춤으로... 파느냐? (눅 22:47~48)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제   목 : 입맞춤으로... 파느냐?
성경본문 : 누가복음 22장 47~48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누가복음 22장 47~48절) 

<목회기도>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예배드리게 하심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믿을 사람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어 한숨쉬는 세상에 살며 사랑이 없어 허전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기막혀 할 말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지은 죄 많아 부끄러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에 다시 한번 뻔뻔하게 회개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빛 되고 소금 될 용기를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4월이 복되길 원합니다.
싹 나고 자라, 꽃피고 열매 맺는, 생명을 확인하는 이 계절에…
우리 믿음의 열매를 따게 될 소망의 싹을 키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동안 작정새벽기도를 하며
금식하며 경건하게 보내려 합니다.
이 주간 마귀의 장단에 춤추는 어리석은 자 없게 하시고
죄와 사망과 절망의 돌문이 열린 부활의 아침을 맞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구경꾼으로 왔어도 은혜 받고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된 시간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평안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복된 4월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스펄젼(Charles Spurgeon)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교인이 질문을 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요?"
스펄젼 목사님이 답하기를
"거울을 보십시오. 그 속의 얼굴과 비슷할 겁니다"
질문한 사람은 자기가 평소에 별로 웃지 않는
굳은 표정임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이 없었답니다. (2004년 4월호 [월간목회] 참조)
 
천국 시민의 얼굴은 평안과 감사가 드러나는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지옥에서 외출 나온 사람처럼 하지말고 천국백성처럼 하고
옆의 분과 [4월에 좋은 일이 많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종려주일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승리와 정복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환호성을 올리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요12:13, 계7:9).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 예수님의 일생과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지내는 기간입니다.
* 오락을 삼가고 경건하게 지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결혼식이나 생일 잔치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기도하는 주간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한 주간 동안 작정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월요일~토요일까지는 <비전센타>에서, 
    다음 주일(부활주일)은 <본당>에서합니다.
* 금식하는 주간입니다. "매일 아침" 금식합니다.
  임산부나 아픈 사람, 초,중,고교 학생들은 금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금요일(4월 9일)에는 아침 식사는 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목마르다고 하신 시간동안
  금식합니다. 금식했는 지, 안했는 지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다 압니다.
 
 
유다는 똑똑한 사람이고 인정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종려주일에) 배신자의 상징이 된 사람,
반역자로 불리는 사람  "유다(Juda)"를 소개하려 합니다.
우리의 후대 사람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잘 죽었다고 할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다는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지금까지 반역자, 배신자의 대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기록해 놓은 성경 말씀에 보면(마10:4, 막3:19, 눅6:16)
맨 끝에 유다의 이름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쓰는 용어들 가운데 유다(Judas)가 들어가면 모두 좋지 않은 뜻입니다.
  → Judas tree는 유다가 목매어 자살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는데
    서양 박태기나무라고 합니다.
  → Judas colored라는 말은 붉은 머리카락을 말하는데
    서양에서 붉은 머리는 반역자로 놀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 Judas kiss는 겉치레의 호의, 위장된 호의,
    속셈이 다른 친절, 배반 행위를 말합니다.
    유다의 동료 제자 11명 모두 갈릴리 사람인데 반하여 
  혼자만 유대 남단 에돔 땅 접경 마을(헤브론 남쪽)
  케리옷(keriot) - 가룟 지방 사람(요13:26) 입니다. 

 
유다도 예수님이 많은 기도를 하신 후 택한 제자였습니다(눅6:12~16)
그 역시 예수님께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병고침, 귀신 쫓음, 풍랑 잔잔).
누가복음 10장 17~20절에 보면 둘씩 짝지어 나가 전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다는(Judas) 똑똑한 사람이고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돈궤를 맡은 자였습니다(요12:6)
예수님과 함께 하는 무리의 회계였습니다.
회계는 분명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회계는 믿을 만한 사람, 돈 계산이 정확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유다는 돈 계산에 밝고, 책임감이 분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유다가 인류 역사 최고 반역자, 배반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다는 예수님을 잘못 알고 따랐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잘못 알고 따랐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당시 유대 팔래스틴 지역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먹고 사는 것,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지배당하는 민족의 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까?"
  "누가 이 민족을 해방시켜 줄 것인가?"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요6:1~13)
사람들이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14절에 보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 하며,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강제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5).
 
그러자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고(요6:15)
그래도 계속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16)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39) 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임금 되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는 분명한 표현에
사람들은 수근거렸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6:42)
하며 의심하고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마음을 바꾸고 떠났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떡과 세상 왕국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하여 실망하고 떠났습니다(요6:66).
그러자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요6:67)고 물으셨습니다.
이미 이때, 예수님은 유다의 반역을 짐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이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 앞세워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함도 아닙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음으로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잘못 알고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 하러? 누굴 만나러?' 오셨습니까?
 
 
유다는 처음과 나중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다는 처음과 나중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8절에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가 값진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온전한 헌신의 행위였습니다(요12:7).
이것을 보고 있던 유다는
  "향유를 팔면 3백 데나리온은 될 것인데(1데나리온=당시 노동자 1일 임금)
    왜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지 않았느냐"(요12:5)
하는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그럴싸한 이론 같지만 요한복음 기자가 지적한 대로
유다의 이론과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공금을 맡고 있었지만
그 공금을 슬금슬금 자기 멋대로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만 하여 돈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점점 돈에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유다가 공금에 손을 대는 것을
다른 제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6)
 
사실 악덕은 하룻밤에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는 온전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 주님을 위해 쓰는 일에 대해
세상적인 것과 비교하여 아까워했습니다.
여러분,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의 생각은 옳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보다, 하나님의 원하심보다 세상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유다의 잘못된 생각의 시작이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을 어디에 썼으면"하는 '자기의 생각'은
자칫 유다의 생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목회자가 기도하고 정한 것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는 머리만의 신자였습니다. 머리만의 제자였습니다.
이론만 전개하는 신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맡을 만큼 똑똑하고 사무에 밝은 재질을 가졌으나
주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이 없을 때 그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없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면… 그는 온전한 헌신자가 아닙니다.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외국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온 사람을 찬양대 지휘자로 세운 적이 있습니다.
성악을 전공했다고 하기에 제가 메모를 해서
"좋은 목소리로 다음 주일 헌금 시간에 특별찬양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못합니다. 저는 노래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공연할 때를 대비해 목을 아껴야 합니다"라고 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또 답했습니다.
"알았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찬양대 지휘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전하고
그만두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노래를 잘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찬양대 지휘할 자격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노래 잘하고 실력 있는 전공자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은혜 받은 기쁨과 감격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높여 노래하는 것입니다.
잘 하는 것이 좋으나 전문가여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에게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혹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혀 죽어야 한다"(요 12:24)는
희생적 헌신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주저하는 자는 결국 어느 시기에 가서는
주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목사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현실과 타협한 배신자였습니다
 
유다는 현실과 타협한 배신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성만찬) 장소에서도
"이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려는 생각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 당시에 은 30은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보면 노예 1명 값에 해당되는 헐값입니다.
"소가 만일 남의 남종/여종을 받으면 주인에게
  소 주인이 은 30세겔을 줄 것이요" (출21:32)
 
 
많은 신학자들은 "어째서 유다가
단지 노예 1명 값에 불과한 은 30에 예수를 팔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아마 예수님을 노예값으로 팔아 넘긴 유다는
'돈보다는 자신의 안정과 장래를 위해 관원에게 아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는 방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리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가서 입을 맞추며 "랍비여(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했습니다.
유다는 그렇게 친한 척, 그렇게 가까운 척 하며
예수님께 다가와 입을 맞추며 문안을 드리며 팔아 넘겼습니다.
사실, 배신은 입맞출 정도로 친한 사이의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자 예수는 사형에 처해지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유다는 은 30을 돌려주며(마27:3)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자는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이 가장 한심한 사람입니다.
유다가 만약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면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유다 파멸의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로 알지 못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처음과 나중이 다른 삶, 물질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지저분한 삶,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앞세운 삶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가 걸었던 길을 걷는 사람은 지금도 많습니다.
은 30에 예수를 팔았던 유다처럼, 아니 더 교활하게…
배신의 입맞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목사에게도, 성도끼리도…
물질 때문에, 돈 때문에, 살기 위해서… 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앞세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팔아넘깁니다.
때때로 알게 모르게… 주님의 볼에 입맞춤을 할 만큼 경건한 척,
예수님과 가까운 것처럼 보이며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도 뒤로는 딴 짓을 합니다.
교회에 오면 마치 예수님께 입맞춤 하듯이
찬양도 잘하고 봉사도 잘 하고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교회 문밖에 나가서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사는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우리들, 입맞춤 하는 정도의 사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알게 모르게… 배신의 입맞춤을 하지는 않는지요?
자기 판단대로 살아가기 위해,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척,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며
교활한 미소를 띠고 다가서서 입맞추는 유다에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눅 22:48)
    "네가 … 입맞춤으로 … 파느냐"
    "네가 … 파느냐"
우리는 때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때가 많습니다.
 
 
<유럽에 있는 한 성당은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 유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그 오르간에서 연주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관리인이 청소를 하는데 지나가던 허름한 나그네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오르간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오르간을 건드리지 말아요."하고 소리지르며 달려가
나그네를 의자에서 내려오라고 호령했습니다.
나그네는 조용히 웃으며
"이 오르간이 너무 유명해서 소리나 한번 들어 보려고 여행길을 변경하며
들렀는데 한 곡만 치게 해 주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관리인은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하며 강제로 끌어내려고 멱살을 잡았습니다.
나그네는 차분한 음성으로
"나는 오르간을 좀 만질 줄 아는 멘델스존이란 사람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페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이었습니다.
관리인은 놀라서 사제관에 들어가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신부들과 수녀들이 막 성당에 들어섰을 때,
성당 안은 장엄한 멘델스존의 오르간 연주 소리가 가득 차
기록에 보면 "마치 그 연주 소리가 천국에 들어선 것 같았다"고 합니다.>
 
 
똑같은 악기도 어떤 사람이 연주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내 생각과 판단대로 인생을 연주하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하는 찬양하는 삶으로
주님께 내 인생의 연주를 맡기면
위대한 연주자 주님께서 우리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 순간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등뒤로 미뤄두고…
주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기로 했다고 하면서…
예수님 제쳐 둔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유다가 다가서면서 입을 맞추는 그 눈을 바라보며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물으셨던
주님의 소리를 우리도 들어야 합니다.
 
"신일아, 네가… (나를) 파느냐?"
"집사야, 네가… (나를) 파느냐?"
"권사야, 네가… (나를) 파느냐?"
"장로야, 네가… (나를) 파느냐?"
"얘야, 네가… (나를) 파느냐?"
주님이 서글픈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다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파느냐?"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이 거룩한 주일, 종려주일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성도들
눈을 향하여, 귀를 향하여, 가슴을 향하여
"네가 나를 파느냐?" 유다에게 물으셨던 그 질문의 소리를 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이고난주간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4년  4월  4일 주일 낮 설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