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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주가 쓰시겠다면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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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가 쓰시겠다면 
본문 : 누가복음 19:28~40   

작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로스엔젤레스를 출발한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페루 사람이 배가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검사해 보았더니 이 사람은 마약을 운반하는 사람이었다. 마약 900 그램을 비닐 랩에 씌워서 그것을 먹고서 입국하였다. 이것이 뱃 속에서 위산에 비닐이 터지면서 마약 독성으로 죽고 말았다. 콜롬비아에는 마약 운반학교까지 있다고 하는데 비닐장갑에 분유를 넣어 삼키고 배설하는 훈련까지도 한다고 한다. 마약을 먹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도 배설이 되지 않으면 수술을 해서라도 찾아 낸다고 한다. 이렇게 1킬로를 운반해 주면 3000불을 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삼천불을 벌기 위해서 목숨 걸고 마약을 운반하였다. 이렇게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 땅에 근대화 바람이 불어올 때에 미국인 선교사가 배를 타고 멀리 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마을에서 마을로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선교사는 환자의 몸에서 빼낸 병원균을 몸 속에 담아 미국으로 가져가 예방할 수 있는 약을 만들기 위해 배를 탔다. 중국에서 온 배이기에 검역 직원들이 한 사람씩 세심하게 조사를 한다.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자, 이 선교사는 약병을 꺼내들어 중국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그곳에서 병원균을 마시고 급히 병원으로 갔다.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의사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저의 몸에는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의 병균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병균을 뽑아서 면역체를 만들어 중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의사들이 면역체를 발견하기 전 며칠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똑같이 살다가 죽어도 어떤 사람은 뱃 속에 마약을 넣고 그 마약이 터져서 죽고, 어떤 사람은 중국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다가 죽는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죽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주님에게 쓰임 받고 하나님께 가면 얼마나 멋진가?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에게 쓰임 받는 축복의 삶이되기를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신다. 왜 많은 짐승들 중에 예수님은 나귀를 택하셨고, 왜 많은 나귀들 중에 맞은편 마을에 있는 그 나귀를 택하셔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는가? 우리도 주님에게 나귀처럼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짐승들 중에 나귀가 쓰임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가랴가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나귀를 타신 이유는 겸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주님께 쓰임 받으려면 먼저 겸손할 때에 주님께서 들어 쓰신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신다. 모세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장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큰 도시 로마에 오실 수도 있고, 가이사랴 빌립보에 태어나실 수도 있다. 요즈음처럼 서울이나, 뉴욕이나 런던이나, 동경과 같은 곳에 태어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작은 동네를 들어서 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서 쓰신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을 찾으러 간다. 사울을 만나 왕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사울이 고백하기를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니이까?” 하나님은 사울의 겸손한 모습을 보고 일을 맡기셨다.

그러나 사울이 세력이 확장되면서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왕으로서 할 일과 제사장으로서의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음 데로 제사도 드리는 교만한 죄를 저질렀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겸손한 자를 들어서 일하신다. 그러나 겸손이 떠나면 하나님은 그 일을 막으신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겸손은 어떤 모습인가? 빌립보서의 말씀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 당신이 나보다 낫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겸손이다. 반대로 교만은 당신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이해하다’(understand)는 영어로 ‘아래에 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낮추고 내가 더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에 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같이 나귀의 겸손 때문에 주님이 사용하신다. 그러면 많은 나귀 중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처음을 가장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블레셋에 빼앗긴 언약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기 위해서 “새 수레를 하나 만들어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어” 벧세메스로 향하게 한다. 새로운 수레요,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소를 통하여 언약궤를 나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처음 것을 원하신다. 처음 것은 주님의 것이다. 일주일의 첫날은 주일이기에 우리는 주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직장에 들어가서 처음 받은 월급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주일도 지키지 않고 토요일 그날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가정하고, 주일을 지키고 떠나는 가정하고 하나님은 어느 가정을 사랑하시겠는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처음 것으로 하나님께 공경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 하고 싶은일 다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줍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가 쓸 돈 다 쓰고 조금 남으면 친구에게 인심 쓰다가 그래도 남으면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들어서 쓰신다. 이같이 주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사용하셨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귀의 주인을 생각해 보라. 내가 가진 것을 통하여 주님께 쓰임 받았으니 얼마나 복된가? 제자들이 매여있는 나귀를 푼다. 이것은 분명히 훔쳐가는 모습이다. 얼마든지 나귀의 주인은 왜 주인의 허락도 없이 훔쳐 가느냐고 경찰에 신고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내어준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교회 지을 때의 일이다. 삽이 필요해서 목사님이 교인을 시켜서 어느 교인의 집에 삽을 빌려 오라고 했더니 새 삽이라서 빌려 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고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통해서 주가 쓰시겠다면 우리는 기꺼이 내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 것은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아무런 말도 없이 풀러갈 때에 얼마든지 화가 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의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드렸다.

마리아를 보라. 그녀는 시집가기 위해서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모아왔다. 그런데 마리아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위해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주님께 바쳤다. 주변에서는 왜 그렇게 낭비하느냐고 비아냥 거렸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칭찬하셨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갖고 있는 물질이 나 한 사람 잘 먹고 잘사는 데에 사용된다면 그 물질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물질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다면 그 물질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내게 있는 건강을 내가 하루를 즐겁게 사는 데에 사용된다면 건강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만 내게 주신 건강을 통해서 봉사하는 데에 쓰임 받는 다면 하나님은 그 건강을 기억하신다.
내가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을 통해서도 쓰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고통이 있기에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목사는 시각장애인으로 역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다.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이 사실을 의사가 통보하자 안목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다.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내놓을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안목사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앞을 못 보는 고통을 통해서도 쓰임 받았다.

사랑하는 성도여! 쓰임받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요, 내게 있는 고통 조차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귀처럼 겸손하게, 나귀의 주인처럼 내게 무엇이 있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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