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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벽부터 오정까지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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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오정까지
느헤미야 8:1-12
 
일본 삿포로(북해도) 농과대학 교정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상이 하나 서있습니다. 동상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그 사람이 미국 사람이어서, 세계적인 석학이어서가 아니라 동상에 적혀있는 그가 한 말 때문입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 봤을 ‘Boys be ambitious!(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입니다.

19세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학자요, 농학자였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ck) 박사는 1876년까지 미국 메사츄세츠 주 주립농과대학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삿포로에 농림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초대 교장으로 미국의 클라크 박사를 초청한 것입니다. 1876년 7월 초, 조수 2명과 학생 11명을 데리고 미국을 떠나 일본 요꼬하마 항구에 박사가 도착했을 때, 일본 문무 성에서 장학관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장학관은 클라크 교수일행의 큰 짐 보따리를 보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었습니다. “교수님! 무슨 짐이 이렇게 많습니까?” 그러자 클라크 박사는 “성경책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장학관은 정색을 하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우리 일본 대제국에서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아무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책은 가져가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에 대해 클라크 박사는 단호한 어조로 “그러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자, 당황한 장학관은 순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가지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강의가 끝난 방과 후에 가르치십시오.” 자기 실수로 클라크 박사가 돌아간 것으로 보고 되면 문책 당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 엉겁결에 허락하고 만 것입니다.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개교 후, 어느 날 농림학교를 기획했던 한 관리가 학교 교칙을 가지고 왔습니다. 관리는 “이 교칙대로 학교를 운영해 주시기 바랍니다.”했지만, 클라크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닙니다. 규칙으로는 인간을 만들 수 없습니다. ‘Be gentleman!(신사가 되십시오!)’로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박사는 학교 교칙을 모두 폐지시키고 방과 후에 모든 학생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학교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고별 연설을 했는데, 바로 그 유명한 “Boys be ambitious!(청년들이여 비전과 꿈과 야망을 가져라!), 이것만이 여러분의 살길이다.” 라는 연설이 이때 나온 것입니다. 바로 교정에 박사의 동상과 박사가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사연입니다.

클라크 박사의 고별 연설이 이렇듯 유명해진 데에는 당시 극도로 혼란 가운데 있던 일본에 박사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명치유신 이후의 1868년 일본은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청소년들은 가치관의 혼란으로 방황하는 시기에 있었습니다. 일본역사는 이 때를 일컬어 혼란기 혹은, 과도기라 말합니다. 그러나 삿포로 농림학교 출신들이 바로 클라크 박사에게 교육 받고 사회 각처에서 어둠을 밝히는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 일본을 이끌었습니다. 그 중에 일본의 간디라고 불리는 ‘우찌무라 간조’나, 대석학 ‘니토베 이나조’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1877년에 삿포로 농림학교에 입학하여 클라크 박사에게 1878년 전도 되어 학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16세인 1878년에 입학해서 클라크 교수에게 역시 전도되어 감화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민주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사상가요, 농정 학자였습니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삿포로 농림학교 교수 및 도쿄 제국 대학 교수, 도쿄 여자 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후 유엔 사무국 차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전도를 허락하지 않는 나라, 일본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은 클라크 박사에게 성경을 배우고 꿈과 비전을 갖게 되면서 마음을 바로 잡고 마침내는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 글을 보니까 클라크 박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다나까 수상’이었는데, 다나까 수상 이후에는 일본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고 합니다. 각 계 각 층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수고했던 인물들은 바로 비전을 가지라던 클라크 교수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인생과 역사를 바꾸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섭리해 가신다고도 하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저주의 문제를 해결했다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이요, 회복시키는 말씀이요,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때, 말씀으로 개인에게 부흥이 일어날 때 삶은 변했습니다. 가정과 나라와 역사가 말씀으로 부흥할 때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예를 세계 각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개인적으로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과 무언가 새로움을 바라는 갈망을 느낀다면 말씀의 부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을 완성하셨습니다. 성이 완성된 다음, 안정된 생활을 하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신년인 7월1일 초막절을 지내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이긴 모였는데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생겼던 것입니다. 이는 성이 무너져 있을 때 성을 수축해야한다는 부담감보다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에게 들려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백성들의 말씀 요청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었고 개인 삶의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 인생과 우리 가족 그리고 민족에 있어서 진정한 부흥과 변화를 위해 어떻게 말씀회복이 이루어져야 되겠습니까.

첫째,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듣고 복종할 말씀으로 대하다가 유혹에 넘어가면서 상대화시켰습니다. 말씀을 상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유익이 없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말씀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관으로 평가하면서 절대 기준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대해 바뀐 태도를 보면, 1절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성을 쌓는 것, 즉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과 말씀이 심령 속에 세워지지 않을 때 자신들의 복은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 시대의 주류 사상인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입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들어 있는 영화, 음악, 그리고 생활 습관과 문화패턴에 젖어 알게 모르게 성경이 말하는 사상보다 시대의 사상을 더 따르기 쉽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간단히 설명하면 상대주의,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상대적으로 생각하게 되니까 말씀도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가 되기 힘든 것입니다. 예전에 부모라는 존재는 절대적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입니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신앙과 점점 멀어져 말씀을 강렬하게 요청하기가 얼마나 힘들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태도가 바뀐 것처럼 우리 자세도 바뀔 수만 있다면, 당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성경을 읽는 것과 갈급함을 가지고 스스로 말씀을 보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었겠습니까. 느헤미야의 역사관에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패망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느헤미야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델이 되었습니다. 위기와 절망, 포기의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약속을 지키며 한걸음 헤쳐 나가는 느헤미야에게서 백성들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은 새벽부터 오정까지 대략 6시간 정도 율법에 귀 기울였습니다. 5절 말씀에는 책을 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서 그것도 새벽부터 오정까지 대략 6시간을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앉아서 혹은 누워서 들어도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백성들은 말씀에 대한 갈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애틀 집회를 갔더니 담임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목사님 이민교회는 잘 아시겠지만 설교시간이 30분 넘어가면 반란이 일어납니다. 부흥회기 때문에 조금 융통성은 있겠지만 대체로 시간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마다 보통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울고 웃습니다. 이민생활로 황폐해진 마음과 지친 심령에 말씀이 들어가면서 점차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갈급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볼 것이요” 라는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말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살기는 살겠지만 말씀으로 인해 주어지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삶의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 나를 만나주십시오. 내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간절함과 가난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는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부흥(revival),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이 무엇입니까, 숫자가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인생에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도, 민족의 부흥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설교 시간이 길다고 야단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온 몸이 비틀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전하는 사람에게도 혹 전달방법이나 내용의 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말씀에 대한 경외감의 부재입니다. 6절을 보시면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을 때마다 ‘맞습니다. 주님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표현이 ‘아멘’ 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아멘’ 하면 속으로 ‘누구야? 저렇게 주책스럽고 시끄럽게…….’ 생각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감동될 때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는 이와같은 반응들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말씀에 대한 태도를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 말씀이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 전체를 바꿀지도 몰라. 옳다고 주장했던 주장들이 말씀을 통해서 바뀔지도 몰라.’ 하는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랍비여, 나는 토라를 세 번 훑었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토라는 당신을 몇 번 훑었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8절, 이런 일이 7일 동안 계속 반복되는데 사도행전에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사건이 둘 나옵니다.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는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며 옷을 찢고 마음을 찢으며 어떻게 하여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을 수 있을까 회개했습니다. 반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오히려 스데반을 정죄하며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같은 말씀인데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복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삶에 절대적인 가치와 영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교양이나 마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교양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의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변화를 원하신다면, 가정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면, 이 민족이 부흥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씀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할 생명의 말씀인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회복을 원하신다면 말씀을 잘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깨닫는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6번 정도 등장합니다. 영어로는 모두 ‘이해하다(understand)’ 라고 되어 있는데 한국말로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7절 후반과 8절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해석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어떤 것을 분명하게 하다, 그것을 어떤 것과 분리시켜 의미를 드러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왜 성경을 풀어주어야 했을까요?

백성들은 혈통으로 유대인이었지, 언어나 문화에 있어서는 바벨론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생각이나 문화 그리고 삶의 습관이 바벨론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일 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모두 자기 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받는 것이지요.

요즘 보면 교회 와서 자기 나름대로 은혜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기적과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제자들을 계속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 나름대로 깨닫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깨닫기를 원하는 바로 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은혜 받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내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 돌이키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만큼 변합니다. 깨달아도 잘 변하지 않는데 잘못 알고 있으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눈을 열어주시고 내 귀를 열어주소서.’ 고백했던 시편기자의 기도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이 주어졌을 때,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제가 저 자신을 보면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전 길 가다가 침 안 뱉습니다. 교통위반 잘 안 합니다. 가끔 할 때도 있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 다섯 번 할 때 저는 한번만 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저는 제 체력과 지식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화낼 권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나 깨나 생각하고 정성껏 말씀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저보고 욕할 사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를 욕하는 사람과 저를 비교해보면 제가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갈 때면 저 같은 죄인이 또 없습니다. 저는 일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왜 어려움이 찾아오는지 가끔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을 때면 그동안 어려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아버지 맞습니다. 많이 기다려주셨습니다. 나를 많이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볼 때 정말 죄인입니다.’ 감격하고 죄송해서 울 때가 있습니다. 자기 기준과 판단으로는 괜찮은 존재였는데, 말씀의 기준으로 보니 형편없는 존재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요 하나님 은혜를 얻을 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토록 기다리고 이때껏 만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나를 조명하기 시작하니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성경을 읽다가 멈추어 서서 감격하며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무릎 꿇고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 신앙은 어느새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 더 이상 없고 삶에 변화도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이 희망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사명을 깨닫고 변한 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우리 민족이 가장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던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인도하시던 새벽기도회를 기점으로 변했습니다. 한일합방을 앞두고 온 백성이 참담한 심정으로 희망을 잃고 있을 때, 그리고 기독교인이 고작 8천명밖에 안 되던 때에 모여서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참석했던 정익로 장로님이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울부짖었다.’

집회기간동안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고 반목한 것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집회 때에 있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을 보면 ‘길선주 목사가 일어나서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 아니라 특히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죄를 자복하였다.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이것은 대규모 전도 운동인 ‘백만 명 구령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술 먹고 노름하던 한국인의 삶 속에 도덕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며 절망하던 사람들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금번 새벽 부흥회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산업사회가 되어 우리가 잃어버린 보석이 있다면 새벽시간입니다. 산업사회는 밤문화 중심입니다. 밤문화는 퇴락의 문화요 퇴폐의 문화요 피곤과 지침의 문화, 죄악의 문화입니다. 우리 민족이 새롭게 일어나 결단한 시간이 새벽이었음을 기억할 때, 새벽시간을 다시 회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 주께서 말씀하시는 시간,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새벽시간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자녀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던 선조들의 아름다운 유산을 우리가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시렵니까.

얼마 전 한 국회의원에게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문은 중국이 이미 경제적으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첨단기술도 1.7년이면 따라잡혀 한국이 중국의 경제적 속국이 될 가능성도 많다고 합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열강의 이해관계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구한말 일어났던 상황과 흡사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분이 일어나고 이파저파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도덕적 부패와 타락입니다. 회복될 길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름 아닌 여러분 자녀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 다시 만나십시다. 새벽에 주께서 주신 보석을 다시 찾아 이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시다.

셋째 다시 한번 여러분의 삶과 민족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하신다면, 듣고 깨달은 말씀에 대해 응답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고 울면서 회개하던 백성들은 회개에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삶의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10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 됨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삶의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들의 방패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머물러 괴로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12절 보시면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드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평생 세상에 쏟아내는 쓰레기 양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하다못해 시체까지도 쓰레기입니다. 무엇을 나누고 전해주기 원하십니까? 비방과 원망과 낙심을 나누고 계십니까? 생명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소망을 선포하며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유익과 주장만을 일삼던 삶으로부터 변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막절을 지키고자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사랑을 다시금 회복합니다. 정말 가난하고 어려웠을 때를 기억하면서 나그네와 힘든 이들을 바라보는 신앙 회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절기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개인이나 교회, 한 나라와 민족은 자기 존재가 어떠함을 잘 모를 때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릴 때, 사명을 잃어버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피택자 교육은 좀 힘들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의 문제는 사람들을 잘못 훈련시켰고 또한 훈련시키지 않은 사람을 세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피택된 분들을 섬기고 싶습니다. 세워져서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 아름답게 쓰임 받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하나님께 구별 받고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 이제는 우리 교회 전체가 민족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사모합니다. 그러기에 훈련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세움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꿈과 비전, 즉 존재이유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라가 직면한 여러 가지 위기와 문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다시 돌아간다면, 말씀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이 나라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 1차 회의는 당시 임시 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다음과 같은 개회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 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던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이 나올 때 일동 기립했습니다. 다음 기도내용은 제헌국회 속기록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윤영의원 기도문(일동기립/ 제헌국회 속기록)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기도로 시작한 나라입니다. 우리 민족이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도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 속에 부흥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정과 이 민족이 다시 세워지길 원하신다면 말씀을 다시금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도록 하나님께 간구 하십시오. 나아가 깨달은 말씀대로 오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복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구체적인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기도로 시작한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부흥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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