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웃에 사랑과 관심을/ 눅 16: 19- 24

  • 잡초 잡초
  • 276
  • 0

첨부 1


      이웃에 사랑과 관심을

본문: 눅 16:19-24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가장 무서운 병은 무관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캐덜린 대학의 명예총장 로우렌스 고울드 박사는 인간사에서 늘어나고 있는 무관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미래에 가장 두려운 일이 폭탄이나 미사일, 핵무기 때문에 생기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문명이 그런 식으로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죠. 바로 우리가 더 이상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려하지 않을 때, 마땅히 해야할 일마저도 회피하려 들 때 멸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선교사가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인도 사람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땅에 앉더니 마른 나뭇잎을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벌레를 한 마리 놓은 다음 나뭇잎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빙 돌아 붙었습니다. 그러자 벌레는 겁에 질려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힘에 부쳤는지 꼼짝도 못하고 자신을 구해 내려는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인도 사람은 손을 내밀어 그 불쌍한 처지에 있는 벌레를 죽음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바로 이렇게 하셨소”
우리 주변에는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이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성경에 기록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일깨워 행케 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이기심을 버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웃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펼쳐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잠 24:11)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이 70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할머니는 곧 병원으로 실려갔고 뒤이어 달려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고는 자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의 아파트로 올라갔습니다. 실내는 온갖 고급 도구와 사치스런 장식품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왠지 썰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도 살림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건강상의 이유나 불치병 때문일지도 몰라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할머니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했다고 말했습니다. 골똘하게 고민하던 경찰관은 책상을 뒤져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는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하고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어느 날 책을 뒤적이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파리 한 마리 죽이는 데 야단법석 떨지 말고 지금 당신이 이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라."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살며 내 주위 사람들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서로가 기대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영양소결핍이 아니라 애정 결핍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외롭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다리를 놓는 대신 벽을 쌓고 있는지 제 자신부터 돌아 봐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부자는 살인죄나 간음죄나 그밖에 다른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죽은 후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과 고민을 받으며 자기 집 대문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물론 그의 혀로 남을 멸시하며 교만한 말도 했을 것입니다. 또 그 혀로 많은 여자를 희롱하고 농락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그 형편이 바뀌어져 불꽃 속에서 그 혀가 타 들어가나 물 한 방울 허락되지 않는 고통을 겪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집 대문간에서 온 몸에 헌데를 핥으며 먹다 버린 쓰레기나 뒤져 먹고살던 이 거지에 대해서 한 번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관심한 것입니다 . 또 그의 영혼 문제나 사후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죄명이 없는 또 하나의 무서운 죄가 있으니 곧 무관심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해 왔던 부자 청년은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했기 때문에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돈에만 관심이 있었지 이웃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관심의 죄를 얼마나 짓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모님께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교회와 교인에 대하여 좀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무관심은 무서운 죄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관심을 나타내야 하겠습니까?

1.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전쟁에 참여했던 아들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엄마, 저예요, 저 지금 돌아왔어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 몹시 크게 다친 친구인데 갈 집이 없어요.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해요.”“오냐, 그래라. 우리와 당분간 같이 살자꾸나. 빨리 오너라.” “엄마, 저는 그 친구와 영원히 살고 싶어요. 그 친구는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에요.” “얘야, 그 친구는 너의 짐이 될 뿐이야.” “짐이 된다구요?”아들은 어머니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 후 자살한 아들의 시체가 운구 되어왔습니다. 그 아들은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였습니다. 가슴 울리는 여운을 우리에게 남기는 일화입니다. 나, 내 가족, 내 이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의 이 부자는 자기 집 대문에서 헌데를 핥으며 얻어먹고 있는 거지의 입장을 한 번도 바꿔 놓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세계에서는 입장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제는 편히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신 줄로 압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온 여인의 입장도 예수님은 이해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한 자가 있어도 그 사람을 정죄하기에 앞서 "오죽했으면 그가 그런 죄를 지었을까" 하고 그의 입장과 환경을 바꿔 놓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올케는 시누이를, 시누이는 올케를, 교인은 목사를, 목사는 교인을, 모두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아빠가 우는 애기를 안고 달래느라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기는 계속 울어댔습니다. 그 때 한 손님이 화를 버럭 내면서 "여보슈, 그 애기 엄마한테 좀 갖다 주구려, 어디 시끄러워서 살겠소?" 하고 말했더니 그 애기를 안고 있던 아빠가 침통한 어조로 "여보시오 손님, 미안합니다. 나도 애기 엄마한테 갖다 주고 싶소만 어제 애기 엄마가 갑자기 죽어서 지금 시체를 뒷칸에 싣고 가는 중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기차 안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화를 내던 손님이 얼른 일어나서 그 애기를 받아 주면서 "내가 좀 볼테니 당신은 가서 좀 쉬십시오" 했다고 합니다.

2. 귀를 기울여 주는 것입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 ‘비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가난한 마부 이오나 포타포브는 얼마 전 아들이 죽었습니다.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이노나는 마차를 타는 손님들에게 눈치를 봐 가며 얘기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제 아늘놈이 죽었답니다.”
첫 번째 손님은 “허, 무슨 병으로 죽었노?” 하고 말대답은 했지만 즉시 마부에게 마차를 잘못 몬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두 번째 손님은 “사람이란 모두 죽는 법입니다” 하고 초연한 반응을 보입니다. 모두들 건성으로 들을 뿐, 이오나의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이오나는 젊은 동료에게 얘기를 붙여 보지만, 그는 두 마디도 듣지 않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습니다. 이 불쌍한 이오나가 드디어 이야기 상대를 생각해 찾아간 곳은 그의 말이 건초를 씹고 있는 마구간이었습니다.
“아무렴, 내가 이제 마부 노릇 하기는 너무 늙었지? 내 아들놈이라면 얼마나 잘할까? 틀림없이 일등 마부일 텐데, 살아 있기만 하다면 말야.”
우적우적 건초를 씹는 말 앞에서야 비로소 이오나는 아들 이야기를 마음놓고 꺼낼 수 있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3.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아는 것입니다.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가 추기경의 수술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기경은 의사가 들어오자 말했습니다. "당신은 병원에서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을 다루는 것처럼 나를 다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자 의사는 진지한 표정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즐겨 지칭하는 그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 모두 제가 보기에는 추기경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아줍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힘닿는 대로 도와줍니다. 그러나 자기만 알고 자기의 욕심만 챙기는 악인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아서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이용하고 짓밟고 학대합니다. 옆에서 사람이 고통받고 죽어 가는데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무관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악인이 없어지고 의인이 많아질수록 공평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일본의 유명한 여류작가입니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 그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생활에 도움을 얻고 손님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자는 마음으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너무 잘돼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와야 할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분주히 일하는 아내를 안쓰럽게 여겨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주위 다른 가게들이 우리 때문에 안되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염려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는 아예 가게에 물건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물건을 찾으면 다른 가게로 안내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시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펜을 들어 글을 쓴 것이 빙점이라는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방법으로 보상해주셨던 것입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4.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이 잘못한 것, 혹은 나만 아는 그의 비밀의 죄를 기억하려 들지 않고 잊어버려 주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거나 남이 알아서는 안 될 실수를 했을 때 그 사람이 비밀을 탄로 내지 않고 잊어버려 준다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이사야 43:18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내 편에서 잘한 것이 있거나 남에게 은혜 입힌 것이 있어도 그것을 오래 염두에 두지 않고 잊어버려 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요 진정한 관심인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잊어 버려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5. 주는 것입니다
관심의 표현은 뭐니뭐니 해도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불한당을 만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레위인과 제사장은 무관심하게 지나가 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주고 싸매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다 주고 여관비용을 물어주고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관심은 주는 것입니다. 적은 것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됩니다. 물질이 없으면 눈물로 줄 수 있고 기도라도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가 어렵고 모두가 힘들게 생활한다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따뜻한 인정마저 닫아 두어서는 안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가진 것이 풍족할 때 나눠주는 것보다 비록 풍족하지는 못해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눠주는 것이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 복지사회입니다 이러한 복지사회는 나 혼자만이 호의호식하고 잘 산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나눔의 미덕을 베풀 때 비로소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운명체라는 인식 하에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울 때에만 복지사회는 현실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모두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시길 당부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6:7)
6·25 동란 때의 일입니다. 만삭된 임산부가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쌀도 없고 미역도 없고 기저귀감 하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여자는 자기가 잘 아는 친구 여자 선교사를 찾아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때는 크리스마스 전날인데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몹시 부는 꽁꽁 얼어 붙은 밤이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 던 중 진통이 심하게 일어나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마침 긴 다리에 이르러서 그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해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귀한 옥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싸줄 옷이 없는 산모는 자기 옷을 벗어서 그 애기를 쌌습니다. 그래도 너무 추워서 속내의까지 다 벗어서 애기를 싸안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옆에 있던 푸대 자루로 몸을 감고 그 밤을 지냈습니다. 그 다음날 선교사는 한국가정에 선물을 전달하려고 짚차를 타고 가는데 그 다리 앞에 와 발동이 꺼져 내려서 보니 휘발유가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할 수 없어 걸어서 가는데 다리 밑에서 애기 우는 소리 가 들려왔습니다. 내려가 보니 어머니는 꽁꽁 얼어죽고 애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애기를 데려다 키우는데 12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날 그 아들이 자기 엄마 무덤을 알려달라 고 해서 데려다 줬더니 그 엄마 무덤 앞에서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자기 옷을 하나 하나 벗어 서 엄마 무덤에 덮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생각하기를 "내의야 벗을 라구. 이 추위에" 하고 보았더니 내의까지 다 벗어서 무덤에다 덮어 드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발가벗은 몸으로 엎드려 흐느껴 울면서 "엄마 나를 낳고 다리 밑에 계실 때는 이것보다 더 추우셨지요?" 하면서 일어날 줄을 모르더랍니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교회도 관심 있는 교인들이 모일 때 부흥도 발전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 메사추세츠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닷가를 거닐고 있던 어떤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헤엄을 칠 수 없었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구조요청을 했습니다.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이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젊은이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 젊은이는 생사의 기로에서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한 채 일광욕만 즐겼고 바다에 빠진 사람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익사자의 가족들은 그처럼 무관심했던 젊은이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현행법상 그 젊은이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비록 그에게 법적인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도의적이고 양심적인 죄는 남아 있습니다.
‘제노비즈의 경우’(Genovese Cas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뉴욕 퀸스에서 발생하였던 실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즈가 살해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공격을 받고 살해되는 장면을 38개의 얼굴이 창문에서 바라보았는데 한명도 경찰을 부르거나 나가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뒤에 이들을 심문하였는데 38명이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몇 주는 위기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령 로드 아일랜드의 경우 이런 무관심한 사람에게 5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사랑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새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랑에는 노여움과 불만을 녹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모님께 대하여, 자녀나 남편, 아내에 대하여 또 이웃에 대하여, 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무엇인가 무관심한 것이 없는가 살펴보시고 작은 것 하나라도 좀더 관심을 가져주고 진정한 사랑을 베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천하만민 중에서 저희들을 택하여 주시고 저희들에게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고, 자유와 건강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 중 무엇에 가치와 관심을 두어야 할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의 일에 관심과 정열을 쏟을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죄를 범치 않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사람들처럼 썩어질 것, 허탄한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