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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마 6: 25-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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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려하지 말라

본문: 마 6;25∼34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제이시 페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페니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심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그의 걱정과 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최고로 악화되면서 페니는 미시간주 배틀크릭에 있는 격리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바람을 타고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나는 곳을 간신히 찾아갔더니 어떤 작은 건물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뒷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매우 친숙한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그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염려를 몰아내었고 큰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술회합니다 그 후에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대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이 있습니다. 돈의 유혹과 염려입니다. 돈은 외적으로, 염려는 내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특히 염려, 근심, 걱정은 일종의 습관입니다. 일단 염려하는 버릇이 몸에 배면 좋은 환경이 되어도 계속 근심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6번이나 반복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왜 주님은 이토록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염려는 우리 몸을 상하게 합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마음을 나눈다’‘생각을 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면 생각이 나누어져서 혼란스럽고, 방황하게 되고,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되고, 잠을 이룰 수 없어 결국은 큰 병이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기쁨이 보약이요 근심이 독약입니다. 염려는 무의미합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염려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쓸데없는 것, 전혀 필요 없는 것, 가장 무가치한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가꾸시거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산다면 최소한 5가지 근심은 해결됩니다. 의식주(衣食住),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빌4;19). 열등의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가장 아름다운 존재입니다(시139;14). 저주의식,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십니다(롬 8;32). 불확실한 미래, 우리가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롬 8;28). 죽음의 공포, 생명은 주께 있는 것이므로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가든지 그곳은 천국임에 틀림없습니다(요14;1∼2).
세계적인 권위 있는 연구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걱정, 근심 가운데 80%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이며, 12%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고, 오직 8%만이 진정으로 걱정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나머지 8%의 걱정, 근심도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8%까지도 하나님께서 대신 맡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걱정할 필요 없는 쓸데없는 걱정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 끝나버린 일을 붙들고 걱정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시간 낭비입니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축하객인 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본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거의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톱밥을 켜본 사람은 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에 켤 수 없습니다.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나버린 일로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거나 용기를 잃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톱밥을 켜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입니다. 둘째는, 기우(杞憂)입니다. 오지 않을 일,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걱정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 대로를 고집하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입니다. 넷째는, 자기 이름을 내 세우려 하는 데 따른 걱정입니다. 별것도 아닌 자기 이름 석자, 명예에 신경 쓰며 괜한 일에 헛되이 시달리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완전히 내 맡기지 못하는 데에 따른 걱정입니다. 남을 믿지 못해서 오는 걱정입니다. 여섯째는 날씨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뜻에 따라 비오고 안 오고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일곱째는 병들까봐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며 우리가 진정 걱정할 것은 어떤 모습, 어떠한 형편으로 죽게 될까 걱정해야 합니다.
성도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25)
둘째, 많은 일들로 인해 염려치 말아야 합니다.(눅21:34)
아주 먼 옛날에 새 시계를 조립하는데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시계추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시계추는 자기와 함께 일하게 될 큰 톱니바퀴들이 모두 다 닳아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자나야 하는가 계산해 보았습니다. 혼자 계산해 보니 밤낮을 쉬지 않고 똑딱거리며 움직여야만 되겠는데 1분 동안에 수십 번을 똑딱거려야 하고 매시간마다 그것의 60배를, 또 매시간마다 움직이는 양의 24배를 매일 감당해야 하는데 그것도 1년 356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를 내야하니 정말로 끔찍하였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힘든데 수백만 번씩이나 움직여야 하다니 불쌍한 시계추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못할 거야. 그러자 시계주인이 시계추에게 힘과 용기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똑딱 소리를 한번만 내어 줄 수 있겠니? 그럼요, 물론이죠. 시계추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 그러면 됐어! 네가 할 일은 그것이 전부야! 시계주인이 말했습니다. 그 후 시계추는 시계 속에 매달리어 한번 움직일 때마다 한번씩만 똑딱거리며 꾸준히 일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아주 기쁘고 즐겁게 명랑한 소리를 내며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어리석게도 일년치 일이나 고생을 한꺼번에 계산하지 말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에만 성실히 살아 가야합니다. 염려는 그 날로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셋째, 생활의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눅21:34)
나의 외할머니는 매우 연로하신 분이었는데, 늘 내 걱정을 하셨습니다. 나는 기차여행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걱정을 하시며 사고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내가 집에 돌아오면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려 므나. 자동차 사고, 비행기 사고, 기차 사고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니?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고 있어. 그런데 넌 한 달에 15일간은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 등을 타고 있지 않니? 제발 여행을 그만 두거라" 어느 날 나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만일 통계 숫자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면 세상 사람들의 97%가 침대에 누워서 죽는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그런데 저는 지금 밤을 꼬박 침대 밖에서 지내고 있잖아요. 통계상으로 본다면 사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이 더 안전해요.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있다가 죽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할머니는 내 말에 몹시 당황해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 네 말이 옳다." 그 후 할머니는 나에게 사고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커다란 위험을 안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부질없는 걱정, 근심들이 오히려 삶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뿐입니다.
넷째, 핍박받아 잡혔을 때 어떻게 말할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마10:19)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염려해서는 안될까요?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염려한다고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염려는 무익합니다.
현대인들은 막연한 불안과 염려에 시달립니다. 닥칠지 안 닥칠지도 모를 일을 가지고 염려하기도 합니다. 염려로 인해 어떤 이들은 두통과 위장병, 관절염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고 말씀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염려를 흔들의자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둘째는 염려는 불신앙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즉 염려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
염려는 믿음의 부족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너희야 말할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조건 하에서도 지나치게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지 뮐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고,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채워주심과 돌보심을 믿고 염려를 던져버리십시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마10:20)
깊은 산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소원이 서울 구경을 꼭 한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가면 깜깜한 굴을 지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늘 두려웠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서울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서울 구경을 소원했던 할머니는 그러나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걱정이었습니다. 기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할머니의 불안은 더욱 커갔습니다. 급행 열차가 긴 굴에 다다르기 전 할머니는 너무 걱정을 한 나머지 지쳐서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잠을 푹 잔 할머니가 눈을 떴을 때는 서울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눈을 감고 긴 굴처럼 느껴지는 죽음의 터널을 지나서 눈을 뜨면 거기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인생에서의 걱정과 근심은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히려 몸을 떠나는 것이 곧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고후 5:6-8)
넷째는, 세상의 염려는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마13:22)
사람은 누구나 다 염려 없이 살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누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암환자도 많고 돌연사도 자주 발생합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도 심각한 스트레스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촛밀 같이 녹아 내린다"(시편22:14) "내 마음이 눌린다"(시편61:2) 등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삶을 좀 먹습니다. 의욕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상실하며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염려를 없이 할 수 있을까? 즉 염려 해결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 주님을 믿고, 여호와를 의뢰하십시오(시37:1-5, 사26:3-7)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문턱을 넘어설 때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어둠이 광명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염려에서 해방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눌려지내던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노래하고 있음은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기 하루 전날 밤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나는 기쁨이 가득하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시면서 심령의 평안을 만끽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계집종의 말에 잔뜩 겁에 질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믿음의 연단을 받고 난 후 염려를 맡겨 버리라(벧전5: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855년 한 아일랜드 청년이 결혼식 전날 익사사고로 신부를 잃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기도하다가 "그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잃고 구원을 이루셨으니 나도 상실을 믿음으로 이기자"라고 말하며 재기했습니다. 청년은 즉시 이 "믿음의 고백"을 시로 썼습니다. 이 시가 오늘날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가 487장이며 청년의 이름은 조셉 스크리븐입니다.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중국 내지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는 믿음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는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이므로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시인하고 회개하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후부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고 성공적인 중국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한 이상 우리 삶의 현장에서 다가오는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다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둘째, 자기의 짐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마11:25-30)
오래 전에 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할머니가 장터에서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차를 세우고는 할머니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하면서 차를 타고 가시라고 하면서 차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짐을 머리에 인 채로 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가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하나 태워 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셋째,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나의 길과 행사와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십시오.(시37:5, 벧전5:7)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모든 장애물을 거두어 낸 다음 이제 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간절히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 문제에 개입하셔서 그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0시간 염려하기보다는 10분 기도하라.” 정말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습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상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임을 믿으라고 말합니다.(히11:6)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며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되고 모든 염려와 근심은 눈 녹듯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넷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즉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마6:33)
문제가 생길 때, 대부분은 그 문제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일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그 문제에 집착하여 근심과 걱정으로 온밤을 지새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해 있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먼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마는 그가 불순종의 죄에 빠지자마자 당장에 배고픔이 찾아왔고 질병이 찾아왔고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에 몸부림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 인생들은 다시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범사에 감사하고 힘을 다하여 바쁘게 일하십시오.(전9:10)
근심에 대한 특효약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면 강건해지고, 평안과 활력이 생기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없이 반복해서 감사를 명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기억하십시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세계적인 여류탐험가 오사 존슨은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들 부부는 25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라져 가는 야생 동물들을 촬영하면서 세계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찍은 기록사진들을 전시하고, 강의하며 순회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남편은 즉사하고 여사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3 개월 후 휠체어에 앉아 다시 청중에게 강의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힘든데 강의하느냐?"고 질문하니 "나는 슬퍼하고 근심할 시간이 안 생기도록 하기 위해 강의하며 다니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근심의 치료법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롬12:11)
성경에는 '걱정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365 번나옵니다. 하루 한번씩인 셈입니다. 염려는 믿음이 적거나, 사람을 두려워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말처럼 '걱정이여 안녕'을 해야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사랑과 평화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이제 저희들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로 모든 근심을 이기고 주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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