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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에서 만난 예수(습 3:14~1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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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스바냐서 3:14~ 17, 20

  주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서신서 말씀: 베드로전서 1: 3 ~ 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 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의 몫으로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잠시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누가 복음서 24:13, 28 ~ 35
  그런데 마침 그날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시려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기를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말하기를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오늘은 부활주일이 지난 뒤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부활절 둘째주일로 지킵니다. 이 절기에 중요한 것은 부활의 생명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이제 그것을 어떻게 간직하며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부활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간직하자!

제가 군목일 때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당시가 70년대 초반인데, 제가 있던 부대에 젊은 장교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이북에서 온 젊은 사람인데, 6․25 전쟁 때 아버지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오랫동안 가족들을 찾았는데, 어머니는 못 찾았고, 아버지를 찾아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남하하여 서울에서 돈을 많이 벌어 상당한 재력가가 되어 있었고, 어머니를 찾지 못해서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이 장교가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젊은 사람들이 많이도 와서 다 자기가 자식이라고 그러는데, 결국 돈 보고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자네도 그런 가짜 중에 하나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진짜 아들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증거를 요구하셨습니다. “무슨 증거를 원하십니까?” “네가 어릴 때 나하고 같이 놀던 일들을 내가 기억할 수 있게 해봐라.” 그런데 이 장교는 아주 어릴 때 헤어져서 아버지와 놀던 것을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납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아버지는 혈육을 못 찾고, 재산을 어느 학교에다 고아를 위한 장학금으로 헌납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장교는 한스러워했습니다. “아버지께 그렇게도 이야기를 했건만, 재산이 아니라 혈육을 찾아 헤맸다고 했건만, 아버지는 하도 속아서 증거 없이는 못 믿고, 결국 저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 노릇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산소를 돌보는 사람도 없어서, 제가 수소문해가지고 산소를 찾았고 종종 돌아봅니다. 목사님 어쩌면 좋습니까?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니까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어떻게 해야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입증되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병원에 가서 아버지와 아들이 피를 뽑아서 DNA 검사를 해서 딱 맞추었을 텐데, 당시야 기술이 모자랐으니…참 안된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렇게 증거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부활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한테 확증 하나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찢긴 몸, 그걸 믿고 의지하고 받아들이면 반드시 새로운 생명이라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활로 입증하십니다. 오늘부터 부활의 생활이 우리한테서 시작됩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베드로전서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덕으로 여러분한테 유산 하나를 넘겨주셨습니다. 그 유산은 썩지 않습니다. 그 유산은 아무리 타락한 세상에서도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 유산은 아무리 써도 낡아 없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유산을 땅에 두지 않고 하늘에 보관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유산을 잘 간직하여 부활의 생명을 누리십시오.

베드로서가 말하는 유산이 뭡니까? 유산은 골고다 언덕에서 찢기셨던, 피를 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 속에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이 담겼으니, 부활을 얻고 싶은 자는 십자가의 흔적을 갖고 오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한 부활을 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증거는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이는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까 청년 장교의 경우에, 아들임을 입증할 수 있는 흔적, 그 흔적이 없어서 부자간의 정을 나누지 못하고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이 반복되지만, 우리 가슴속에, 우리 사회 속에, 세계 속에는 십자가만 보입니다. 부활을 찾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보통사람 같은 모양을 하고서, 예루살렘에서 30리, 그러니까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길을 두 사람과 함께 가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두 사람하고 같이 가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장사한 지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소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살아서 자기들 옆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상상의 영역이지 현실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길손이 제자 두 사람에게 모세 때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 이야기를 풀이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오늘 구약 말씀인 스바냐의 이야기도 해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스바냐서의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모세라는 지도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40년 동안 했습니다. 말이 쉬워 40년이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았다면, 그 삶의 형태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물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누울 곳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먹을 것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사막과 황무지에서 40년, 수많은 사람이 죽고 세대가 바뀐 뒤에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섰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그 땅에는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타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사는 상황에서, 옛날의 그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온아 두려워 말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너희들을 사랑으로 반겨주신다. 너희를 새롭게 해주신다. 너희를 보고서 하나님은 즐거워 노래하신다. 너희를 보며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기뻐하신다.”

지도자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다보면서 숨을 거둡니다. 그 후계인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요단강 저쪽에서는 가나안의 원주민 여러 부족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인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데 어떻게 건너야 됩니까? 여호수아의 호소는 스바냐 당시 사람들의 호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서 엄중하게 경고 겸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팔 좀 늘어뜨리고 있지 마시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을 보고서 기뻐하고 노래하고 계시는데 왜 팔을 늘어뜨리고 걱정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보고서 어깨가, 스바냐가 예언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끝났다. 그분의 시대는 갔다.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들은 힘없이 엠마오라는 작은 동네를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행하던 낯선 길손이 모세 때부터 여호수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를 하면서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들은 실의에 젖어서 옆에 가는 사람이 스승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이 예수의 말씀인 줄도 모르고 걸어갑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야 되겠는데 길손은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합니다. 두 제자는 같이 먹고 머물고 가지고 예수님을 쉴 집으로 이끕니다.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손님에 대한 접대입니다. 자리를 잡고서 음식이 나왔는데, 빵을 들고 예수께서 하늘을 향하여 축복기도를 하시고 나눠줄 때야 제자들은 비로소 그 길손이 스승인 줄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떡을 떼는 장면에서야 알아보았습니다. 떡은 이 사람들한테 예수님을 알려주는 증표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면서 떡을 떼시던 스승 예수! 그때서야 제자들은 환하게 빛나는 예수의 모습을 알아보았고, 소문으로만 생각했던 그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걸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몸이 찢기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재현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부활해서 영광 가운데 있는 예수의 얼굴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청계천 공사 하다가, 그 밑에 묻힌 유적들이 발견되어서 공사를 중단하고 유적을 발굴한다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거나 건물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다가 유적이나 유물이 나오면 일단 멈추고 먼저 유물을 캐냅니다. 문화재 발굴! 왜 그렇게 문화재 발굴에 관심이 있을까? 백 년 전, 이백 년 전, 천 년 전, 혹시 만 년 전의 문화를 담고 있는 청동무기, 도자기, 장신구 등이 발굴되면 모두 기뻐합니다.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면 좋아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다거나 질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문화재 속에 당시의 가치와 예술, 생활상과 사회상, 정치상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유물의 물질적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 속에 담겨진 의미와 뜻에 있습니다.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우리와 과거의 현실을 연결시켜줍니다. 오래 전의 역사는 옛날이야기, 과거의 이야기지만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오늘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유물이나 유적이라는 것은 우리한테 커다란 의미가 됩니다. 이런 문화적 유산을 귀하게 여기는 민족은 뛰어난 민족이고, 이것을 업신여기는 민족은 뒤떨어진 민족입니다. 훌륭한 민족일수록 과거의 유산을 현재와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역사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여기에 빗대어 신앙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이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데, 그 사람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분이 무덤에 묻혔습니다. 세마포에 싸여 묻혔습니다. 아마 그대로 있었다면 발굴단이 몰려들 일입니다. 여인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삼일 만에 무덤을 찾아갔는데 무덤 문은 열리고 ‘유적’은 없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하늘나라의 유적은, 오늘 읽은 베드로서의 고백에 따르면, 땅 속에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보관해 두셨습니다. 그 유산의 이름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유산을 어떻게 발굴합니까? 문화유물은 땅을 파서 발굴합니다. 땅 속에 묻힌 유산,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던 유산, 부식되고 훼손된 것들을 다 복구해서 과거의 역사를 살려냅니다. 땅 속에 있는 것도 이렇게 귀중하다면, 하늘에 있는 것은 얼마나 귀중하겠습니까? 그런데 땅은 파헤치면 되지만, 하늘은 열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엽니까? 십자가로 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살아있는 유산입니다. 십자가에 나의 생명을 구하는 깊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늘 나한테 생명의 양식이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단지 나무 막대기일 뿐입니다.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유적 속에 묻힌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차이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며 살아갑니다. 믿든 안 믿든, 하늘을,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며 살아갑니다. 그 하늘이 신들이 있는 곳이고 하기도 하고, 사람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공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예수라는 분이 땅에 내려왔다고 증언합니다. 하늘이 내려와서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습니다. 그 몸을 입었던 사람이 십자가에 죽고서 부활하여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승천입니다. 하늘이 땅에 왔다가 다시 하늘로 갔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왜 믿습니까?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지 않으시고, 그냥 땅 속에 묻혀 계셨다면 그 하늘은 믿을 수 없습니다. 땅에서 구원 사건을 일으킨 그분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열고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종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늘을 믿습니다. 그런 하늘을 믿기에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열리지 않은 하늘, 열쇠가 없는 하늘을 믿어서 무엇 합니까?

여러분 하늘을 여세요. 땅속에 있는 십자가 가지고 여세요. 흘린 피 가지고 여세요. 찢긴 몸 가지고 여세요. 십자가로 열리는 하늘, 그것 말고는 다른 하늘이 없습니다. 저는 그 하늘을 믿습니다. 그 하늘에 계신 분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그 길에는 항상 부활의 생명이 보장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활의 생명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땅과 하늘이 만날 수 있습니까? 하늘의 위로와 복은 어떻게 임합니까? 열어야 합니다. 십자가 가지고 열어야 합니다. 하늘을!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히 하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우리가 죄 지었으면 죄 지은 대로 오라는 것입니다. 허물을 가졌으면 허물을 가진 대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 나아가면 예수께서는 부활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입니다.

다만 허물을 씻을 때는 눈물 좀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할 때는 자책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말로만 회개하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병은 낫지 않습니다. 병원 가서 의사한테 상태를 제대로 말하지 않으며, 바른 진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혹 창피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해야 바른 진단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의사 앞에 가서 거짓말 하는 사람 봤습니까? 말 꾸며대는 사람 봤습니까? 감언이설 하는 사람 봤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오늘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잘못한 모습 그대로 십자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를 씻겨 주신답니다. 이 진실을 여러분이 생명의 진실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이 민족이든, 이 세계든, 거짓말과 감언이설이 가득할 때는 씻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씻김을 받으려면 있는 그대로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실한 모습으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십니다. 가식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늘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문을 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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