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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만족과 하나님의 만족 (삿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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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사람들을 빚지게 만드는 세 가지 신화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안전해진다”는 이 세 가지 신화에 찬성한다면 우리의 삶은 항상 낭비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내 것만을 채우려고 하고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살려고 하면 끊임없는 불만과 낭비의 연속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살면 언제나 넘치는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

여러분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한 남자가 자신의 신체를 알몸으로 드러낸 채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듯 생각하는 조각상입니다. 그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 지옥 편에 나오는 것인데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상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아래에는 '지옥 문 앞에서'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정으로 깊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살아 있을 때에,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살기가 힘들어 허덕거리며 하루하루 사노라고 내 삶의 영원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지 않았습니까? 세상을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생각이 모자랄 수 있고 내가 깨닫지 못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만 내가 몰라서 그렇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거스틴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사사기 말씀은 이스라엘이 족장시대에서 국가의 시대로 들어가기 직전의 시대로서, 신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상당히 혼동스런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평안할 때면 예외 없이 타락하며 실족하였고, 고통의 순간에는 눈물로 여호와께 호소하였고,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회복함을 허락받는 삶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삶속에 13장에서 21장까지의 말씀에 나타난 세 명의 인물을 통하여, 잘못된 신앙인의 모습들이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줍니다. 그 혼동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삼손과 미가와 한 레위인이었습니다. 오늘은 17장의 말씀을 가지고 미가와 그 가정에 나타난 잘못된 재물관, 신앙관, 교회관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보면,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던 한 가정의 자녀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어머니의 돈을 몰래 훔쳤는데, 어머니가 돈을 훔쳐간 자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붓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떠들고 다니자, 아들이 그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훔쳐간 범인은 바로 자기라고 자수를 하고 나니, 어머니의 모든 저주가 아들에게로 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도 그 돈을 돌려받기가 겁이 났고, 아들은 더더욱 겁이 났습니다. 그러자, 그 돈으로 하나님을 만들고, 나머지 돈으로 제사장을 하나 사서 고용하고는 자신의 가정을 위하여 복을 빌어달라는 제도를 쓰게 된 것입니다. 18장에 보면, 단지파의 사람들이 와서는 그 레위 소년을 더 좋은 조건으로 제사장으로 고용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일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혼동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각자의 모습을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주님께서 복된 날로 정하신 주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십니까? 아니면 겨우 감당하시는 마음이십니까? 안 나올 수 없어 나와서는 찬송시간에 겨우 입술을 벌리다가, 설교시간에는 졸다가, 축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신나는 곳으로 가는 마음으로 드리는 들 뜬 예배는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우리들의 기쁨의 시간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기쁨의 요소는 다른 곳에 있고, 억지로 감당하시는 모습은 아닌가요? 이 시간 오늘의 혼동 스런 시대를 대언하는 미가 소년과 한 레위 소년의 모습에 관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재물관이나, 신앙의 중심과 교회관을 온전히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재물관의 혼동

미가의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잃은 돈이 1,100개의 은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은 삼십은 종 한사람의 생명의 값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은 한 개로 한 달의 삶을 살았던 것을 볼 때에, 은 1,100개는 오늘날로 수십만 불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어머니는 저주를 퍼붓고 다녔고, 아들이 자수를 하게 되자, 저주의 대상이 아들임을 알게 된 어머니는 말투가 바뀌어서 2절 끝에 "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고 한 입으로 동등한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또한 축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재물 때문에 한 입술로 저주를 퍼부었고, 축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3: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찬송과 저주가 함께 실려진 입술은 입술만 더럽힐 뿐입니다.

물질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시험에 들고, 우리 입술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물질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모습이 아니고,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떠난 것도 아닙니다. 파스칼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난하게 하신 것에 대하여 중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삭개오와 같은 인물은 예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주어진 가난이 오히려 그들의 감사의 조건들이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은 고난도 있었지만, 물질적으로도 엄청난 량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많은 재물에 대하여 그들은 재물이 많기 때문에 축복이 아니라, 많이 누릴수록 더욱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재물에 대한 바른 생각중의 근본적 원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잠깐 누릴 것일 뿐이라는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욥은 욥1:2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이 땅위에서 살아있는 시간까지 잠시 맡은 청지기들일 뿐입니다. 은행 창구에 있는 직원들이 돈이 많이 적금 되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잠시 후면 도로 찾아가면 돌려주어야할 뿐입니다.

시카고에 살았던 어떤 분은 부부가 성실하게 일하고 살 때에는 그렇게 화목했는데, 돈을 좀 벌고 나니까 매일같이 싸움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싸우다 가 같이 총을 들이대고 동시에 방아쇠를 잡아 다녀 함께 죽었고, 집에 돌아온 자녀들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 집의 금고에는 150만 불의 현금이 있었고, 자녀들이 있었지만, 세무국에서 와서 모두 빼앗겨 버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재물이 오히려 증오와 싸움과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로서 감당할 때에, 우리는 남의 것을 탐낼 것도 없고 맡겨진바 성실하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게 맡겨주신 것들이 내 영적인 삶을 위한 최고로 적절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4:11,12절에 서 그에게 맡겨진 모든 환경에 대하여 만족하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 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있어도 결코 실족치 않고 없어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재물의 다소보다 중요한 것이 그 재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물질의 다소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땀을 흘리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내게 주어진 재물에 만족하며 열심히 땀을 흘리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위에 생명이 있는 날까지 건강하게 주어진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중심의 혼동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이제 저주를 퍼부었던 돈을 서로 갖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돈의 일부분으로 신상을 부어 만 들었고, 신상이 있으니 신당을 만들었고, 제사장이 입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다 준비가 되었으니, 이 젠 한 레위의 소년을 만나 그를 제사장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신앙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면 6절에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신앙의 기준이 "자기 소견"대로 였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신앙의 행동이 "자기의 소견대로..."의 모습입니다. 나보다 말 빠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보다 더 열심이 없는 사람은 엉터리 신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 몰려있었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이거든 속히 뭔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의미는 당신의 행위를 보고 내가 당신이 메시야인가를 판단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들의 소견대로 판단하고자 할 때에 아무도 예수를 메시야로 받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미가의 아버지 대에 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중심하는 신앙의 모습이었던 같습니다. 왜냐하면,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감히 하나님과 같으리요.."라는 뜻으로, 모든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며, 그 무엇도 견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아름다움이 깨어질 때에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잘못된 기준과 공식에 의해서 평가된 것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쓸모없는 봉사와 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삶은 오히려 부단히 자신을 버리는 일이며, 자신을 깨뜨리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앞서, 부단히 나를 깨뜨리는 일에 관심을 두십시오. "제 소견으로는..."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투 같습니까? 세상에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삶에서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삶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우리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예비한 그 길을 말씀대로 좇아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주어진 답답한 문제가 있으십니까? 소견을 내세우지 마시고,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조용히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자신의 의견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만족의 도구가 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 그 분께 영광 돌리는 분명한 목적을 가 지고 "하나님의 불꽃같은 두 눈동자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관의 혼동

미가와 어머니는 꺼름직한 돈 은 200으로 신상을 만들었고, 은 900으로 레위 소년하나를 고용했습니다. 그 사람은 갈 곳이 없 어서 거할 곳을 찾고 다니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서로가 계약을 맺었습니다. 매년 은 10씩을 줄 테니까, 너는 어디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제사장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벌려놓은 결론으로 "미가가 가로되 이제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미가가 추구한 것은 자기만족이었습니다.

미가의 입장에서는 신상과 신당도 있고, 제사장도 은 900으로 매년 10개씩 주면, 90년은 걱정 없이 그를 고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남은 일이라곤 복 받을 일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미가의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개념과 한 레위인의 성직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혼동된 모습입니다. 한 레위인은 거할 곳이 없어서 이리 저리로 다니다가, 드디어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일, 저일 다 하다가 더 이상 할 일은 없고, 주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여야겠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직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는 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늙어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에 주를 위해서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관도 올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목사를 고용했고,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사람들도 대충 모인다고해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난 교회가 그럴 줄 몰랐어"라고 하면서 실망과 상처를 받는 분들을 봅니다. 교회를 알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외형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아닙니다. 베드로 전서를 보면, 교회는 우리 중심 하나하나가 작은 돌이 되어 교회가 되어진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도 아닙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씻음을 받고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입니다. 교회는 온전한 천국이라기보다는 훈련의 장소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천국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하셨다면 당연한 실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완전한 자들이 부름을 받고 부단히 깎이고 세워져야 하는 훈련의 장소이지, 복이 덩굴처럼 덩실덩실 넘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소외당한 자들, 뭔가 불만으로 가득한 자들, 괴로움과 절박함으로 가 득한 자들이 가득할 때에, 절박한 상황 속에 기가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목사가 있다는 사실이, 교회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이 교회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기도할 제목들이 많은 그래서, 더욱 세차게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나의 만족을 이루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이루어 가는 장소입니다. 교회에서 나의 만족을 추구하면, 우리는 편안과 안일과 게으름과 적당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그분의 만족을 이루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만족이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기를 원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만족될 수 없는 욕구의 노예가 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삽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고난을 당하거나 평안하거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의 가정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신앙의 3가지 혼동된 모습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물질의 다소보다 중요한 것은 만족과 수고의 땀 흘림이며 신앙의 중심은 자기 소견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감당하는 것이고 거룩한 교회의 직분을 감당할 때 적당히 여력으로 감당하는 성직이 아니라, 힘을 다해 감당해야 하고, 교회는 나의 만족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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