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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 살 길이 열립니다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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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어있다. 좋은 친구 만나서 좋은 영향을 받으면 점점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지만 좋지 못한 친구를 만나면 우리의 생활은 점점 않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 지나친다. 그런데 그곳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서 지나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아직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죽어가는 이 사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치지 않고 이 사람을 잘 치료하여 달라고 가진 돈도 내주고 간다.

같은 자리에서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되었지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서 죽어가던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렇게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한국이든지, 미국이든지, 러시아이든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형편이 잘살고 있든지, 생활 형편이 어렵든지, 상관없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죽음으로 향할 수도 있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신다. 강도 만나서 죽게 되었든지, 실패해서 스스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든지 간에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다.

일찍 혼자 되어 사랑하는 외아들을 정성으로 키우던 과부가 있었다. 이 부인에게는 이 아들이 유일한 소망이었고, 아들 잘 되기만을 기대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어머니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려보려고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보았고, 용하다는 약은 모두 사용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 모두가 헛수고이었다. 결국에는 이 아들이 죽게 되었다. 이 어머니는 유일한 소망이요, 가족인 아들을 잃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사람이 죽었으니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는가? 이 아들을 묻기 위해서 장례 행렬이 이어진다. 죽은 아들의 관이 앞서고 뒤에는 슬퍼하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간다.

그런데 맞은 편에 여러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어 다가오고 있다. 한 사람을 중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성으로 들어오는 그룹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바라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시고 슬퍼하며 고통 중에 있는 여인을 찾아가서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 불쌍히 여겨 관에 손을 얹어 죽은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죽은 자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들을 묻기 위해서 무덤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돌아서게 되었다. 공동묘지로 향하던 발걸음이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이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다. 내가 오늘 예수를 만난다면 우리는 이미 살 길이 열려진 사람들이다. 내가 오늘 예수를 만난다면 우리의 발 걸음이 무덤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다.

중국에 얼마나 많은 탈북자들이 도망다니며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얼마전에 어린이들과 연약한 사람들이 대사관으로 뛰쳐 들어갔다. 공안과 경비를 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강제로 끌어 내려고 한다. 아이들은 울면서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고, 어머니들은 "사람살려"라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간절한 소리에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라는 절규에 분명한 대답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 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 컴퓨터 게임을 보라.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이 얼마나 많은가? 요즈음에 흥행하는 영화를 보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보다는 폭력과 살인이 얼마나 많은가? 폭력성이 강한 인터텟 게임에 중독된 중학생이 동생을 죽였다. 잠자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살인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전혀 죄의식이 없다. 그 중학생의 가치관은 "생명의 파멸"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자기 소개 란에 "군대에 갔다와서 살인을 마음껏 해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래희망은 청부살인업자이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사람을 죽이는 컴퓨터 게임을 많이 하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세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전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너희를 살려 주리라. 내가 너희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희를 붙잡아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서 살 길이 열려지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예수님을 등지지 말고 예수님을 향하면 된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한 부자이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에게 돌아올 재산을 주십시오.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그러나 아들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조른다.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돌아갈 몫을 준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몫을 챙겨서 서울로 올라온다. 돈이 많이 있으니 가는 곳 마다 이 아들을 환영해 준다. 친구들을 만나면 돈이 있다고 친구들이 매일 같이 만나주고, 돈이 많으니 술집에 가도 술집에서 환영해 주고, 노름하는 곳에 가도 친구들이 환영해 준다. 춤을 추는 곳에 가도 돈이 많기에 이 아들을 환영해 준다. 아버지도 잊어버리고, 식구도 잊어 버리고, 오직 주머니에 든 돈만 의지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쓰다보니 갖고 있던 현찰을 모두 사용하고, 이제는 크레딭 카드까지 이것 저것 대책도 없이 마구 사용하게 된다. 결국에는 이 카드 빚도 갚지 못하고 파산하게 되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이제는 어디에서도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다. 돈이 떨어진 것을 아는 친구들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슬슬 피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주 가던 술 집에서도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아는 척하지도 않는다. 어디에 가서 커피 한잔도 사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밤이 되면 쓸쓸한 기차역에서 신문을 덮고 잘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고향에 있는 자기의 집이 생각났다. 내가 이곳에서 죽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되겠구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먹을 양식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데 내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야만 하는가? 이 아들이 생각을 고쳐먹고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고향 땅에 내렸다. 어떻게 아버지를 뵈올 수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집을 향하는데 왠 일인가? 아버지가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에는 사업해서 성공자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큰 소리치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에는 이렇게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신다.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아버지는 눈물 흘려 하나님께 감사한다. "품에 안긴 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를 받아 주세요" 아버지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를 만나려면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를 받아 주세요"라고 고백할 때에 아버지를 만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 데로 살았던 것,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것, 미워하며 살았던 것, 이러한 점을 잘못했으니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회개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이렇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조건이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믿음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의지할 때에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당시에 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려고 결심하셨다. 그런데 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물로 심판하려 하니 배를 지어라. 그 배에 들어가는 자는 살게 된다. 이 말씀을 노아에게 하셨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대로 배를 짓는다. 주변의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무슨 배를 짓느냐?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인데 무슨 배를 짓느냐?" 주변의 친구들이 놀린다. 그러나 노아는 친구들의 놀림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배를 짓는다. 배가 완성되었을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노아가 지은 배 속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들은 모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노아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노아와 노아의 가정에 살 길이 열렸다. 만약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배 짓는 일을 그만 두었으면 역시 노아의 가족도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렇게 살 길이 열린다.

<죽음, 가장 큰 선물>을 쓴 헨리 나웬은 그 책 속에서 공중 곡예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커스단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공중곡예이다. 대개 한 사람이 공중사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또 한 사람이 이 사다리 저 사다리를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때마다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공중 나는 사람을 잡아 준다. 우리가 보면 그 날아다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하는 역할은 그네에 매달려 있는 상대방이 자신을 받아 줄 줄로 믿고 날아가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저 상대가 나를 잡아 줄줄로 믿고 날아가야 한다. 나웬은 우리의 죽음이 그와 같다고 말한다. 이 세상을 다 산 뒤에 "아버지, 제가 갑니다"하고 두 손 들고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를 그 영원한 손으로 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신껏 살다가, 주님 부르시는 날 살아 있는 가족들과 웃으며 작별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신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인 권력을 의지하고 산다. 그러나 이것도 의지할 것이 되지 못한다. 1841년 미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눈 내리는 겨울날 코트도 입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대통령 취임연설을 2시간동안 계속해 그때 걸린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 한달 뒤 사망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곳에 살 길이 열린다. 내가 이제부터는 주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당신에게 영원히 살 길이 열릴 줄로 믿는다.

내가 오늘 예수 믿고 예수 의지하면 나에게 이미 살 길이 열려 있음을 확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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