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16-24)

  • 잡초 잡초
  • 1007
  • 0

첨부 1


- 설교 : 한대근 목사 (송악교회)

성경에는 천국의 비밀을 보화가 숨겨진 밭을 발견한 기쁨, 값진 진주를 얻은 기쁨 등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이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천국을 발견한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로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기쁨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발견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믿는 삶이란 참으로 기쁘고 유쾌한 삶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은 어떤 환경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축복으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기쁨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참된 행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의 근원이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던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우주는 혼돈과 공허함만 가득했었습니다. 전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우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해야 할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하늘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삶의 동기입니다. 저 역시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항상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에 “나는 근심이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쓰고 다닙니다. 그만큼 세상을 살기가 어렵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환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환경이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를 차지하며, 물질이 많아지면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성취한 사람들은 기쁨이 지위나 권세, 물질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 민족이 이 땅에 국가의 형태를 이룬 이래로 이처럼 풍족하고 넉넉하게 살고 있는 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중국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를 배우려하고 부러워하는 시대입니다. 자동차 보유비율, 핸드폰 사용, 인터넷 사용 등 세계를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의 보는 시각이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 안에서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과연 얼마나 높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리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러면서 세계 최빈국 방글라데시 사람들보다도 행복지수는 낮습니다. 점점 자살률이 높아가고 이혼율이 급증하며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과 기쁨은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기쁨은 내면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모아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다가 막상 그것이 현실로 돌아올 때면 잠시의 행복을 느꼈을 뿐, 다시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보다 높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꿈에 부푼 사람이 진급을 거듭하면서 고위직에 오르게 되어도 어느 한 순간 깨닫는 것은 인생의 공허함입니다. 사람들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한 가지 문제 뒤에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환경을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대신 우리들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께 온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기쁨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의 삶에 기쁨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기쁨을 공급하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0절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따라 해봅시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아멘, 여기 근심이라는 단어는 슬픔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슬픔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읽어도 됩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고별설교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잠시 후에 헤어지게 될 것이고 또 잠시 후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것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상은 기뻐서 날뛰게 될 것이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는 여인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낳는 순간에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고통이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그 두려움, 불안, 고통은 씻은 듯 사라지고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느끼는 기쁨이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근심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슬픔이 많이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팔려갔던 요셉을 만난 후에 바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라고 토로했습니다. 모세 또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탄식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인정하는 솔로몬의 영화에 대해서 솔로몬 자신은 자신의 인생이 헛되고 바람 잡는 것에 불과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근심과 슬픔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 물어보면 기쁨과 즐거운 날과 슬프고 근심된 날 중에 어떤 날이 많았는지 물어보면 100이면 100, 다 슬프고 근심된 날이 더 많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근심과 슬픔을 안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근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과 슬픔을 아십니다. 그러나 아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에 절망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근심과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 기쁨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그 어떤 종류의 근심이나 슬픔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근심과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 기쁨이 온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 대표적으로 몇 군데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30장 5절,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통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16장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이사야 61장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모든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께는 우리가 불행해지지 않고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커다란 소원이 있다. 그 하나님이 자비와 선하심으로 우리를 그 상태로 데려가신다.”고 역설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런 하나님의 소원을 담아서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과 근심과 슬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근심을 벗기고 슬픔을 바꾸어 기쁨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슬픔을 근심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십니까?

22절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이 조만간 기뻐할 수 있는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과 좌절과 슬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과 좌절과 슬픔을 소멸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다시는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과 좌절과 슬픔으로부터 승리하였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이름의 능력으로 승리와 기쁨의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승리의 노래를 외치며, 기쁨의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죽음의 공포와 극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을 노래하며 행복해했습니다. 빌립보서는 이러한 바울의 면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바위를 뚫어 만든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습한 추위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고 일어나서도 한기가 풀리지 않아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을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이 확정되면 죽을지, 아니면 무죄로 석방이 될지, 아니면 몇 년을 그곳에서 더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기쁨이 될 만한 조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기뻐할만한 여력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기뻐하라”는 단어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이제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환경도 바울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근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지난날의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모든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이제 예수님을 만난 기쁨에서 더 나아가서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그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23,4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아멘,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우리는 그 분의 피조물입니다. 그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피조물 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모든 근심과 슬픔은 기쁨과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천하 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름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면서 마음껏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세상의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과 슬픔을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의 기쁨을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근심거리, 문제꺼리, 염려거리는 모두 기도거리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체를 보는 것은 흰자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검은자를 통해서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눈의 검은 부분을 통해서 물체를 바라보며 식별하도록 만드셨을까? 이에 대해서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의 인생이 어둡고, 현실이 눈동자 같이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문제와 근심거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위대한 유산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사용하여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구한 모든 염려와 근심과 슬픔이 간증거리로 바뀌어 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오리로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서 응답을 받음으로 모든 근심과 슬픔을 날려버리고 하늘의 기쁨을 충만하게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유명한 성도인 워치만 니(Wachman Nee)가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떤 마을에 예수를 믿는 한 성도가 살았는데 그의 논에는 항상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마침 심한 가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밤새에 자기의 논에 고여있던 물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에서 자기 논의 물을 밤새도록 빼내어 간 것입니다. 그 성도는 그 물이 자기 논에 고여 있던 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물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이웃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왜 당신은 나의 논에 고여 있던 내 물을 다 빼내어 갔습니까?"
그의 주장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이웃은 못내 사과를 하며 빼내어 갔던 물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논에 나가보니 물은 또 다 빠져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웃을 찾아가 다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성도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여 물을 찾아왔는데도 마음이 도대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까?"
그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나는 네가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 그렇다면 도대체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너도 그 사람을 대하여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의미를 몰라 여러 번 계속 물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일찍 나가서 이웃사람이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 논의 물을 이웃의 논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