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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농사 ①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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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설교내용  우리나라 말에 ‘자식농사가 가장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고 자녀를 돌보는 이것이 가장 신중한 일이고 소중하지만 또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 사랑합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 탈이 날 때도 있습니다. 부모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때때로 해가 되는 결과를 빚는 현상도 보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이 본능적이고 감정적이고 너무 충동적인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 부모님들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무거운 그런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떠나보내야 할 자식

  우리는 부모로서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근간에 와서 우리들의 환경은 부모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도전을 주는 여건들이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변해야 되고, 부모의 사고의 발상이 변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그런 측면에서 여러 가지 도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모라고 하는 이 자리, 이 권위, 이 부모됨 가지고 부모는 절대권을 누리고 왔습니다. 내가 네 부모인데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또 자녀들도 그런 윤리가정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부모님인데 내가 참아야지, 부모님인데 존경해야지 하는 이것은 전통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관습이고 또 당연한 윤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고 변화무쌍한 이런 변화가 오다 보니까 이제 부모도 그 고유한 자리에서 변신을 해야 되고 부모가 갖고 있는 그 고집스러운 윤리가 도전을 받는 이런 자리로까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근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설문통계라든지, 사회반향을 보면 그런 것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고 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간단한 성구지만 매우 소중한 가정체계와 윤리를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는 삶의 변화가 옵니다.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라는 이 측면은 당사자들의 문제이고 “부모를 떠나”는 이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들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는 시기가 오고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부모자식 간의 창조적인 관계에서 우리가 부모를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평생 자식을 품고 사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평생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이건 서로가 불행한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의 유아적 고백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결혼하여 29살에 첫 딸애를 얻었다. 산모가 14시간 산고 끝에 얻은 생명이라 너무나 귀했다. 내 나이 37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우등상장을 보며 자랑할 때는 참 자랑스럽고 감격했다. 내 나이 48세에 딸애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 조마조마한 입시의 순간 공부하며 자라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53살에 딸애가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사왔을 때 ‘쓸데없이 돈 쓴다’고 한 마디 했지만 나는 밤새 아무도 모르게 입어보고 좋아했다. 내 나이 61살 때 딸애는 결혼을 했다. 웃음이 넘치는 잔치였고 다 좋았지만 사위를 보니 사랑스러우면서도 도둑놈처럼 여겨졌다. 딸 도둑놈! 딸이 시집가는 날, 내 눈앞에서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모든 아버지가 느끼는 부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야 되는 존재입니다. 이 의미를 잘 이해해야 됩니다. 이것은 관계를 단절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영광을 품고 있어도 안 되고 자식이 주는 상처를 품고 있어도 안 됩니다. 자식이 누리는 그 행복을 부모가 가로채서 부모가 가지고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행복은 자식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부모들은 자식의 행복도 끈끈하게 움켜쥐고 있고, 자식의 불행도 부둥켜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식은 미래가 있다

  식목일에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나무는 묘판에 있는 그대로 거름주고 키우면 안 됩니다. 애처롭지만 묘목을 뽑아서 필요없는 잔뿌리들을 자르고 위의 가지도 필요없는 가지는 잘라서 매정하지만 낯선 곳에 외롭게 심어줘야 됩니다. 묘판에 보기 좋다고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뽑아서 심어야 그 나무가 장래가 있습니다. 고추나 오이나 토마토나 상추나 모든 채소도 이식을 해야 됩니다. 그대로 심어서는 안 됩니다. 뽑아줘야 됩니다. 우리의 자식들도 인생에 있어서 부모의 묘판을 떠나는 이식이 일어나야 됩니다. 또 그것을 부모가 잘 해주어야 합니다. ‘너는 내 묘판 안에서 영구히 나와 같이 살고 지고 하자’가 아닙니다. 그만큼 자식들은 성숙해가고, 그들의 삶이 있고, 그들의 의미가 있고, 그들과 부모와의 새로운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부모를 떠난다는 이 관점에서 부모의 자식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와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두 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형이 동생보고 “얘, 얼마 전에 내 여자친구 생일이라 내가 꽃다발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여자친구 생기면 그렇게 해봐.” 형제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아버지가 들은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들이 내 생일 때는 꽃다발은 커녕 전화도 안 하는 놈들이 뭐 어째! 여자친구한테 꽃다발을 보냈다고?’ 이 아버지는 섭섭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품고 며칠 지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거꾸로 된다면 더 큰 문제겠다 싶더랍니다. 자기 생일 때는 꽃다발을 보내주고, 여자친구 생일 때는 아무것도 안 해주고 전화도 안 하면 더 심각한 문제겠다 싶더랍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보니까 ‘아, 그놈들이 가지는 생각이 옳은 것이구나, 그게 바로 되가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없더랍니다.

  여러분,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국 부모들의 자식사랑은 어느 나라에도 경쟁력이 우위에 있을 만큼 탁월합니다. 이것은 공인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데도 많은 경우에 자식농사가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농사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되 사랑하는 자세가 발라야 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더라도 자세를 바르게 해야 됩니다. 그 자세가 비뚤어지면 자식농사가 그르칩니다.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버릇없는 자식, 버릇없는 부모

  우리는 쉽게 “자식들이 버릇없다”고 말을 합니다. 버릇없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된 분들이 듣기에 매우 부담스럽겠지만 저는 이 말을 또 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버릇없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잘못되어 있는 부모도 많습니다. 부모의 권위와 위상을 잃어버린, 부모의 덕과 존경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식이 농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농부 밑에서 좋은 농사가 되듯이, 좋은 스승 밑에서 좋은 제자가 양육되듯이,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식이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무기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무기는 굉장히 강력합니다. 자식들이 꼼짝 못하는 무기입니다. 무엇입니까? “야, 내가 너를 낳았고 먹였고 입혔고 교육시켰고 장가보냈고 시집보냈고 집 사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큰집 평수 넓힐 때 내가 돈 내줬고…”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들 앞에 해준 것 가지고 자식들로 하여금 한 마디도 못하게 합니다. “뭐 어째?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소리를 해?” 이렇게 나옵니다. 그 말 앞에 자식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부모들이 그렇게 다가가는 농사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항상 설교했고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지만 그 본 의미를 깊이 새긴 것은 근간입니다. 요즘 수년 동안에 이 자식들이 다 부모 곁을 떠나고 있는 이 기간 동안에 이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우리 부모는 자식이 상입니다. 언필칭 우리는 “내가 먹였고 입혔고 교육시켰고…” 이렇게 나오는데 거꾸로 보셔야 됩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상입니다. 상은 명예가 있고, 영광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상을 하나 잘 받으면 그 상이 평생을 명예롭게 합니다. 상이 아주 중요합니다. 적어도 이력서에 국민훈장 동백장 정도 받으면 그 사람의 덕망은 어디를 가도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상입니다. 그렇게 부모한테 주는 게 많은 존재인데도 ‘네가 나한테 뭐 해줬어? 나는 너 먹였고 입혔고 교육시켰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은 우리에게 상입니다. 자식보다 귀한 상이 없습니다. 사실 여기 부모 되신 분들 그 자식 때문에 사는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잖아요? 일방적으로 ‘나는 네게 희생만 했다’ 그게 아닙니다. 자식이 상입니다. 자식이 기업입니다. 기업은 재산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발상의 전환이 되는 근거를 드리고자 하는 게 이 대목입니다.

  부모의 발상전환

  우리가 흔히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면서도 ‘이거는 내 돈을 너 한테 주는 거야.’ 교육비를 주면서도 학교등록을 시키면서도 ‘이거는 내가 내 돈으로 등록시키는 거야.’ 이런 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먹였고, 입혔고, 교육시켰다고 윽박지르는 여기에는 부모가 내 돈 가지고 너를 그렇게 했다는 말인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자식은 여호와가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의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네 명이면 여러분 집의 재산을 사등분 하십시오. 가치관에 있어서 사등분을 하라는 말입니다. 가족이 여섯 명이면 육등분 하고 부부가 살면 반으로 나누십시오. 자식이 둘이면 등록금을 줄 때나 옷을 사 입힐 때나 용돈을 줄 때에 사등분 가운데 ‘네 몫을 네가 쓴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십시오. 왜 그것이 내 돈입니까? 그 애의 몫입니다. 그 애의 지분이 우리 집에서 사분의 일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우리 집의 기업입니다. 재산입니다. 자식에게 용돈 주면서 내 돈 준다고 하는 그 부모의 의식에 어떤 오류가 있느냐 하면 용돈보다 자식이 못합니까? 용돈 주면서 애를 윽박지르고 상처 내는 아버지의 그 말속에는 그 순간에는 ‘네 놈은 내 용돈 값도 못하는 놈이라’는 저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은 우리 집의 재산입니다. 자기 분깃, 자기 몫을 쓰고 사는 것이지 부모가 먹이고 입혀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애를 우리 집에 보내었으면 제 몫을 가지고 우리 집에 보내준 것입니다. 아이가 나는 그 순간부터 재산분할을 하십시오. 우유하나 사 먹이는 것도 제 것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도 부모가 자식을 잘못 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앙케이트를 보니까 부모를 미워하는 청소년들이 20%라고 합니다. 이 수치가  오차가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들은 들어야 될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 부모를 좋아하지 않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자녀들의 의견을 무시한 부모의 강압적인 결혼, 적성과 특기를 무시하고 부모가 진로를 강압적으로 결정하는 대학입시, 잘못된 것을 보고도 시정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는 자세, 칭찬과 격려보다 언제나 잔소리와 비난으로 대하는 부모, 공동체 생활의 경험은 거부하고 늘 혼자만 있도록 하는 일, 이것은 혼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사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들 하고 어울리는 일에 부모가 관심을 써야 됩니다. 캠핑도 보내보고 사람들과 뒹구는 경험을 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안 하면 애가 자라서 문제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폭력이나 비행을 통해 자녀의 정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잘난 형제 때문에 동생이나 형이 상처받는 것입니다. 형이 너무 잘 나도 부모가 편애를 하게 됩니다. 동생이 너무 특출해도 부모가 편애를 하게 됩니다. 부모는 차별을 안 하지만 자기들이 볼 때 부모가 차별한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격적으로 부모가 우리를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 우리보다 훨씬 민감하고,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할 일 했고 할 말을 했는데도 자녀들은 그것이 상처가 되고 부모답지 못한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양반사회에서는 부모라 하면 자식이 할 말이 없습니다. 요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수수께끼의 새로운 해석

  수수께끼 하나 풀어 봅시다. 아내와 어머니가 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 밖에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누구를 구해주어야 되겠는가? 옛 어른들은 마땅히 어머니를 구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의 효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정윤리입니다. 주자학이나 성리학에 근거한 동양의 가정윤리는 부모우선입니다. 이것은 재론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를 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이 옳고 그르다는 거기에 답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 그 의견에 다른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하는 이것이 기준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우리가 이와 같은 가정윤리에 대해서도 역 발상을 좀 해보자는 것입니다. 역 발상, 더 좋은 길이 없는가? 만에 하나, 우리가 그런 상황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부모된 우리들은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얘야, 네 아내를 구해라. 그것이 절대로 나에 대한 불효가 아니다.” 부모님 여러분, 이의가 있습니까? ‘무슨 소리, 부부는 헤어지면 남인데 당연히 엄마를 구해야지’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동양의 윤리가 왜 어머니를 구해야 된다고 하느냐면 아내는 다시 구하면 되지만 어머니는 한번 잃으면 다시 구할 수 없는 윤리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전통적인 윤리관에 저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왜 부모가 “얘야, 네 아내를 구하라”는 이 말이 되느냐,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제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제 마누라입니다. 며느리를 보면 밉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는 며느리지만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며느리입니다. 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들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 며느리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극진합니다. 나도 이 철없는 손녀가 하나 있는데 전화를 자주 안 하니까 섭섭합니다. 그만큼 귀엽습니다. 그렇게 귀여운 손주들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 내 손주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내가 아니고 바로 며느리 아니냐는 말입니다.

  거꾸로 엄마를 구했다고 가정합시다. 엄마만 구하고 마누라는 죽었습니다. 아들이 마누라를 잃고 난 후에 절망을 하고 술을 먹고 탄식하는 그 모습을 보는 그 에미가 행복합니까? 에미없는 손주가 엄마 때문에 울고, 보채는 그 손주를 달래는 할머니가 행복하냐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TV에 방영된 스토리가 하나 있습니다. 산촌에서 할머니가 부모없는 손주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내뱉는 말 한마디는 한 맺힌 이야기입니다. “내가 벌써 죽어야 되는데 얘들 때문에 눈을 못 감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얘들을 돌 볼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라도 살아서 에미없는 손주를 키우는 그게 할머니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그 순간에 “네 아내를 구하라.” 이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실력이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여유가 없으니까, 실력이 없으니까 “무슨 소리냐 에미를 구해야지. 부모보다 더 귀한 존재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다. 부모보다 더 귀한 존재는 바로 그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자식에게, 며느리가 그 손주에게 귀한 존재입니다. 저가 하는 이 이야기에도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토론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오늘 저의 설교의 초점은 부모된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무언가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되고, 부모라고 하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보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발상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를 했습니다.

  더 성숙한 부모가 되자

  첫째로 우리 부모들은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겸손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부모니까 당당하다든지, 내가 부몬데 네가 무슨 이의가 되나 그게 아닙니다. 자식을 볼 때마다 ‘그래, 내가 부모로서 미달되는 게 많아. 네가 좀 더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더 잘 될텐데’ 라는 기본적인 겸손을 가진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라고 하는 그 사실만 가지고 자식들 앞에 너무나 오만한 부모들이 많습니다.

  두 번째는 부모가 실수를 은폐하지 말고 자식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부모의 실수 때문에 상처를 안고 사는 자식들은 너무나 불행한 자식들입니다. 부모도 실수합니다. 요즘 아버지들의 실수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실수가 많습니다. 도저히 자식들이 보아서는 안 될 아버지들의 실수가 있고 엄마의 실수가 있습니다. 그런 실수를 은폐하는 게 부모들입니다. ‘자식들이니까 이해해 주겠지’ 그게 아닙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용서하고 살아야 자식이 행복한 것입니다. 부모가 용서해줄 자식도 많지만 자식에게 용서받아야 될 부모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 번째는 매를 들고 꾸짖더라도 인격을 손상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매를 들더라도 이슈를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사건, 행실을 말하는데 자식이 행실이 나쁘면 그 행실 때문에 매를 들어야 합니다. 그 행실에다 매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지가 못합니다. 인격부터 손상을 줍니다. 자식이 혹 못된 짓을 했더라도 인격부터 먼저 건드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합니다. “야, 이놈아 너 같은 놈은 희망이 없어. 우리 가문에 너 같은 놈은 난 적이 없어. 너 뉘 자식이야” 하고 온갖 소리를 다 합니다. 그래놓고는 이제 행실을 따집니다. 미국이나 서양에는 체벌이 없습니다. 교육현장에서 체벌을 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체벌이 있습니다. 체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체벌이 있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초달이란 말은 매질을 말합니다. 매질을 해야 될 때 매질을 못하면 애를 버린다는 말이 잠언에 나옵니다. 매질 자체는 그 매질을 받아야 될 행실이 있을 때는 매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매질을 인격에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꾸짖더라도 인격은 위로를 해주어야 합니다. 사건을 꾸짖되, 행실을 꾸짖되 인격을 건드리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도전 앞에 사는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기성세대들이야 어떤 면에서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고민도 적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우리 자식세대들은 안 그렇습니다. 엄청난 도전 앞에 있습니다.

  위험수위의 환경 속에서

  요즘 나오는 여러 자료를 보는 중에 우리 나라가 모든 면에서 위험수위에 있다는 평가를 보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부정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아직도 기회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안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위험수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첫째는 에이즈입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다수국가들은 지금 에이즈 때문에 국가자체가 몰락하고 있습니다. 심각합니다. 에이즈에 안 걸린 국민을 찾아내는게 더 어려운데 앞으로 20년만 흘러가면 그 민족자체 생존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마약 때문에 지금 흔들리는 나라가 많습니다. 특히 중남미의 과테말라 등은 지금 마약 때문에 나라의 존폐가 달려있습니다. 성 범죄 때문에 가정이 망가지고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동성연애가 지금 막 확산되어 나가는 엄청난 파멸로 치닫고 있는 나라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마약이나 에이즈나 동성연애나 성범죄나 자살이나 기타 이런 것들이 아직 파멸까지는 안 가도 위험수위에 지금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 위험수위를 넘어서버리면 사회도 지금 걷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라와 사회가 파멸될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수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지금 그런 환경에서 큽니다. 가정폭력, 학교폭력이 점점 더 해갑니다.

  얼마 전에 장애인의 날이 지났는데 한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너무 걱정스럽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이렇게 급속도로 많이 발생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종 사고, 각종 질병 등 장애인들이 너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몸을 가지고 나와서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저도 차 운전하면서 결정적으로 사고 두 번은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았으면 내가 장애인이 되든지, 목숨을 잃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아찔합니다. 차가 돌진을 했는데 서고 보니까 바로 옆에 바위가 있었습니다. 바위를 바로 받았으면 저는 끝이 났을 것입니다. 바위를 피해서 풀 속으로 차가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면 우리도 도저히 설 수가 없습니다. 이런 위험 수위의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 이상한 문제도 있습니다.

  또 얼마 전 통계인데 우리 청소년들이 자기 얼굴에 불만을 품는 아이가 78%라고 합니다. 자기 용모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되고 열등의식이 되고 정신병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대생들 가운데 여건이 되면 성형수술을 할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65%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여건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요즘시대에 한 군데쯤 손보는 게 뭐 그리 못할 일입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아도 안되고 그것을 너무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65%의 여대생들이 기회만 오면 댕기고 늘리고 줄이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우리 애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애들은 그 통계는 예외다’ 안 그렇습니다. 얼짱, 몸짱 신드롬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영향이 있는 직접적인 문화입니다. 저 같은 세대는 얼짱, 몸짱이 무슨 영향이 있습니까? 생긴대로 살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얼짱을 보면 지금 열광을 합니다. 병을 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형수술 시장이 7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성형수술의 기술을 배우려고 오는 중국의사들이 연수받으러 오는 나라입니다. 성형외과 의사가 되면 이 시대 최고의 의사입니다. 그런 문화가 지금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청소년 범죄가 14만 건, 강력 범죄가 14살 이하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강력 범죄가 어른들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14살 이하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부모된 우리들이 모든 책임을 가져야 됩니다. 북한 용천에 폭발사고로 인한 부상자중 60%가 어린이인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른의 잘못입니다. 어린이들을 향한, 우리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책임은 새롭게 조명을 해야 되는 이 시대의 도전입니다. 부모된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사랑하는 자세를 한번 가다듬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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