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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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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광일 목사 (벧엘감리교회)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문창모장로는 의료계는 물론 교육계, 정치계, 종교계 등 각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96세를 사시면서 강원도 원주에서 문 이비인후과를 개원해 43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진료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료하실 때마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셨답니다. 국회의원 재직시에는 서울에서 원주가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회 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려와서 진료를 하셨답니다. 그는 돌아가기 얼마 전까지 진료를 하였는데, 시골에서 일 때문에 낮에 시간 내기가 힘든 환자들을 위하여 매일 아침 6시30분에 어김없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장로님, 은퇴하실 때가 훨씬 지났는데 진료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좀 쉬셔도 되지 않습니까?" 물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의사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눈감는 순간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더랍니다. 의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명이고 그 사명 감당하려고 9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료를 꾸준히 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환경과 조건을 살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계십니까? 역사적으로 큰 일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확고한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면 사명감이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실적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3년에 걸친 에베소 전도를 마지막으로 소아시아 전도를 마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은 그의 종말을 내다보는 비장한 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소아시아의 마지막 거점인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의미심장한 고별 설교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자신에게는“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의 삶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7에 보면,“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울이 믿음으로 자기의 갈 길을 잘 마쳤다고 피력한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지도자들과 교사들을 위한 주일로 지킵니다. 교사들은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크든 작든 다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에서 맡겨진 어떤 일이든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후로 예수께 사명 받은 자로 합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첫째로 눈물로 훈계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명하고 덕이 있는 훌륭한 선생이 있었습니다. 불량한 아들을 둔 부모가 찾아와 아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마을로 내려온 선생님은 그 집에서 불량한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아들은 유명한 선생님이 왔다는 말에 며칠 동안은 얌전히 굴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는 여전히 불량하고 못된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선생님은 꾸짖지도 않았고, 교육적인 어떤 말도 하지 않아 아들의 부모는 낙심에 빠졌습니다. 선생님과의 약속기간이 3개월만 같이 있기로 하여 3개월이 지나자 선생님은 약속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못된 아들은 훌륭한 선생이 오면 자신이 무척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방에서 나와 불량한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의 신발을 신기고 신 끈을 매었습니다. 그 순간 신 끈을 매는 아들의 손등에 뜨거운 것이 떨어집니다.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니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들은 목이 메이면서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고 말았습니다. 3개월 동안 한마디의 꾸지람도 어떤 말씀도 하지 않은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흘린 그 눈물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불량한 아들은 선생님의 눈물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눈물의 훈계가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눈물은 거짓이 없습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할 때는 억울한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는 속상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사랑할 때는 사랑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인 하나 하나를 위해서 밤낮으로 삼 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믿음을 심어주었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내가 흘린 그 눈물을 헛되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눈물의 생활은 진실한 삶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눈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피로 세워진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눈물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자라게 하는 영양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교사, 눈물을 흘리는 임원,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예수께 사명을 받은 자들은 눈물로 영혼을 가르칩니다. 눈물로 영혼을 훈계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진정한 사명자의 눈물을 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이후로 눈물로 주 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교사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심령이 주께 매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코카콜라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미국의 외교관은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어도 코카콜라는 전 세계에 안 들어간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세계적인 기업이 된 이유는 이 회사의 사장 때문입니다. 그는 코카콜라 판매에 완전히 목숨을 걸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늘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을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성공의 비밀을 묻는 기자들에게.“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사람들을 콜라 없이는 못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열정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 24절에서“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고후 5장 13절에서는,“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의 "심령에 매임 바 되어”라는 말은 원어로“데데메노스 에고 토 프뉴마티”로서“성령에 붙잡혀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행이 평탄한 길이 아니고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인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겠노라" 하며 예루살렘행을 결단합니다. 바울의 마음을 매고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매이면 소명이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환경이 좋으면 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핍박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면 복음을 위해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도 불타 오르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령에 매인 바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의식에 불타오르기 바랍니다. 소명의 사람들은 조롱이나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절대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심령이 주 예수께 매인 바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께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1945년 4월 8일 주일아침에 본훼퍼 목사는 사형장으로 끌려나가게 됩니다. 그때 같이 있던 영국군 포로가, "목사님,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본훼퍼 목사님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감옥생활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유 생활이 시작됩니다. 세상 고통스러운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깨끗하게 헌신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주께 바치면서 살아가는 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 자기를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자신을 주님의 소유로 드리며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는 뜻입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에“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며 있는 힘을 쏟아 부을 만큼 예수께 목숨을 걸고 사십니까? 주께 목숨을 드릴만큼 힘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레에게 "오늘밤 열두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웨슬레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 준비하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심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에 들 것입니다."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며 그리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지 않고 30분 먼저 잠들 것이란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자의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의 모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와 교사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일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물과 소명과 헌신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상급받는 교사들과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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