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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아이 (왕상 4:4~10, 마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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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어린이들이 예수님처럼 총명하고 사랑스럽고, 사무엘처럼 신실하고, 다윗처럼 용맹스럽고,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인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32세에 그는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총애하던 신하 장군들에게 땅을 나눠주기로 하였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를 이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의 신하 가운데 리시마쿠스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총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왕으로부터 유업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왕은 “리시마쿠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느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대왕은 리시마쿠스가 작은 것 하나 쯤 구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소아시아를 제게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대왕은 “리시마쿠스,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소아시아를 줄줄 믿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 대왕은 “그렇다면 내가 소아시아를 그대에게 주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순박하고, 어린이 같은 마음이 소아시아를 얻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모르기에 용감합니다. 아이들은 용감하기에 얻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판단해가며 달라고 합니까? 그냥 필요하면 달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달라고 울어댑니다. 부모는 다 줄줄 알고 보채고 웁니다. 그러면 얻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특징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린 다음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그 때 솔로몬은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하고 이 많은 백성을 다스릴 수 있으니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적중하는 기도였습니다. 가장 작은 것을 구한 것 같지만 가장 큰 것을 구한 것입니다. 지혜는 소아시아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달라는 것은 온 천하를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욕심이 없습니다. 순수하고 진실합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교만이나 모략이 없습니다. 시기나 질투가 없습니다. 이런 어린이 같은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아이 솔로몬은 결국 나라를 다스립니다. 가장 부요합니다. 가장 호화로운 나라를 건설합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소아시아도, 지혜도 얻습니다.
  왜 요즘 가정에 문제가 많습니까? 어린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애들도 어른 같아요. 애들은 애들 같아야 되는데 애들이 어른 같으니 문제입니다. 어른만 살면 거기에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요즘 세상에 문제가 많습니까? 어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핵가족 제도가 주는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없으니 서로를 몰라라 합니다. 어른도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를 무시하고, 젊은이들은 어른을 몰라봅니다.
  어린이가 없는 세상은 사막입니다. 황사가 휘몰아치는 벌판입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있어야 좋은 가정인데 좋은 가정보다 편리한 가정으로 변질됩니다.

  어린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아십니까? 어린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어린 요셉에게 꿈을 보이십니다. 어린 다윗이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한 소년이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린이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작은 아이를 생각해보고 우리의 어린이들이 축복의 어린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작은 아이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6절에는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라고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 우리 아이들도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재물이 있고 명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물려줘도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요한복음 1:14에는 예수님의 탄생 때의 기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 충만한 것이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와 진리만 충만하면 끝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은혜가 있어야 진리가 충만합니다. 지식과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은혜가 없으면 항상 모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16에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합니다. 은혜가 곱으로 내립니다. 은혜는 아무리 많이 받아도 과함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은혜를 곱으로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은혜가 필요하고, 아이들은 그 자체가 은혜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모든 아이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품고 탄생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소망입니다. 우리 교회가 젊은이들이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나온 아기들 기도해주는 것도 제법 많아요. 또 아기 세례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소망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솔로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성경은 지적합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은혜를 받은 것은 다윗 덕분이었습니다. 아비 다윗이 성실하고, 공의롭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있고,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솔로몬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은혜받기 원합니까? 성실하십시오. 공의로우십시오. 정직한 마음을 가지세요. 주와 함께 하시요. 주의 앞에서 사십시오. 이렇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아이들이 은혜 받은 것은 부모의 덕입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은혜 받는 것은 교회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쪽박 차게 하지 마시고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은혜가 풍성하고,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작은 아이는 출입할 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7절입니다.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하고”라고 솔로몬은 말합니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출입할 줄 알지 못합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고 할 이 때 솔로몬이 20세 전후가 된 것으로 봅니다.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출입하다”란 말은 “야차 와보”란 히브리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나가고 들어오다”(go put and come in)는 뜻입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공적 활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성공적 임무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잘 해야 합니다. 자신이 들어갈 때를 알고 나올 때를 안다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공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들어갈 때 들어가고, 나갈 때 나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는 것이 성공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사람은 추해지고, 그 동안 쌓았던 공을 일순간에 다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예수님 성공비결은 타이밍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시간을 아주 적절하게 맞추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분명했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예수님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혼돈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이럼 스미스라는 분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성공한 기업가가 성공요인에 대한 질문에 멋지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잘된 결정 때문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누가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잘된 결정을 내렸는가?”라고 묻자 그는 “경험을 통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경험은 어떻게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잘못된 결정을 통해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공한 기업가이지만 그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 때나 날 때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아는 지혜를 주십니다.

  분명한 때와 장소를 아는 것은 신령한 경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삼손은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므로 그의 인생 실패가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므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들어갈 곳과 나갈 곳을 모르면 그 자체가 화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고 합니다. 그릇된 곳에 서지 않고 앉지 않는 것이 복이라 말입니다.
  때를 분별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경험 통하여 가능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도 하나님께 물어서 때와 장소를 알아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어느 때에 블레셋을 치러 갈까요?” 하나님은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가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또 물어봅니다. “여호와여, 어디로 갈까요?” 그 때 하나님은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물어보면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르쳐주십니다. 전도서 3:1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합니다. 때를 분별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의 말에는 부모님께는 나갈 때 문안하고, 들어와서는 절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가정교육이라고 봅니다.
  아이들에게 교회 출입도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출입을 잘 배운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습니다. 어린이를 죽이는 어린이를 미국 연방 수사국 ‘FBI’에서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런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교회에 거의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이런 아이들은 자주 비디오나 컴퓨터 게임을 통하여 표적을 향해 사격 연습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격 사건에 연루된 학생 가운데 한명은 한번도 총을 쏴본 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컴퓨터 게임을 통하여 총을 쏜 경험이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 교회 출입하는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가야 할 곳과 가야 할 때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정확한 때와 장소를 분별하는 것은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입니다.

셋째, 작은 아이는 지혜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9절은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주의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베드로전서 2:2에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꽃입니다. 어린이는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꽃은 원래의 창조대로 자신을 보존합니다. 분장이나, 화장이나, 변장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른들이 가지는 자기 과시나 과분한 욕심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잠언 8:1에는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지혜가 부를 때에 들을 수 있습니까? 이걸 들어야 참 지혜입니다. H. F. 아미엘이란 분은 “어린 아이들 틈에서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하늘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삶을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솔로몬과 같은 풍성한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하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주가를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지혜는 좋은 대학에 척척 붙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9:8에는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혜가 풍성 하여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아이들은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늘 만족합니다. 자신이 늘 행복합니다. 자신이 남에게 덕을 끼치는 아이입니다.

결론

  한 농부가 아들들을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이웃 농부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을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농부는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키우고 있소”라고 하였답니다. 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아이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책임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바르게 키웁시다. 분별력 있게 키웁시다. 확실하게 키웁시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 자녀가 되게 합시다.

  어떤 분은 “지금도 어린아이가 태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나은 우리 아이들이 되게 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임이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은혜 받게 하는 어른들이 됩시다. 우리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은혜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시다. 들어오고 나감을 아는 어린이로 양육합시다. 우리 아이들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가 있는 아이들로 키웁시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 시대에는 좀더 좋은 세상, 좀더 좋은 사회, 좀더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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