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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랑 되신 그리스도 (눅 5: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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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기쁜 것처럼 우리도 기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 시간에는 신앙 생활하는 기쁨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그가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예술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됩니다. 권력을 기뻐하며 추구하는 사람은 정치가가 됩니다.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큰 부자들을 보면 돈을 버는 것을 즐깁니다. 또 부모에게는 자녀가 그 기쁨의 첫째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자녀들만 보면 기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은 순간적이고, 상대적이며 현상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은 다음 순간에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사실 돈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을 좀 더 가짐으로 만족과 기쁨을 얻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찾아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사랑은 확실히 많은 경우에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주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고 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라고 슬프게 노래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쁨을 위해 자식을 키웁니다. 보통의 경우에 이들은 부모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또한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그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 자식 때문에 오늘도 밤잠을 편히 자지 못하는 부모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올만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세상의 모든 기쁨이 그렇습니다. 정말 세상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까? 정말 세상에서 영원히 만족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잠언 14장 13절에서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종종 많은 일들이 우리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건강이 무너질 때 기쁨을 빼앗깁니다. 남에게 비난을 받게 될 때 기쁨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오해를 받았을 때, 기쁨이 사라집니다. 내가 남과 비교당할 때 기쁨이 없어집니다.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을 때도 기쁨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 어느새 고통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절망의 늪에 빠져 헤메이게 됩니다.

우리가 기쁨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 중 두드러진 한 가지는 상대적인 빈곤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만족과 기쁨을 잃어 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만족하고 기쁘게 살 이유가 많이 있는데도, 옆에 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여유 있고 풍성하게 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만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자기 삶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자족하기를 배우도록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결코 기쁨과 감사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 주신 은혜를 만족하게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는 천국을 주어도 감격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세상에는 아무 것도 감사할 일이나 기뻐할 일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이 생각은 우리 삶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세상에 당연한 일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편 128편 2절에 행복한 삶의 첫 번째 요소가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손으로 수고하고 벌어들이는 것을 축복으로 감사하기 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단의 유혹입니다.

셋째로 우리 삶에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역시 고통입니다. 우리 삶에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괴로운 일입니다. 사람이 육신적이든 정신적이든 너무 고통을 당하면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욕심 많은 우리들은 돈이 많이 안 벌린다고 우울하고, 건강이 좀 나쁘다고 침통해 있습니다. 이웃간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가슴 속에 갈고리를 품고 있고, 부부 사이에 다소 말다툼을 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세상 되어져 가는 일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고, 지나친 염려 근심 걱정으로 찌들려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욕심 많은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서 기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을 억지로 기쁘게 할 수도 없고, 남을 강제로 기쁘게 해 줄 수도 없습니다. 기쁨은 내 밖의 어떤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의 한복판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진정 우리 인생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소유하면 내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인생의 참된 기쁨과 만족은 어디에서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의 것으로는 영원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세상의 것으로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로, 그것은 바로 구원이 주는 기쁨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기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구원이 그렇지 않습니까?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

우리는 이 구원이 주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원이 주는 기쁨과 감격을 늘 간직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이 구원이 주는 기쁨과 더불어 우리 신앙인들이 누리는 기쁨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이 예수님과 더불어 영적 교제를 누리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정말 성도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위대한 음악가인 하이든에게, 왜 당신의 음악은 그렇게 밝고 명랑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는 참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나는 명랑하고 춤추고 뛰는 듯한 악보를 펜으로 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주시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기쁜 마음인줄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기뻐하지만, 주님의 그 사랑을 기뻐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으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좋아하고, 주님의 도우심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면, 아이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돈 보다 부모님의 사랑이 더 귀합니다. 아빠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면 기뻐합니다. 어디 놀이터에 데리고 가 주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있어서 부모님의 사랑, 그 자체가 바로 기쁨의 근원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감을 늘 기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의 길을 동행하며 인도하며 보호하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친구로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느 선배 신앙인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분은 불행히도 오랫동안 일제의 통치 밑에서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 생활에 지쳐서 이제 몸도 너무 피곤하고,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점점 식어갑니다. 조국 광복에 대한 확신도 멀어져 갑니다.

얼마나 힘들던지 이제 도저히 하루도 더 살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천근만큼 무겁고, 사방이 캄캄해지는 가운데,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 말씀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고 계신데, 내가 이것을 몰랐다니, 내 믿음이 잠시 이렇게 흔들렸다니, 하면서 통회 자복하고,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확신하면서 담대히 믿음으로 이겨 나가는 가운데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삶이 너무 어렵습니까? 인생이 너무 힘듭니까?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까? 아무도 나의 이 고독과 고난을 알아주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영혼 깊은 곳의 간구와 호소까지 다 아시고, 내 인생의 앞날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해 주시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의 길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이 확신, 이 믿음을 안고 살 때 얼마든지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내 자신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다 금식하는데, 어찌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금식을 통해 자기를 억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힘쓰는 것은 경건한 신앙의 자세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는 금식이 하나의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들이 신앙생활의 내용입니다. 금식하는 분들이 더러 계시지만, 이 금식이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종교 의식은 아닙니다.

유대 종교의 세 가지 미덕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인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합니다. 금식을 하되 하루 종일 굶는 것은 물론이요, 물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미덕인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천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째 당신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기쁨을 위해 부름 받은 무리라는 사실입니다. 금식하고, 슬퍼하고 어둡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니라, 용서받고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면서 기뻐하기 위해 성도는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란 신랑, 신부와 함께 일주일 내내 혼인 잔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예식은 오늘 우리 한국 사회의 예식과는 다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신랑 신부가 결혼하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잔치를 합니다. 이때 저들의 집은 완전히 개방되고 저들은 이 기간동안 왕과 왕비의 대접을 받습니다.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신랑 되십니다. 우리 교회는 신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교회를 통해서 하늘나라 잔치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특별히 선택되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기쁨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 슬픔을 위해 곡하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자, 오늘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성도님들의 마음속에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까? 많이 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많이 웃는 사람입니까?

대체로 신앙인이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초라한 인상으로 와 닿기가 보통입니다. 옷도 남보다 꾀죄죄하고, 행동거지도 좀스럽고, 행동도 소극적이고, 산이나 어두운 곳에서 기도하고, 등등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표정도 심각하고 근엄한 사람을 신앙인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결단했을 때, 한 절친한 친구가 극구 반대했습니다. 왜 인생을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 왜 어둡고 칙칙한 길을 어리석게도 택하느냐? 한 번 뿐인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살지, 왜 그렇게 무겁고 힘들게 살려고 하느냐? 흔히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 내 영혼이 찬란한 광채 속에 거하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절로 솟아나는 길은 바로 신앙의 길임을 그 때는 잘 설명하지를 못했습니다.

실제로 예수 잘 믿는 것은 많이 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웃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웃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반은 잘 믿는 것입니다. 일단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거든요. 속이야 어찌되었건 웃고 다닌다면 문제가 없는데, 마치 세상 걱정 혼자 다 하는 듯이 심각한 낯을 하고 다니면, 남들이 저 사람 어디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남에게 어두운 영향을 끼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한 것만이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활짝 열고 기뻐하는 행위입니다. 기뻐 찬양하고, 감사해 기도도 하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환하게 꽃피는 시간이 바로 이 예배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 신부가 있어서 잔치가 됩니다. 음식이 좋아서 잔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와서 놀아준다고 잔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부의 입장에서는 신랑이 있음으로 잔치인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찌 신부가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분이 나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만족이요, 나의 감사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의요, 나의 명예요, 나의 영광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한복판에서라도, 어떤 어려운 때라도 기쁘고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기쁨, 이 즐거움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진정 예수님은 신랑이요, 교회는 신부입니다. 성도들은 이 교회를 통해서 하늘나라 잔치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금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금식은 해야 할 때와 형편에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리니, 그 때는 금식할지니라” 말씀하십니다. 그 날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신랑을 빼앗기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 성도는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 그럴 때도 금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그 성도는 영원히 주님을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금식과 슬픔은 궁극적으로 기쁨의 회복을 위한 슬픔이요, 금식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신령한 기쁨, 하늘의 기쁨, 영원과 이어지는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신랑 되신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이 기쁨을 늘 간직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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