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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주욱 가라앉는 것같을 때...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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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표준새번역>

13: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

13: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

13:3 나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두 눈에 불을 밝혀 주십시오.

13: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비틀거릴 때에, 나의 대적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13:5 그러나 나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13:6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내가 주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시13편에 나타난 다윗의 마음의 정서가 어떠한 것인지 느껴지십니까?

먼저 <2절>의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는 NIV 성경에 "wrestle"이라고 번역되어 있듯이, 내 심령에서 씨름하듯이 끙끙 앓는 상태를 말합니다.

<1,2절>에 어구마다 "언제까지", "어느 때까지"나와서 2번씩 4번 나옵니다. 언제까지, 어느 때까지..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일이 잘 안되어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여 포기하고 싶을 때, 이렇게 기도하지요?

언제까지 이 고통이 계속 되려나?

어느 때까지 이 답답한 상황이 계속 되려나?

언제까지 내가 이 모욕을 참고 있어야 하나?

장가, 언제 갈 수 있으려나?

<잠13:12>에 보면,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을 이루는 것은 생명나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좋은 소망을 품고 기다리건만, 소망이 성취될 기미는 전혀 안보이고 마음 속에서는 대적자들이 나를 놀리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시달리게 하고 마음이 저 바닷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주욱 가라앉는 것 같은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야, 이러다가 아예 무너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차라리 내가 먼저 포기해 버리는 게 낫겠다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했는데, 사망의 잠이 무엇을 말하는 것같습니까? 사망의 잠을 자는 모습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같습니까?

히브리 원어 그대로 해석하면 사망을 잠잔다는 것인데, 그래서 대다수의 주석들이 실제의 죽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시편인지라, 그 표현이 시적인 것을 생각하면 직역보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같은 잠을 잘까 하오며..."

왜 사람들 중에 잠이 들면 떼매어 가도 모르는 형제들 있지요? 잠들면 무감각해지고 꼬집어도 잘 모르고...그게 하도 심해서 죽은 것처럼 깊이 완전히 골아떨어진 모습, "쟤는 완전히 까무러졌네!" 그래서 시체놀이라고 하지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사망의 잠은 영혼이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지치고 지쳐서 나가 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까지, 어는 때까지..." 반복되는 문맥을 생각하면, 기다리다 지쳐서 완전히 낙심해 버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상태, 이런 상태를 한 마디로 뭐라고 합니까? 체념(諦念)이라고 합니다. 사망의 잠은 이런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우 있으시지요?

소망을 품고 기다렸건만, 하도 오랜 세월 동안 응답이 없고 진척이 없어서 마음만 상하고 신경질만 나고... 꼭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같은 느낌이 들고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것같고 그래서 온갖 생각이 뒤척이고 시달리고 차라리 다 포기하고 다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의 때, 이런 때 있으시지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유명한 책, "영적 침체"에 의하면 사람이 영적 침체 상태로 빠지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울 때, 분노의 후폭풍, 죄에 또 넘어졌을 때, 육신적으로 피곤할 때, 비난과 반대가 예리하게 파고들 때에 등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보편적인 경험이 "소망이 더디 이룰 때..", 사업이 오래도록 지지부진하거나 상당히 오랜 기간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성적이 안오르거나, 간절히 오래 기도하였는데 전혀 응답이 없을 때와 같은 경우입니다.

시13편에서의 다윗의 심정이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구체적 때와 상황을 밝혀 주지 않았지만, 아마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때의 거의 마지막 시기, 혹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망명생활의 말년의 때.. 이런 때이지 않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렇게 심령이 꺼져가는 것같을 때,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행하십니까? 낙심이 되며 불안하며 많은 생각들과 씨름해야 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13편의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는, 당신의 솔직한 감정, 정서를 쏟아내십시오. 쏟아내든지, 실오라기 풀듯이 풀어 내든지 당신의 느낌, 감정을 풀어내십시오.

다르게 표현하면, 괜찮은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은 괜찮지 않은 데, 겉으로 괜찮은 척하면 속병듭니다. 이것이 오래 되면, 몸에도 병이 생깁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이 형성되도록,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발전하는 것이 세 단계입니다. 맨 처음에는 일상적인 대화의 단계입니다. "밥 묵읏나?", "아는?", "자자" 이렇게 일상적인 일을 묻는 단계입니다.

"니도 묵었쟤?", "잔다", "발顣고 자뿌라"

두 번째 단계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단계입니다. "여보,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뚜껑 열리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 "언제 뚜껑 열렸어?" "아이, 말 안들을려면 나가라고 그러셨잖아?" "그게 나가라고 그런 거야, 신앙생활 제대로 하라고 그런 거지" 이렇게 생각과 의견을 주고 받는 단계, 일상적인 대화보다 많이 진전이 된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마음의 정서, 감정을 주고받는 단계입니다. "자기, 화났어?", "화 안났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나가 있어!" 이것은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예입니다. 화 안났다고 하면서 화를 마구 내고 있는 경우입니다.

"자기 나 좋아?", 흐흐흐흐.... 유철이처럼 웃으면, 그러면 자기도 좋다는 것이지요. 친밀한 관계일수록 이 정서의 나눔이 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서, 감정을 나누는 데 있어서 정말 친한 사이가 되면, 서로에게 자기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표현하는 데에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면, 그 두려움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 공격적으로 표현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화를 내는 경우이지요? 뚜껑 잘 여리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내면이 약한 사람,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약한 사람으로 들통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 그래서 방어용 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또아리틀고 있는 두려움을 솔직하게, 부드럽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성숙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친한 사이가 되면, 마음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여러분 오늘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3,4절> "두렵건대, 두렵건대.." 다윗은 자신의 마음에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젠 더 못 버티고 못 견디겠습니다. 웬수들에게 지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내 무너졌을 때 원수들이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낄낄대는 모습은 정말 저는 못참습니다."

이 솔직힌 정서를 쏟아내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낙심과 체념의 늪에서 헤어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여러 번 권고합니다.

<시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애2: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여러분도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십시오. 물 쏟듯 하나님 앞에 쏟아 부으십시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끙끙 앓지만 말고 기도하십시오. 다혈질인 사람은 통곡을 하고 부르짖을 것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주저리 주저리 풀어낼 것이고.. 어떤 것이든, 마음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맴돌게하지만 말고, 그 답답한 상태로 지지부진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집에서 안되면,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에게 토하고 쏟아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토하고 쏟아내기를 배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폼잡지 말고, 당신의 감정을 표현해 보십시오.

그것이 체념의 늪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힘을 얻어 소망을 붙들고 인내하게 하는 능력을 얻는 비밀의 문입니다.

마음이 주욱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둘째로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바닥을 치고 올라오십시오. 우아하게 표현하면, 당신의 마땅히 붙들고 매달려야 하는 신앙의 근거, 삶의 중심을 확인하십시오.

시13편에서의 반전은 <5절>부터입니다. "나는 오직" " But I trust..." 여러분, 4절 5절 어떤 뉘앙스로 느껴지십니까?

"이러다 완전히 망하는 것 아닌가, 고지식하게 하나님 의지한다고 했다가 완전히 망하여 `우리가 저것을 눌러 버렸다' 하고 원수들이 떠벌리는 것이 싫고 두렵지만, 내가 고꾸라지는 꼴 바라보고 웬수들이 고소해하는 모습이 정말 싫고 두렵지만, 그러나.. 그럴지라도 저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원수들이 이기는 그 두려움에 쫓겨서 제가 마구잡이로 행하지 않겠습니다. 원수들이 나를 놀리고 조롱할지라도 사람의 궤사, 간사를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원수가 날 이기고 나를 조롱하는 그 것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제가 망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이 두려움이 정말로 그렇게 현실로 되어서 나의 인생이 폭삭 망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저는 끝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겠습니다. 죽어도 저는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들겠습니다. "

이런 고백, 이런 뉘앙스이지요?

마치 고난 당하는 욥 앞에 그의 마누라와 세 친구가 좀 쉽게 살으라고, 쓸데없이 고집 피우지 말라고, 적당히 하나님 믿으라고 회유하고 욥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려고 할 때,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27:5?, 현대인의 성경>와 비슷한 고백입니다.

시13편의 다윗의 마음, 1절, 2절, 3절, 4절 한없이 가라앉았다가 어떻게 됩니까? 5절, 그러나 갑자기 반등합니다. 하염없이 푹푹 가라앉아 죽음을 생각하는 갈 데까지 갔다가 튕겨져 올라옵니다. 바닥을 치고 올라옵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다, 갈 데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소망을 표현할 때,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다윗의 마음,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같고 아주 바닷 속 깊이 잠수해 버리는 것같고... 푸욱 꺼지고 주욱 가라앉아서 사망의 잠을 잘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의 마음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바닥을 치고 올라옵니다.

사람마다 마음의 심기가 가라앉는 것같은 때가 없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이런 느낌이 찾아올 때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사망의 잠에 떨어지지 않고 바닥을 치고 올라와아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올라오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바닥이 제대로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맨 밑바닥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가라앉을 때마다 치고 올라올 수 있는 바닥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의 마음 바닥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은 무엇에 근거하여 세워져 있습니까?

성경에 아주 흥미로운 표현 중의 하나가 지옥, 영원한 심판의 상태를 무저갱(無底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무저갱이 무슨 뜻입니까? 바닥이 없는 갱도, 바닥이 없는 굴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바닥, 삶의 근거가 없어서 한번 떨어지면 헤어나올 수 없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마음의 상태, 그 상태가 지옥체험입니다.

마음과 삶은 견고한 근거,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까무러치게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치고 올라오는 근거,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 삶의 바닥은 무엇으로 지탱되어 있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 근거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 자기 중심적이 된 인간의 마음 바닥에는 자존심, 자기체면, 프라이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자존심을 "자기 의" "자아" 또는 "목숨"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종 "내가 누구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왕년에는..." 이 자존심의 바닥을 치는 것도 약간의 효과가 있습니다. "두고보자, 내가 반드시 보여주리라", "내가 기필코 성공하여 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라고 하지요? 이 자존심이 종종 사람들을 열심을 내게 하고 초인적인 힘을 내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깨우쳐 주신 것은 이 자기 의를 토대로 쌓은 삶과 마음은 언젠가는 반드시 와장창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창수가 나면, "자기 의"의 바닥은 송두리째 날라가고 삶은 광풍에 휩쌓여 가고 마음은 무저갱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전제로서 뭐라고 깨우쳐 주십니까?"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의라는 잘못된 기초를 무너뜨려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의가 무너져야 비로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프라이드가 내려졌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는 삶이 신나고 힘있는 삶임을 경험합니다. 자기 의가 무너져야 비로소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겉을 치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초부터 다시 쌓으라는 초청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내 평생 쫀심 하나로 살아왔는데, 자기 의에 지탱해온 삶인데, 이 프라이드, 자존심, 자아를 무너뜨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마치 무저갱에 떨어지는 것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치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같은 느낌, 두려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은 사람이 못합니다. 정말 죽어도 못합니다. 이 자아는 노랭이처럼 질겨서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뜻, 십자가의 능력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이 일, "자아가 죽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하여, 제일 중요한 것은 바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의 바닥을 깨고, 십자가에 매달고 예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당신의 마음과 삶의 바닥을 새롭게 하심에 맡겨 보십시오.

그 은혜의 체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이 고백이 비장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자존심에 기초하여 살아온 피곤한 삶이 무너지고 예수님의 은혜에 기초한 새로운 삶임을 행복한 심정으로 밝히는 고백입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하염없이 떨어지고 가라앉는 것같은 그의 마음, 심령 바닥에서 다윗은 무엇을 확인합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 다윗의 마음과 삶의 바닥에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가라앉는 그의 마음이 바닥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닥을 찍고 급속도로 올라옵니다. 그의 심령은 급속도로 회복합니다. 소생됩니다. 일어납니다. 기운을 차립니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변덕쟁이인가? 금방 울었다 웃었다 하는 사람처럼, 1절, 2절에서는 금방 죽는 소리하며 하나님 앞에 온갖 불평과 불만, 투정을 다하더니 어느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기도를 드리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잘해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기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서, 감정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다윗은 무엇을 확인합니까? 자신의 마음과 삶, 바닥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바닥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 은혜에 감사, 다시금 감격합니다. 바닥에 굳게 깔려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그의 심령은 급속히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삶, 세상이 주는 바람에 시달림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들 심령도 주욱 가라앉는 것같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닥이 은혜에 놓인 사람들, 금방 회복됩니다. 회복은 금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의 마음 바닥에 무엇을 놓아 주셨습니까?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자격없는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조건없이 나의 인도자, 주님이 되어주신 이 사랑을 놓아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의 사랑이 확인이 되시지요?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변덕쟁이로 보이지 않을까 체면차릴 생각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은혜를 확인하고 다시 웃으십시오. "어떻게 너는 그렇게 울다가 금새 웃을 수 있니? 애가 줏대도 없이." 이런 지적은 자존심을 부추기는 소리이지요? 어떤 사람이 그럴지라도, "그래, 하나님의 은혜 땜에 그런다, 부럽지?"하고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반응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과연 나의 마음의 바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은혜에 기초하고 있느냐 자기 의, 체면, 프라이드에 기초하고 있느냐 입니다.

당신의 마음, 삶의 바닥은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알 수 있는 몇 가지 리트머스 시험지를 나누어 드릴까요?

일단은, 목사님 리트머스 시험지 나눠주지 마세요 하는 마음은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치장으로 가리워 온 나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몹시도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데,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은혜의 마음이지요?

자기 의에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 꼴을 잘 못봅니다. 마음과 표정이 잘 굳어 있습니다. 웃음이 별로 없습니다. 폼 잡기 좋아하고 척 하기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민감하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짓과 핑계가 많지요.

은혜에 기초한 삶, 속이 편안하니까 감사가 있고 여유가 있고 유모어가 있고 투명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람을 대하면 편안합니다.

속보이는 요란함과 감추어도 드러나는 향기, 욕망에 이끌려 사느냐 사랑에 이끌려 사느냐, 오르려고 애를 쓰느냐 섬기려고 하느냐,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느냐 자기를 잊고 살아가느냐, 사람들 의식하며 사느냐 하나님 의식하며 사느냐.. 겉으로는 구분이 잘 안되는 것같아도 속은 천지 차이가 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속이 드러납니다. 얼의 꼴이라고 하는 얼굴에서 드러납니다. 굳은 표정, 각진 형상... 포커 페이스.. 그러나 젊어 보이지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평균 한 10년은 젊어보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또 환하게 많이 웃거든요.

하루에 30분씩 운동하는 것보다 하루에 5분씩 한바탕 웃는 것이 건강에 훨씬 더 좋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어거지로 웃으려고 하면, 더 썰렁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 웃기게 만들고.. 그러면 왜 나를 비웃는 거야 하며 속으로 더 불편합니다. 그래서 얼굴은 더 각지고.


어기지로 웃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자기 의에 기초한 사람은, 체면으로 버텨야 하는 피곤함, 결국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람이 나고 창수가 나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부정이 발각되면 자살들 하지요? 괴테, 싸르트르, 헤밍웨이 등등 인기와 명망에 목숨걸고 살아온 사람들, 자기 의에 기초하여 살아온 사람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과 삶의 바닥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세우십시오. 바닥을 공사하는 것, 다 들어내야 하고 들춰내야 하는 번거로움, 힘듬의 과정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지탱해온 프라이드, 쫀심.. 무너지는, 죽는 것같은 느낌,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친히 먼저 십자가의 죽으심을 경험하셨지만, 부활의 능력으로 찬란한 영광으로 살아나신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내 마음과 삶의 바닥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세웁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십시오.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누구든지 목마르거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의 생명의 약속에 당신의 인생을 걸어 보십시오. "쫀심으로 살아가던 피곤한 여정을 버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은혜의 예수님, 제 주인이 되어 주셔서 나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십시오" 생애 최고의 위대한 결단의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자기 의에 기초하여 살아가던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셔서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 고백을 침례를 통해서 선포하십시오.

격랑의 세상살이, 감당히 못하는 나의 연약함, 세상의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까무러칠 것같은 느낌... 좋은 바닥이 있어야 치고 올라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심으로, 이제는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드림으로써 당신의 마음과 삶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심령의 바닥을 예수님의 은혜로 새롭게 해 주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이 하염없이 주욱 가라앉는 것같을 때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치고 올라오는, 소생되는 환희의 비밀을 경험할 것입니다.

프라이드, 자아를 내려 놓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나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나의 정서까지 모두 미주알 고주알 쏟아내는, 친밀한 동행을 발전시켜 가십시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며 그 길이 소생의 길입니다. 그 길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신나는 회복의 길입니다.

마음이 하염없이 가라앉는 것같을 때, 다윗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보여줍니까? 내 마음의 정서, 솔직하게 주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과 삶의 바닥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은혜를 touch하십시오. 그 은혜의 바닥을 텃치하고 성령께서 소생시켜 주시는 감동에 따라 다시금 소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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