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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인생 (요 1: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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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복 목사 (산성교회)

(요1:40-42) 2004. 6. 13(주일낮)

동물학자 E.마레이즈는 아프리카 개미를 둔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개미집 둘레에다 둥그렇게 홈을 파 물을 대놓음으로써 개미집과 외부를 차단시켰습니다. 물론 개미집에는 개미가 들어있었고 그 일부는 먹이를 찾으러 밖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마레이즈는 그 차단한 홈의 한 군데에 가느다란 짚으로 외다리를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관찰을 한 것입니다.

집에 있던 개미는 밖에 나가기 위해 외다리를 건널 생각을 않고 예외 없이 되돌아가는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외다리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밖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한데 먹이를 마련해 갖고 돌아온 밖의 개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찾아 들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개미에게는 찾아볼 수 없던 용기와 모험을, 들어오는 개미는 서슴없이 부렸던 것입니다. 마레이즈는 이 실험 결과를 예시하고 동물이 집에 돌아오는 귀소심리의 크기를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려는 개미의 용기와 모험심을 가져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가는자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본향 집에 가려는 자는 개미의 귀소본능에서 오는 용감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환경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개미와 같은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8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의 실제인 것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다르지 않고, 교회에서와 직장에서의 삶이 다르지 않고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표리가 부동하지 않은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기 위해 오늘도 예배자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예배자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두려움과 죄책감과 무기력에서 떨쳐보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을 제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의 복음성가집 <찬미 예수 500>에서 366장, ‘이 믿음 더욱 굳세라’를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용기를 갖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제자중에서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좇고 후에 형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용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분이 오실텐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에 나보다 앞선분이라’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분이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내려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증언하였습니다.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위에 머물렀습니다”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좇아 갔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후에 안드레가 자기 형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소”라고 말하고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안드레를 통해 우리는 겸손과 전도하는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본받을 만한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두 가지의 두드러진 매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째로, 그는 자진해서 차석의 자리를 취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성경에 안드레는 몇번이고 거듭해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안드레는 제자들 중에서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갈때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에 따른 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안드레는 이에 대해 분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에게서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 윗자리와 직책과 명예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며, 그에게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욥22:29)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시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잠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둘째로, 안드레는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가 등장하는 것이 세번입니다. 첫번째가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것이며, 둘째, 요한복음 6장8-9절에 있는 사건으로 안드레가 떡 다섯개와 작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사건입니다. 셋째로는 요한복음 12장 22절에있는 사건으로 명절때에 예배하러 온 사람중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헬라인 몇명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사건입니다.

안드레의 큰 기쁨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에게만 예수님을 머물러 둘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위대한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2. 베드로의 가능성을 바라 보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려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을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여기 <본다>란 말에 사용된 원어는 엠블레페인(emblepein)입니다. 이 말은 정신을 집중하여 피상적인 것 뿐 아닐가 한 사람의 심정을 갈파해 본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내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는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헬라어이고, 게바는 아람어입니다. 둘 다 반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개인의 현재뿐 아니라 그가 어떠한 인물이 될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고 단순히 갈릴리에서 어부로서만 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만 현재 있는 가능성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까지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속에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찾아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일찌기 어떤 사람이 모양없는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끌로 쪼어내고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찾아 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이 조각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이 대리석 속에 감금되어 있는 천사를 해방하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속에 숨어 있는 영웅을 볼 수 있고 그것을 해방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가능성을 찾아 살아간 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소개해야 합니다.

3. 왜 우리는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빛이란 말은 제4복음서에서 21번이나 나온다. 요한이 말하는 요지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요8:12,요9:5,요12:36,요12:4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이라는 것은 세가지의 개념에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혼돈을 물러가게 하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 있음으로 공허하고 혼돈한 것이 물리쳤듯이 예수님은 혼돈으로 떨어지는 생명을 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들의 욕망은 공포와 어두움으로 이끌어 가지만 예수님은 삶의 암담함과 혼돈속에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숨겨진 것을 밝히시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빛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장물과 유폐물을 발가벗깁니다. 그 빛은 모든 사물을 적나라하게 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 및 이웃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십니다.

만일 사람이 이 빛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어둠속을 걷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안에서만 어둡던 길이 밝게 비치게 되고 불확실이라는 밤에 휩싸여 있던 삶이 밝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없이는 불꺼진 거리에서 더듬거리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이 충만이란 의리로 사용한 낱말은 중요한 낱말입니다. 그 낱말은 플레로마라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전체의 총계(總計)를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한 말씀이 바로 아버지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안에 머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총계가 무진장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필요를 가지고서라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에게서 그 필요가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은 예수에게서 구주적인 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의 탐구를 위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수에게서 궁극적인 계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용감하다는 것의 모범과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낙심하는 사람은 예수에게서 힘을 얻게 될 것이며, 자신의 죄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은 예수에게서 죄의 용서와 선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플레로마", 는 하나님안에 있는 모든 충만하심을 말하기때문에 누구라도 이것에서 필요한 생명의 샘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기때문입니다.

엘레아 사람들에게는 디오니소스신보다 더 존경을 받는 신은 없습니다. 그들은 다이야(thyia)라는 축제를 갖는데, 그들이 베푼 축제에 디오니소스신이 출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축제기간에 축제를 여는 장소에서 약 한마일 떨어진 다이야라는 곳에 빈주전자 세개를 가져가 그 지역 사람과 그 지방에 머무는 나그네들 앞에서 사제들에게 의해 건물안에 안치시킵니다. 사제들과 희망자들이 문을 봉인한 후 다음 날 봉인을 떼고 건물 안에 들어 가게 되는 데 들어가보면 술로 가득차 있는 주전자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나그네들과 존경받은 만한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축제때에 빈주전자가 채워지는 것은 전설일뿐 단지 이야기뿐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이야기들이 실제상으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소망했던일이 예수님을 통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이 소망했고 진리가 되기 동경한 그런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나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가족들과 잔치집에 왔던 모든 사람들이 빈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을 보았고, 물로 가득찬 항아리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품질 좋은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70년이 지나서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70년동안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가나혼인잔치의 사건을 생각하고 사색했으며 회상해 오다가 기록할때에야 알지 못했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은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께서 삶에 들어오셨을때는 어느때든지 그리고 삶에 들어오실때마다 그 삶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이웃을 소개하는 사람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우리속에 숨겨진 것을 발견하여 가능케 하시는 주의 능력을 믿고 주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빛이 되시고, 우리에게 풍성함으로 함께 하시고,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위에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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