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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 왕가의 비극 (삼하 13: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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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대근 목사 (송악교회)

어느 신문사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는 주요 관심사가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에 [나의 건강과 가정]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어느 여론조사 기관에서도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문항으로 조사를 하였는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건강과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인 성공은 그 다음 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바람 속에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가정의 붕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정의 붕괴는 곧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며 국가의 기반마저 무너뜨릴 수 있는 무서운 재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제국 멸망 사를 기록했던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역사가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바로 가정의 타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속한 이혼율의 증가와 함께 종교의 타락이 멸망할 당시의 로마제국의 가장 큰 병리적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회의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의 건강성은 그 사회의 건강성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 가정들이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송악교회 성도들의 가정이 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여러분들이 건강하고 복된 가정을 가꾸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왕가의 한 비극적 사건을 읽었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이복형제 암논에게 행한 피의 보복사건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암논의 욕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암논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다윗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암논이 자신의 이복동생인 ‘다말’을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복동생이라도 자신의 누이와 결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사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의 사촌 형제가 되는 ‘요나답’이 암논에게 간교한 모사를 베풀어서 다말을 취할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준 대로 아버지 다윗 왕을 속이고 다말을 유인하여 마침내 겁탈하는 악을 행합니다. 그런데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후에 다말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여 다말을 미워하고 내쫓아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암논에게 욕을 당하고 버림을 받은 다말은 그의 오라비인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일생을 지내게 되고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됩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겠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음모를 꾸미며 2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양털을 깎는 축제를 열고 암논을 초청하여 피의 복수극을 벌입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왕자들과 다윗 왕과 모든 신복까지도 큰 슬픔에 빠지고 압살롬은 외할아버지에게 도망하여 3년 동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압살롬을 생각하면서 매일 슬픔의 날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왕가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사람의 가정에서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고민하는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첫째, 부모의 죄가 가정의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장 1절 말씀의 앞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성경은 다윗왕가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그 첫마디를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부터 말하고 있는 사건이 앞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접속어입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 사건의 원인은 앞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13장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11장과 12장이 밝히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은 다윗의 생애에 최고의 오점으로 남게 될 만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충복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것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 장군을 악한 간계를 써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악한 죄악이었습니다(11:27, 12:9).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 죄를 꾸짖음과 동시에 앞으로 다윗의 죄에 대한 상응하는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12장 10절-12절까지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이제 다윗의 집에는 칼부림으로 인한 피 흘림이 계속될 것이며, 그 집에 재앙이 속출하고 다윗의 처들이 대낮에 강간당하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바로 이러한 심판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13장의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의 죄가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불행이 부모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정에서 부모의 영향력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저지르는 죄악들이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들이 자녀들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자명한 일입니다. 한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이란 그 어느 것보다도 크고 막중한 것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시리즈의 책들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못 접근하면 상당한 위험성이 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한 가정에서 파괴적인 죄악이나 잘못된 습관들이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범한 죄는 가정에 재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는 다윗의 자식들이 저지른 간음과 살인이라고 하는 죄의 유형과 방식은 아버지 다윗이 행하였던 죄악과 흡사하다는 점은 한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폭력이나 이혼 등의 사유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자라나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처들이 훗날 또 다른 상처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또 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훗날에 똑같은 상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을 꿈꾸는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자신을 세우고 모든 죄악을 떠나며 성실과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를 원하는 부모들을 향한 책임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며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삶의 바로미터입니다. 부모를 통해 자녀들은 세상을 봅니다. 인생의 가치를 배웁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부모들이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과 말씀 중심의 가치관으로 올바르게 세워질 때,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 역시 올바른 사상과 가치관으로 무장된 아름답고 복된 자녀들이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부모들이 거룩한 삶의 본을 보임으로 자녀들이 타락과 범죄의 길에서 방황하는 비극이 없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가정 안에서의 죄 된 모습이 가정의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다윗왕가의 비극이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죄의 영향력이 자식들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의 죄악이 면제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항변하며 억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없는 엄청난 죄악 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암논과 요나답, 그리고 압살롬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죄악이 다윗왕가의 비극의 주체인 것을 좌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죄악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한 가정에서 이러한 죄악들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이러한 죄악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물리치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암논’에게서 발견되는 악의 정체는 억제할 줄 모르는 불의한 정욕입니다. 한 젊은이의 억제하지 못한 정욕이 그의 인생뿐 아니라, 한 가문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청소년기는 많은 성적인 유혹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과 정욕을 쉽게 혼돈합니다. 암논은 다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동침한 후에는 다말을 미워해서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친족간의 결혼이 빈번했던 때라서 다윗왕의 허락을 받아 한 가정을 꾸렸으면 압살롬으로부터 미움을 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이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면 분별력도 잃고 미래에 대한 꿈도 다 잊게 만듭니다. 얼마든지 더 넓고 큰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할 젊은이들의 불의한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가정에 불의한 정욕 대신에 경건한 은혜가 흐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요나답’에게서 발견되는 악의 정체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간교한 모사입니다. 요나답은 다윗의 형인 시므아의 아들로 다윗의 조카입니다. 암논, 다말, 압살롬 등과는 사촌간입니다. 그런데 암논이 다말 때문에 상사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요나답은 다말을 취할 수 있도록 은밀한 술수를 알려주었습니다. 암논의 문병을 온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을 통해 병간호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다말이 오면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 준대로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요나답은 얼마나 뻔뻔하게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압살롬에 의해서 피의 복수극이 벌어져 암논이 죽었을 때, 이 일로 다윗이 슬퍼하자 요나답이 이렇게 말합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다른 왕자들은 죽지 않았고, 암논만 죽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 때문에 암논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미안해하거나 가슴아파하지 않고 암논만 죽었으니 상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요나답의 모습 속에 간교한 인간의 전형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형제들간의 불화를 부추기고 악을 도모하게 만들고, 나쁜 일을 모색하는 일에 앞장서는 요나답의 간교함이 우리 속에는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 화해를 도모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가정을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압살롬에게서 발견되는 죄악의 본체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분노와 복수심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을 겁탈하고 버린 암논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암논을 죽이는 것에 생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2년간을 벼른 끝에 암논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노와 복수심이 그 한 대상만을 해치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분노와 복수심은 나중에 아버지 다윗을 향해서도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를 향해 반역의 칼을 들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는 죄악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분노와 복수심의 결과입니다. 암논을 향해 품었던 분노와 복수심은 점점 그 수위가 커져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고, 세상을 향해서도 악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그 분노와 복수심은 결국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인생으로 기록된 압살롬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미움, 분노, 복수심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간에 미움이 자라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형제간에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형제간에 우애와 신뢰가 두터운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가정 안에서 처리되지 않은 죄악이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다윗은 암논이 다말에게 행한 일에 대해 듣고는 분노 했을 뿐, 그에 대한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암논의 죄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압살롬의 분노와 복수심은 더욱 커졌고, 후에 아버지를 향한 반역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암논을 모살했을 때에도 다윗은 심히 통곡한 후에는 압살롬에 대한 연민 때문에 오히려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압살롬에 대한 아무런 처리 없이 돌아오게 하였을 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향해 반역을 칼을 드는 죄악을 저지르는 데까지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녀들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때마다 죄를 철저하게 처리하지 않은 것이 다윗왕가의 비극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엄격한 경고와 훈육 대신에 무조건 용납하고 떠받드는 것이 선진교육의 방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자녀들이 잘못을 해도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위 버릇없는 아이들이 이 땅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절제할 줄도 모르고 양보할 줄도 모르고 그저 저 하나만을 위한 세상인양 버릇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잘 해주는 것, 사랑해주는 것이 버릇없이 행동해도 좋다고 용인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체벌하고, 교훈하고, 가르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17절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잠언 13장 1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23:13,4절 “아이를 훈계하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물론 이 말씀이 체벌만이 교육의 정도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 가정의 질서와 자녀의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서는 적당한 교훈과 책망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처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타락으로 내모는 결과를 양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철저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이하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가치관으로 무장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게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성경의 말씀을 기준으로 적절하게 경고하고 교훈함으로 정확한 하나님의 법도위에 세워지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올해로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회심을 한 지 266주년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라고 하는 위대한 한 인물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그의 어머니 수산자 웨슬리의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8가지의 생활교육 신조를 갖고 실천했습니다. [①체벌보다는 규칙을 스스로 지키도록 약속을 가르친다. ②거짓말, 도둑질, 불순종, 언쟁 등의 비행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③같은 잘못을 두 본 벌하지 않는다. ④순종에는 상을 준다. ⑤순종하는 행동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칭찬한다. ⑥이아들이 가진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않게 한다. ⑦약속은 엄격하게 지키도록 한다. ⑧아이들에게 책을 잘 읽도록 도와준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수산나 여사의 교육신조에는 엄격성과 온유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든 교육과 가르침을 학교나 학원이나 교회에 맡기고 가정은 그저 먹고 자는 생활공간의 역할만 수행하면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가정에 자라나는 죄악의 요소는 없습니까?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끼칠만한 잘못된 삶의 습관이나 죄악이 있다면 회개하고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 대한 엄한 경고와 훈육대신 무조건적인 용납하고 떠받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을 죄악으로 비극을 내모는 무책임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죄의 문제를 다스려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의 가정처럼, 부모들이 본보기가 되고, 모든 죄악의 근원들이 차단되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도록 엄격한 교육이 이루어져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자녀들의 인생이 행복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말씀, 2004. 5.월 p. 42-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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