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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신과 믿음 (마 7: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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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호 목사 (서울영천교회)

  저의 별세하신 어머니는 전혀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어른입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을 찾아가서 그 무당의 이야기를 듣는 저의 자당의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할까? 그건 상상을 하고도 남습니다. 그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런 정도로 진지한 예배태도가 안됩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간수합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받고 만지면서 위로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그렇게 마음을 쏟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과 미신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21절부터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한다, 그렇지만 그 날에 주님이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크리스챤 인구 천만명시대가 벌써 도래했습니다. 성도들이 전체인구의 4분의 1입니다. 그렇지만 크리스챤들이 교회 안에, 사회에 여러 가지 비난받는 일들을 많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그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천만명시대에 우리 교회나 성도들이 비난을 받는 그런 일들을 누가 행할 때 먼저 나 자신의 믿음부터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큰 인물들이 넘어질 때 내 믿음을 점검해야 됩니다. 나는 과연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고 선지자 노릇도 한다, 권능을 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님이 모르신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예수를 미신적으로 믿고 있으면 주님이 모릅니다. 미신적인 믿음은 주님이 모릅니다. 주님과 관계없는 믿음입니다. 미신의 정의를 우리 믿음에 적용을 하면 예수님을 얼르고 달래서 내게 좋도록 신앙생활을 하는 게 기독교적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도 보면 예수님을 얼러서 예수님 이름을 가지고 내 좋도록 하는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일본은 기독교 인구 백만명입니다. 제가 일본 사람들을 많이 대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개혁파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공식적으로 두 번 만나서 이야기 해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긍지가 있습니다. 일본 크리스챤들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천만명 크리스챤과 대형교회 등 외형적인 것은 그 사람들이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우리 한국인들이 접근 못하는 긍지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기독교 인구 삼백명당 선교사 한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선교사를 많이 보내지만 일반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 말고 공식적인 선교사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 인구 삼천명당 한 명 꼴밖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얼마 안 되지만 우찌무라 간조 같은 세계적인 신학자를 배출했습니다. 가가와 도요이꼬 같은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도 크리스찬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미우라 아야꼬 같은 크리스챤 문인을 배출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철저한 신앙인입니다. 일본 기독교에서는 세계적인 신학자, 자선사업가, 문학가를 배출해 가지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안에는 아직 그런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천만명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배출한 그런 세계적인 신학자도 없고 자선사업가도 없고 문학가도 아직 안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제일 많이 사용했던 주석이 미전풍이라는 일본 목사님이 쓴 주석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의 주석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그 문장 속에 함축적인 뜻이 풍부합니다. 성경을 아주 간단하게 풀이했는데도 굉장한 관찰력을 가지고 그것을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주석을 제일 애용합니다. 그런 특출한 저술가들이 일본에는 많습니다.

  미신적 신앙을 경계하라

  제가 설명을 할 때 여러분에게 받아들여지거든 아멘으로 답을 하십시오. 첫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두 번째,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 세 번째, 오늘 현재는 나는 죽음에서 예외일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저의 수첩에 지난 주간을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이 다 있습니다. 이번 주도 계속 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첩에다가 내가 이번주간, 다음주간 앞으로 한 달 앞에 심지어 여름 것도 적어 놓았습니다. 아니, 다음 주간까지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 결재도 없이 내가 다음 주간 계획을 다 해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수첩에 계획해 놓은 이 때까지 내가 죽겠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착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지금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분석해 보면 착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착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상 내 시간인 것처럼, 내 말인 것처럼 내가 계획을 합니다. 가을에 자녀들을 결혼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부모님, 하나님께 결재를 받고 계획을 세웠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믿음이 미신화 되기 쉽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 이 순간에도, 짹각짹각 하는 초 계산 안에서도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아이들도 있고 청년도 있고 노인도 있고 대상의 구분이 없습니다. 순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죽어가는 그 사람 속에 ‘나는 예외일 것이다’ ‘설마 오늘 내가 그 사람들 속에 포함되겠나’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포함됩니다.

  이집트 여행을 하면 최고의 백미가 피라밋입니다. 피라밋 안에 들어가면 왕이 묻힌 묘실이 있습니다. 애굽의 파라오가 묻힌 무덤인데 파라오의 시신은 물론 없습니다. 그것은 도굴이 되었고 대형 박물관에 파라오의 미이라가 소장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시체는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면 빨간 글씨가 벽에 있습니다. ‘1818년 3월 2일, 베르사니’ 라고 적혀 있습니다. 1818년 3월 2일에 베르사니라는 사람이 이 묘실을 발굴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가면 그 묘실의 주인되는 파라오도 없고, 그 묘실을 발굴한 베르사니도 없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언젠가는 무덤으로, 납골당으로, 한 줌의 흙으로 우리 모두가 다 갑니다.

  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죠세프라는 사람의 무덤이 있는데 그 묘비가 아주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가 본 사람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줄은 알았지만 이처럼 빨리 죽을 줄은 몰랐다”(I expected this, but not so soon)라고 적어 놓았답니다. 내가 이렇게 일찍 줄을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죽음의 인식을 가져야 믿음이 성립됩니다. 지금 죽어도 나는 이대로 주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믿음, 그 모습의 삶을 가져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대로는 천국에 입성을 못시킬 만큼 육적이고 세속적인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종말론적 인식, 내가 지금 주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한 주님의 자녀다움의 삶을 오늘의 삶으로 내가 간직하고 있어야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내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좇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이름으로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주를 위해서 사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본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믿음이 성립되려면 내가 이미 영생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늘 인식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지금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생을 얻은 자라는 인식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31절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아브라함, 죽은 이삭, 죽은 야곱의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지만 하늘나라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에 살아 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그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옛날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육신은 죽었지만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이렇게 땅에 살고 있고 앞으로 죽지만 우리 안에는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주기철의 하나님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하늘나라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람들, 한 사람은 목이 잘려 죽었고, 한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수많은 부자들도 있었고 권력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가 전한 그 복음이 오늘도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도 영도 다 주 안에서 부활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 얻은 자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영생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영생의 가치를 놓치면 안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미신화 됩니다. 미신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 국한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잘 되기만을 추구하는 그런 신앙의 의식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적 미신입니다. 우리는 영생이라는 이 위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이 영생을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드러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복음전도의 역사입니다. 복음 증거의 사명인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어느 곳에 살던,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인데 왜 이것이 중요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한 이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책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우리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태양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모든 사람에게 함께 비췹니다. 서울서 열차타고 부산가는 사람도 같은 태양이 비취고 부산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도 같은 태양이 비취는 것입니다. 상행선 태양이 다르고 하행선 태양이 다른 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책임이 따르는 삶

  시편 34편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젊은 사자는 굶어 죽을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공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인도하시는 그 축복을 믿고 이렇게 노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여기에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도 우리가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탈북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평하면서 하는 소리입니다. 북한에서는 하라는 데로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남한에 오니까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전부 내가 돈 벌어서 살아야 되고, 내가 돈 벌어서 써야 되는데 이게 너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탈북자의 말속에 아주 재미있는 의식이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책임이 따릅니다. 남한의 자유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앉혀놓고 먹여주는 게 자유가 아닙니다. 북한에 있으면 배급받아 살면 됩니다. 그야말로 시키는데로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 와서는 내가 알아서 일하고, 내가 알아서 돈 벌어서 내가 알아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적응하는 게 아주 어렵답니다. 이 자유세계가 그들의 눈에 볼 때 너무 매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은데 그 사람들은 저 북한질서에 길들여 있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일하는 게 그렇게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히 일부는 그래도 북한이 좋다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의식입니다. 조금 고통스러우니까 “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에 대한 통계가 나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일순위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잘 살아보자 했고 우리한테 보릿고개를 넘겨준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이 조금 괴로우면 그때가 좋았다 하고 그리고 가자고 합니다. 예수도 그렇게 믿으면 곤란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책임져야 할 것을 회피하고 ‘그때가 좋았다’ ‘애굽이 좋았다’라고 합니다. 자유는 책임이 따라옵니다. 은사도 책임이 따라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요구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말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그 때 투자를 더 했더라면 성공했을텐테’ ‘내가 그 때 로비를 좀 했더라면 출세했을텐데’ 그런 후회는 거의 없고 좀 더 내가 베풀지 못한 것, 좀 더 사랑하지 못한 것, 좀 더 정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살아서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는 그 순간에 ‘그동안 내가 붙잡고 있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건 늦습니다. 지금 깨닫고 사셔야 됩니다. 지금 깨닫고 살아야 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붙잡고 예수이름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미신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얼르고 달래서 내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은 죽은 사실과 연관을 가집니다. 지금 죽어도 정당하다고 하는 삶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언제나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면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아도 당당하다’는 그 죽음 앞에 당당한 믿음, 그것을 주님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영생의 사실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알고 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치장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해야 합니다. 영생을 놓쳐 버리고 영생을 묻어 버리고 세상 것을 자꾸 치장하는 이런 신앙생활은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드러나고 이 구원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은 임마누엘 사실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분과 함께 이 땅에서 일하는 믿음이 바로 우리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떠나가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는데,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했는데 왜 주 앞에 그렇게 박대를 당합니까? 우리 믿음이 주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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