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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히 1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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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국 목사 (새비전교회)

  히브리서 11장을 계속하여 강해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몇 인물들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특정한 한 인물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인물들의 믿음을 한 단락 지으면서 그 믿음의 근거를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소개가 끝나지 않았는데 마치 결론을 낼 것처럼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 말씀은 중간 평가를 하고 있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믿음의 선조들을 중간 평가하면서 요약한다면 “이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산 것이다”라고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산 것입니까?

  1. 그 첫 번째로는 그들은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13절).

  13절 말씀에 이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멀리서 그것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언급된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 죽을 때 “이게 뭐야. 결국은 내가 해 놓은 것이 이것뿐인가?”하며 땅을 치며 한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죽을 때 그들에게 놓여진 것은 약속의 극히 일부분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그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결과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다의 모래와 같은,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 받았지만 사라를 통한 자식은 덩그러니 이삭 하나밖에는 없었습니다. 모든 아들을 다 합쳐도 여덟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는 거리가 먼 결과였습니다. 이후에 등장하지만 모세도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지만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믿음으로 살았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가 고작 이것밖에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칠 때 우리의 고백은 어떠할까요?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이루어놓은 것이 없구나…”하며 한탄할 것 같지 않습니까?

  미국 역사 중에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에 경종을 울렸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는 7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어느 정도의 부자냐 하면 그들의 전 재산을 모두 합칠 때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 모였던 그 날로 시작해서 정확히 25년이 지난 후의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하여 발표를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었던 강철회사 사장, 찰스 슈업은 25년 후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인 알써 카튼은 밀농사로 거부가 된 사업가였는데 그 역시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혼자 임종을 맞이하고 죽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인 리차드 위트니는 뉴욕 은행의 총재였지만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인 엘버트 홀은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지만 감옥에서 막 풀려 나와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인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었던 J. C. 리버모아는 인생의 끝을 자살로 마쳤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인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사람인 이반 크루컬은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지만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미국인들에게 부의 허무를 알려주는 커다란 충격과 교훈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 4, 5)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레처럼 많습니다. 온 땅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 된 자들이 모든 족속들에 있습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약속, 그 비전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눈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눈을 떠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는 그들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13, 14절).

  그들은 이곳이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실제적으로 계속하여 옮겨 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많은 부족들이 이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유목민족들은 오늘날처럼 한곳에서 가축들의 먹이를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풀과 우물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급된 사람들은 단순히 풀이나 우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사람들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옮겨 다닌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질 때에도 그러했지요. 좋은 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단순히 비옥한 땅만 보고 따라갔으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의 삶이 어떠한 삶입니까?

  많은 것을 가지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옮겨 다니기에 매우 불편합니다. 사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주인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나그네는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기보다는 대부분의 것을 빌려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좋고 나쁘고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곳을 즐길 줄 압니다. 참된 나그네는 여유롭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귀에 익은 싯귀(詩句)를 기억하시지요? 저도 여행을 좋아합니다만 진정한 여행 매니아는 있는 그곳을 그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독특한 풍습과 문화가 있습니다. 그걸 즐겨야지 거기에서 항상 자기에게 익숙하고 맞는 것만 찾으면 여행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즐기고 계십니까?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곳에 안주해 있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곳에서 너무 많은 정을 붙이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여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갈 곳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그 다음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종 목적지는 집입니다. 집이 없다면 죽음이 최종적인 집이겠지요. 안 믿는 사람들은 “무덤”이 자기의 최종적인 집이라고 하겠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인 집입니다. 그곳이 더 나은 본향입니다.


  3. 마지막으로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14~16절).

  오늘의 본문에 보면 그들은 본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자꾸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한 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다면 옛 삶을 돌아다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어 놓고서는 아직도 예전의 삶에 미련이 남아서 돌아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지요. 출애굽 여정 속에서 자꾸 애굽의 고기 가마를 생각하고 애굽에서 편히 있던 생각을 합니다. 종살이와 같았던 삶을 망각하고 거기에서의 좋은 추억들만 생각합니다.
  롯의 아내도 소돔과 고모라 땅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할 때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떠나온 집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정 길이니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꾸 예전의 삶으로 돌이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일찍이 홀로 되셔서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자녀들을 모두 교육시키셨습니다. 그 자녀들이 장성하여 나름대로 세상에서 인정받고 잘 사는데도 할머니는 자녀들과 같이 살지 않고 작은 오두막집에 혼자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자녀들은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이제 우리들도 모두 잘 사니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며 살 수 있어요. 이런 보잘것없는 집에서 혼자 살지 마시고 저희랑 좋은 집에서 사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애원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나를 위해 이런 집을 지어다오. 집 바닥은 온통 유리로 하되 기둥은 12개로 하고 그 기둥 밑바닥에는 반드시 보석을 박아라. 보석은 각기 다른 색깔로 하고 문은 12개가 되어야한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자녀들은 하나같이 “어머니, 농담이시죠.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으며, 그런 집을 어떻게 짓나요?”라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에 대한 어머니의 말은 더 걸작이었습니다.
  “그런 집이 어디 있냐고? 왜 없냐? 나는 그런 집을 하늘나라에 분양 받았는데…. 그래서 곧 그곳에 살게 될 테니 나보고 더 좋은 집으로 가서 살자고 하지 말려무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 1).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본향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해 산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는 삶입니다.
  여러분, 무엇에 미련이 남아있습니까? 지금 본향을 가야 한다면 무엇에 애착이 남습니까? 본향을 향해 갈 때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는 삶,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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