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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하기를 배웁시다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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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족할 줄 안다는 것, 곧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에 만족하면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정불화로 인해서 고민하는 어떤 중년의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까? 너의 소원이 도대체 무엇이냐? 세 가지의 소원만 내가 들어주겠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는 대뜸 생각지도 아니하고 자신의 첫번째 소원을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와 살고 있는 아내를 제발 좀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고, 그 대신 새 아내를 제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정불화로 인해 아내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생각되었으면 대뜸 첫번째 소원을 그렇게 아뢰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소원대로 그의 아내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내의 장례식을 하는 날, 문상객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죽은 아내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그 귀하신 분이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요? 그 분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이런 좋은 일도 하시고, 저런 좋은 일도 하시고, 참 귀한 일을 많이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아내에 대해서 칭찬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보니까 자기 아내가 죽은 것에 대해서 정말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무래도 그 사람은 죽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러니 도로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아내가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습니다. 세 가지 소원 가운데서 이미 두 가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하나밖에 안남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자기의 마지막 소원을 투자할 만큼 값진 것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의 삶에 대해서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라."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족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소유하고 보니까 세상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매사가 그렇게 즐겁고 기쁘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긋지긋하던 아내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좋은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양에 있는 어느 마을에 아주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주식투자를 잘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잔고를 조회해 보았더니 십만 달러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카가 한 사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은 십만 달러는 자동적으로 그 조카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그의 조카가 뜻밖에 십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십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십만 달러인데 한 사람은 너무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앞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을 몰랐고, 뒷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자족하기를 배웠더라면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족함의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히려 비천에 처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또 많이 배웠습니다. 그 당시에 명문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일평생 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매도 수 없이 맞았습니다.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례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이곳 저곳 정처 없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되었기 때문에 때로는 더위와도 싸웠습니다. 때로는 추위와도 싸웠습니다. 또 배고프기도 했고, 목마르기도 했고, 헐벗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와 같은 비천한 처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전혀 개의치 아니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되신 예수님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존귀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면 그는 그것으로 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355장의 가사 그대로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늘 이와 같은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천함 속에서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그저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의 비천한 처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리해서 시위대 사람을 통해서 로마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또 바울은 감옥 속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 여러 권의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빌립보서신을 비롯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네 권의 성경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 기록한 서신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바울은 그가 감옥 밖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보다도 훨씬 더 복음의 진보에 큰 효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비천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바울이 자유의 몸으로 밖에서 복음 사역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을 수도 있는 몸이었습니다.
"내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
이렇게 맹세했던 유대인들의 수가 사십명이나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바울이 지금 갇혀있는 로마의 감옥은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하나의 은신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비천함에 처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비천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얼마든지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천함에 처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비천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 드리는 두 학생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학생은 주일학교에서 학생회장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3이 되면서 그는 교회에 나오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야, 어찌하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란다!"
그는 그 말을 늘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고3이 되면서부터 교회에 나가던 발걸음을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그 해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신앙이 떠나가 버렸습니다. 결국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세상 친구들을 만나서 어울리는 바람에 교회에 완전히 발걸음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학생이 대학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일까요? 오히려 그는 후배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학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3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교회에 잘 출석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안타깝게도 그는 대학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재수생이라는 무거운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함없이 신앙 생활에 충성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대학에 붙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신앙 생활을 열심히 잘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자기의 비천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비천함에 처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비천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더 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천에 처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천에 처했을 때 그 비천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풍부에 처했을 때도 자기의 풍부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에 처했을 때 신앙 생활을 열심히 잘합니다. 또 기도 생활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풍부에 처하면 열심이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풍부에 처할 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주위에 빙 둘러서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바울이 보니까 그의 마음 속에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향해 외쳤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무리가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아니요,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마치 신들에게 하는 것처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급히 자기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이와 같이 헛된 일을 하지 말고,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우리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풍부함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는 풍부할 때도 그 풍부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풍부에 처할 줄 알았던 모습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사역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복음사역을 위해서 계속해서 물질적으로 돕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인들이 마음 속으로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들은 급한 마음으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모금을 했습니다. 꽤 많은 돈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18절 말씀에 있는 대로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받게 되었을 때 바울의 입장에서는 아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심한 사람들! 계속해서 돕겠다고 하더니, 그래 그 동안 돕지 못하고 내가 감옥에 있다고 하니까 이제야 이것을 가지고 왔단 말이냐?"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주면서 그들의 사랑을 큰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그 동안 나를 돕기 위해서 생각은 오죽 많이 했겠느냐? 그러나 내가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다니는 바람에 너희가 나를 돕고 싶어도 제대로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비로소 너희가 나를 제대로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바울은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한 마디 덧붙이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우리가 누구에 의해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의 뜻을 이렇게 표합니다.
"작년에 주셔서 감사하고, 올해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꾸 비굴하게 감사의 뜻을 표현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년에도 또 주십시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빌립보 교인들을 칭찬하는 것이 그렇게 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지금 바울이 크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 성도들이 물질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만큼 풍부하게 되어서 기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들의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자신들의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풍부할 때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풍부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이 좀 더 있다고 해서 거만을 떨고,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풍부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있을수록 더욱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값있게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보십시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자고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세요.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아마 이런 경험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장마가 졌습니다. 시냇물이 막 불어났습니다. 길을 건너야 되는데 돌아서 가려면 너무 멀고, 시냇물을 건너자니 물이 배꼽까지 차오릅니다. 그 시냇물을 건너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불어난 시냇물을 안전하게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흘러가는 시냇물을 절대로 바라보면 안됩니다. 되도록 시선을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집, 산, 바위 등 고정되어 있는 물체를 바라보면서 건너야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려서 빠져 버립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잘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바다에 빠져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이겨낼 수 없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해 있을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자고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 위에 작은 돌섬이 하나 떠있습니다.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섬은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수만톤의 군함이 와서 밀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함이 밀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돌섬이지만 그것이 지구땅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데 어떤 풍랑이 감히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보호함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근심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비천에 처할 수 있습니다. 풍부에도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족함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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