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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일생(3) : 마르지 않는 찬송의 샘 (삼상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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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수년 전 미국의 프란시스 로셔 박사와 고든 쇼우 박사가 이색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이렇습니다. 6개월간 모차르트 곡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은 미취학 아동들이 그렇지 않은 아동들에 비해 뛰어난 학습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특히 수학과 과학에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좀더 확실한 근거를 위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해 봤는데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한 쪽엔 10분간 모차르트 곡을 들려주고, 다른 한쪽은 들려주지 않고 수학과 과학 시험을 보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음악을 들은 쪽 학생들이 반대쪽 학생들에 비해 평균 30%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음악은 어떨까 비슷한 실험을 했답니다. 록 뮤직(rock music) 등 시끄러운 음악을 들려주고 시험을 치렀더니 평소보다 낮은 점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참 신기하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식물들도 음악에 대해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미국의 도로시 리틸락 박사는 하루 3시간 록 뮤직(rock music)을 식물에게 들려주었더니 애호박에 주름이 생기고, 토마토가 납작해지고, 옥수수가 구부러졌다고 합니다. 반면에 왈츠나 세레나데를 들려준 식물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열매도 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좋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게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두뇌 활성화, 학습 능력과 생산성의 향상 등의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장애나 질병을 치료해 준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음악 치료학’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누군가 음악을 가리켜 ‘영적인 언어’라고 했는데, 이 말처럼 음악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음악을 선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찬송이 가장 좋은 음악인 것입니다. 찬송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개인적으로나 교회 공동체적으로나 너무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찬송이 없는 신앙생활, 찬송이 없는 예배, ...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힙니다. 이처럼 찬송은 신앙생활에 있어 너무 중요합니다. 찬송 생활을 잘 하면 신앙이 풍성해지고, 반면에 찬송 생활이 빈약해지면 신앙이 쪼그라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찬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올바른 찬송 생활로 승리하는 신앙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의 찬송 생활 : 성령 충만․찬송 충만

다윗의 일생을 연구해 보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찬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 습니다. 그는 일평생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어렸을 때나 노년의 때 에나, 고난의 때에나 형통할 때에나 항상 찬송했습니다. 들판에서도 왕궁에서도 찬송했습 니다. 왕이 되어서는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었고(대하7:6), 예배를 담당하는 전문 음악인을 대거 임명하기도 했습니다.(대상15;16, 25:1~7) 그리고 시편 150편 중 대부분이 다윗이 쓴 것인데, 당시 시편은 멜로디가 있는 찬송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인생은 한 마디로 ‘늘 찬송하는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그는 ‘마르지 않는 찬송의 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찬송 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그 이후에 생긴 사건의 기록입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눈 밖에 났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고 저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호와의 신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에게서 떠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정확하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였다가 떠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복된 거죠. 지금은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내주하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어쨌든 사울은 가장 큰 저주를 받은 겁니다. 성령이 떠나고, 그 대신 악령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란 말은 하나님이 허용하는 중에 악령이 역사했다는 겁니다.(cf. 욥1:6~7) 악령도 하나님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활동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한 것 자체가 사울에게는 저주입니다. 어쨌든 악령의 세력에 눌려 그는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신세가 됐는지 모릅니다. 왕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면 뭐하나 싶습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신하들이 진언을 합니다. 수금(harp)을 잘 연주하는 사람을 데려오면 악신이 떠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천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18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사울의 시동이 다윗을 추천한 말입니다. 여기 보면 다윗이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용맹스럽고 언변도 뛰어난 호남아였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잘한다는 게 아니고, 찬송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이 왕궁에 들어갑니다. 21절~23절 보면, 그가 왕궁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병기 든 자’가 되었는데, 부관 혹은 근위병을 가리킵니다. 또한 사울 측근에서 궁중 악사로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이 악신의 공격으로 발작을 했고, 그때 다윗이 수금으로 찬송을 연주하자 악신이 떠나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물론 본인이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아 재발하게 됐지만, 어쨌든 다윗의 찬송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찬송은 성령이 함께 하는 가운데 영혼 깊은 데서 솟아나는 찬송이었습니다. 실로 다윗의 신앙생활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동시에 찬송으로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찬송이 신앙의 척도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송이 풍성해집니다. 반면에 성령이 소멸되면 찬송이 사그라집니다. 다윗의 신앙이 왜 훌륭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항상 성령으로 충만했고, 숨질 때까지 찬송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늘 성령 충만, 그래서 찬송 충만한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찬송의 의미 : 종체적인 신앙의 표현

찬송은 우리 마음속의 신앙을 표현하는 음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찬송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찬송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행할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입니다.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엡1:12, 14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 심이라 ...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찬송을 통해 신앙을 총체적으로 다양한 면에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를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① 경배와 감사 : 찬송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을 가리켜 ‘찬미의 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히13:5) 하나님이 이 찬송을 얼마나 기뻐 받으시는지 다윗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② 신앙 고백 : 찬송은 우리의 신앙을 시와 멜로디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표현되지 전까지 참 사랑이 아닌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이 찬송으로 고백될 때 그 신앙이 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은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참 신앙인은 저절로 찬송하게 됩니다. 때로는 구원의 은총이 감격스러워 눈물로 찬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찬송이 잘 안된다 싶으면 자신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 선포 : 찬송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과 그 은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간증이죠.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지만 인간이 들으면서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시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④ 하나님께 올리는 간구 : 흔히 찬송을 가리켜 ‘곡조 있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뢰며 기도하는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상당수가 기도시인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찬송을 통해 하나님 앞에 우리 신앙을 종합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늘 찬송을 통해 우리 신앙의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시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기교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말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신앙의 다양한 모습들을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펼쳐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찬송의 효과 :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우리가 찬송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찬송 중에 충만히 임재하십니다.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찬송 중에 임재하여 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찬송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일들을 하십니까?

① 치유 :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모든 게 질서 있고 조화로웠습니다. 창1:31 보면, 창조 후에 만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질서와 조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인생은 망가지고, 깨지고, 상처받고, 병들고 ... 그렇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chaos)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 능력으로 역사하시면 무질서와 혼돈이 사라지고 질서정연해집니다. 그것이 곧 회복이요 치유인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다윗이 수금으로 찬송을 연주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악신이 떠나갑니다.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옛날 장관을 지낸 분의 이야기입니다. 장관이 됐는데 이상하게 불안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남 보기에는 권세가 대단한데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오히려 높아질수록 불안해집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부인이 아주 신앙이 좋은 분이어서 밤마다 머리맡에서 찬송을 들려주고 시편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랬던지 6개월 만에 깨끗이 치유됐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찬송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영적으로 육적으로 상처가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속의 신앙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으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찬송을 통해서 털어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놀라우신 능력으로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심신이 병든 것 치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승리 : 우리가 험한 세상 살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과 환란이 우리 앞에 도전해 오는지 모릅니다. 밀물과 썰물처럼 이제는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고난이 닥쳐옵니다. 혹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맥처럼 산 너머 산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며 주님과 동행하면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승리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다윗이 노래합니다. 시40:2~3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복음 전하다 선행을 하다 애매하게 갇혔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매를 맞고 차꼬에 묶여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일어나 찬송합니다. 그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행16:25~26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고 그냥 나가면 됩니다. 당황한 간수가 자살하려는 것은 제지시키느라고 나가지 않았지만 그 날 밤 간수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 날 상부애서 사람이 와서 자연스럽게 출옥하게 됩니다. 엄청난 승리입니다. 이게 다 찬송 중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펄 벅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의 부모는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한번은 그 어머니 캐롤라인이 마침 남편이 전도 여행을 떠나고 집에 아이들 셋만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밖에서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중국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내용인즉슨 가뭄으로 온 동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게 다 서양인들이 들어와서 신이 노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밤이 깊어지면 처치하자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캐롤라인이 질겁했습니다. 대책이 없어 그냥 골방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중국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침착하게 그들을 맞이하였고 다과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르간 앞에 앉아 중국어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이 끝날 때까지 방안은 조용했고, 신기하게도 중국인들은 얼굴을 마주보면서 멋쩍어하다가 하나 둘씩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역시 찬송 중에 임하셔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아무리 눈앞이 캄캄해도 찬송 하십시오. 찬송은 형통한 가운데만 하는 게 아닙니다. 답답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쪼록 늘 찬송하면서 이런 승리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③ 소망 :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절망을 경험할 때가 생깁니다. 죽음의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찬송할 수 있고 하나님의 큰 위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 너머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십시오. 그도 얼마나 많은 절망을 경험했나요? 죽음의 위기에 닥칠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찬송함으로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의 경험담을 기록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환자를 만났는데 피부암 말기입니다. 눈과 입만 빼고 얼굴 전체가 흉측하게 암 덩어리로 뒤덮였습니다. 얼마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환자는 권사님이신데 그 병실을 지나갈 때마다 뭐나 웅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무슨 소리인가 들어봤더니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23장 찬송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위대한 겁니다. 그리고 찬송은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질병도 찬송하는 그분에게서 구원의 감격과 천국의 소망을 앗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그 권사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분은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사망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찬송하며 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의 찬송의 샘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 혹시 습관적으로 입만 벙끗벙끗하는 껍데기 찬송을 부르는 모습은 아니지 ...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명문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만 그분은 신약학 교수인데 이상하게 채플 시간에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찬송 음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수가 어찌된 일인지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강의 시간에 조심스럽게 물었답니다.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찬송을 다 부르시고 ... ” 그랬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 전날 밤 꿈을 꾸었다는 겁니다. 천국 문에 이르러 노크를 했더니 베드로가 나오더니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신자요 지금은 신학교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더니, 베드로가 무슨 장부 같은 것을 뒤지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공부는 많이 해서 아는 건 많은데, 찬미의 제사를 올린 기록이 없소이다. 천국은 지식이 많은 신학 박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자를 원합니다. 그러니 다시 가서 찬송을 많이 부르다가 오시오!” 천국 문이 탕 하고 닫혀서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찬송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일생토록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닥치든지 항상 마르지 않는 찬송의 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퍼낼수록 새 물이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풍성한 찬송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복된 인생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부디 우리도 새롭게 결단하시고 열심히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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