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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는 없다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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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창우 목사 (한남제일교회)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때가 없다고 합니다. 어려우면 살기가 힘들지만, 어려워도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즐거움과 기쁨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데, ‘어디에 가서 놀았다, 도박했다’ 는 것은 ‘재미있다, 즐겁다’ 라고는 할 수 있지만, 기쁨이 있지는 않습니다. 땀을 흘리고 힘들어도 마음이 기쁠 수 있고,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겪어도 마음이 기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절망에 빠져 어려움 겪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많은 병자라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 38년된 중풍병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고쳐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이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베데스다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베데스다의 전설을 듣고 찾아갔다는 말이 맞습니다. ‘베데스다’ 라는 말은 ‘자비의 집, 사랑의 집, 은혜의 집’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기가 있는 연못이 아닙니다. 또 물이 부글부글 끓는 온천도 아닙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먹는 물을 저장해두는 저수탱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욕탕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가에 있다가 어쩌다 한번,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 들어가면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무슨 병이든지 낫는 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이 민간신앙이 되어 각처에서 환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도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병을 낫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질문을 했더니, 이 사람이 이런 대답을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베데스다 연못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이 사람들이 모여서 평소에는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격려하고 먹을 것 있으면 나누어 갖고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지내다가 연못의 물이 움직이는 순간 언제 봤냐는 듯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먼저 병 고치려고, 눈치 빠른 사람이 먼저 갈 것이고, 힘 있는 사람이 먼저 갈 것이고, 어찌 되었든 먼저 가려고 밀고 당기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눈먼 사람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갔을 것이고, 38년된 병자는 누가 데려가 줄 사람도 없고 쳐다만 보았을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기 살기에만 급급해서 모두가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는 너무나 상처를 받았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내려갈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자기의 능력없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욕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없이 무엇인가 되겠지 하면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의욕상실입니다. 열등의식은 얼마나 커집니까?

여기 있으면 무엇인가 되겠지 하면서 붙어있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하고 평소에는 잘 지내는 것 같지만 혼자 있으면 고독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 했습니다. 고독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도 만성의욕상실에 있으면서 누워만 있는 환자가 38년된 병자 아닙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자기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경쟁주의, 성공주의의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 소위 ‘베데스다’, 이름은 자비의 집이고, 은혜의 집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과정은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무분별한 한탕주의, 양심이고 무엇이고 없는 각박한 싸움터가 바로 베데스다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 역시 베데스다 일뿐입니다. 평소에는 잘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는 것이 바로 내 모습인 것입니다. 의인 노아도 그랬습니다. 세상이 멸망할 때에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그도 포도주를 먹고 취해있는데 자기의 수치를 드러냈다고 아들까지 저주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생각안하고 원인제공을 노아 자신이 했음에도 아들을 저주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데스다가 아닙니까?
사도바울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떠난 사람도 많았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던 바나바, 조카 마가와 헤어지고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자신을 떠난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본인도 상처받았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베데스다’ 라는 것은 없고, 이름 뿐입니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윤리, 도덕을 굉장히 따지는 것같으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그 앞에서는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되고, 정치인들과 연예인들, 없는 사실도 있는 것처럼 만드는 신문의 기사들, 그것 갖고 부수만 올리면 승리한 것처럼 생각하는 오늘의 언론의 모습도 ‘베데스다’ 일뿐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도 엉뚱한 신화나 전설에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단에는 노조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뜨거운 감자가 생겼습니다. “목사님도 노동자다, 사무직원도 노동자다, 관리집사도 노동자다, 우리의 권익읕 찾아야 된다.” 그것에 반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저도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왜 노조가 생겼느냐?” 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개척을 해서 교인수를 늘어나고 장로교 목사니까 장로님들과 협력해서 일하면 더 잘 될것이라고 생각해서 옆에 있는 목사님들이 너무 빠르다 라고 해도 장로님을 세웠는데, 6개월이 지난 후 두 분 장로님이 합세해서 자신을 쫓아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법을 알았더라면 안 쫓겨났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노조라는 신화를 따라가게 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도 신화입니다. 그것을 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업자득 아닙니까? 없는 이야기를 따라 다닐 수만 있는 것도 아닌 우리들, 복권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따라다니는 그 모습이 바로 베데스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좋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정말 ‘해 아래 새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주일이 왜 생겼습니까? ‘베데스다’처럼 살아서 그렇습니다. 좀 더 많이 먹고, 좀 더 편하게 살자 해서 세상이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간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분들의 수고를 알아야 합니다. 왜 이분들이 희생했고, 왜 죽어야 했습니까? 왜 전쟁이 일어나야 했습니까? 그것도 ‘베데스다’ 와 같은 현실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름만 ‘베데스다’ 일뿐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베데스다’ 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설이나 신화를 따라 다니면 안 됩니다. 이러한 ‘베데스다’ 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베데스다’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그리스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베데스다’입니다.

우상 숭배하던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드셨습니다. 인생실패자 모세를 찾아오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를 만드셨습니다. 나약한 겁쟁이 기드온을 찾아 오셔서 용감한 사사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초대교회의 훌륭한 사도로 만드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 섰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만드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베데스다’에 38년된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와달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오셨습니다.

여러분, 5-6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찾아오신 주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사랑과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여호와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준비했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순간에 준비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계시다가 명령하고 난 후 순종할 때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한 순간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시고’,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내가 저 땅 끝에 가서 있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아시고,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죄인됨을 아시고, 그러면서도 정죄하지 아니 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 우리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 ‘소원이 있느냐’, 답변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고향에서 낙심하여 고기나 잡고 있던 바요나 시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너의 죄를 다 용서한다. 너를 사랑한다.’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기세등등하게 가는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길을 주려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아담의 죄를 물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 길을 열어주려는 것입니다.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심판하려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살 길을 열어주려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더 큰 은혜 주시려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 , 당신의 기쁘신 뜻이 있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자를 살게 하려는 것이 주님입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향해서 우리가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여러분, 7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어보는데, 이 병자는 다른 사람은 들어가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먼저 못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남을 원망하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은혜 못 받는다고 원망합니다. 주님은 이런 답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답 속에는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8절-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면 그 명령 받아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에게 ‘일어나라’ 할 때에 일어납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실 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 한 마디에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됩니다. 명령대로 순종하면 사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나 자신을 자책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 주님’ 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낫고자 하느냐’, 준비된 것을 갖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까? 내가 능력이 없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업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기만 하면, 말씀 붙잡고 부르짖기만 하면 은혜주시고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

18살짜리 소녀가 달려오는 기차에 달려들어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살고 보니, 두 다리가 없습니다. 팔이 없습니다. 남은 팔 하나는 멀쩡한가 했더니, 두 손가락이 없습니다. 세 손가락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인생도 사랑하셔서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목사의 사모가 되어 잘 살고 있습니다.

이 분의 이름이 ‘다하라 요네꼬’입니다. 이 분이 자기의 어려운 형편과 처지 속에서 그래도 하나 하나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라 해서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너무나 황홀합니다. 한번은 감자를 깍아서 반찬을 만드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감자껍질을 벗기려 하는데, 손가락 세 개를 갖고 동그란 감자를 깍으려 하니, 이리 저리 빠지고 땀범벅이 되고, 감자를 깍으면서 그리 절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서 무엇 하겠나 하는 절망감에 이 칼로 죽어버리고 싶은데, 한순간 하나님이 두려워 지기 시작합니다. 칼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일날 참회의 기도를 합니다. 참회의 기도는 나의 부족한 것과 허물 된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허물 있는 모습으로 주님 만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어느 정도로 여러분의 죄를 고백합니까? 저는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잘못한 것을 자꾸 끄집어 내다 보니 영적으로 고갈이 됩니다. 은혜가 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집니다. ‘내가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참회의 시간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아침에는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어제 밤 잠이 잘 안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숨을 쉬는게 너무 감사합니다. 오십견이 와서 어깨가 아팠는데, 어깨가 안 아팠습니다. 그것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과 예배드리는 것도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더 감사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기쁨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하라 요네꼬’ 사모님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인생을 구원하셔서 살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나같이 다리도 없고 팔하나에도 손가락 세 개밖에 없는 나를 한 남자 만나서 결혼하게 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몸뚱이에 생명을 잉태하게 해 주셔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선물로 주시고,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나의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 감자를 깍을 수 없습니다.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아시는 하나님,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이런 감자 하나 깍지 못해 힘들이고 있는데 방법도 주시고 힘도 주시고 꼭 깍을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평안이 옵니다. 물가의 물이 차 오르는 것처럼 마음에 평안이 오고 그 순간 희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감자를 씻어서 도마위에 올려놓고 감자를 반으로 썰었습니다. 반토막이 된 감자를 도마 위에 놓으니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썰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반찬을 맛있게 만들어 대접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우리의 숨쉬는 소리 하나까지도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의 행동, 나의 마음, 나의 계획까지 아시는 하나님, 이렇게 기도해서 얻어진 힘과 지혜와 방법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며 승리이며 기쁨인지 세상에서 어디서도 얻을수 없는 그런 것에 감사하며 어려운 것에서도 결코 절망하며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고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마땅히 구해야 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겸손하고 진실하고 남을 원망하고 자기를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자신을 위로하고 남도 미워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38년된 병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찾아오신 예수님, 나를 아시고 그 명령하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는 마땅히 순종하면서 ‘일어나 걸어가라’ 하실 때에 일어나 절망의 자리 앞에서 하나님 앞의 기도의 자리로 옮겨가는 은혜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한 승리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연못의 전설에 얽매였던 비신앙적 요소를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잘 해야 내가 잘 되고, 내가 능력있고 대접받아야 잘 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논쟁을 벌입니다. 이 병자가 안식일에 일어나 걸었다고 죄 지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남을 비난하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단 하나,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지도자이고, 여호수아가 지도자이고, 사사가 지도자이고, 그 지도자들은 능력이 있어서 지도자가 아닙니다. 허물많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했던 일은 단 하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승리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비신앙적인 요소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음성 꽃동네에 가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에 근거해서 주님 앞에 더 간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숨쉬는 것에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 갈레스티 박사가 졸업식 때 한국 남대문 시장에서 보았던 감동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습이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가 없는데 짐보따리를 끌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장사했던 한 장애인의 모습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는 길지도 않으면서 한국교회는 형편이 좋지도 않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은 ‘베데스다’ 가 아닙니다. 주님만이 ‘베데스다’이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신 은혜로 승리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등 뒤에서>

1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도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3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 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 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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