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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의 완성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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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17-20)


영원한 율법

  오늘 말씀의 주제는 율법입니다.  먼저 율법의 의미부터 확실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이란 뭘까요?  율법이란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은 성경 전체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구약성경 전체가 율법이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신구약 전체가 율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마5:17,눅16:16,행28:23,롬3:21)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입니다.(눅24:44)  율법서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책을 가리킵니다.  선지서는 여호수아 이후의 역사서들을 가리키는데, 선지자들이 썼다고 해서 선지서로 분류합니다.  나머지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에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이것을 줄여서 “율법과 선지자”, 더 줄이면 그냥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둘째는 좁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구약 성경 중에서도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권의 책을 말합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토라”라고 말합니다.  토라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구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겨집니다.  셋째는 신학적 의미에서의 율법입니다.  즉, 신학적으로 “복음”과 반대 되는 뜻으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도리입니다.  율법이란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되는 모든 계명들을 말합니다.  복음은 믿음으로써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완벽하게 지킴으로써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는 법이지만, 율법은 잘못된 것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법입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내용은 십계명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하셨을까요?  아마 넓은 의미에서의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율법이 결코 폐지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17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율법을 끝까지 사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대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혹시라도 율법을 손상시키지는 않을까 감시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건 이유도 바로 율법을 사수하겠다는 취지입니다.  두 번째 무리는 율법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폐지시키시고 아주 자유분방하게 살도록 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을 꼭 지켜야만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속죄 보다는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만 베푸시고 법은 무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 경고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7-18절)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겉으로만 지키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대로 율법을 무시하고 없애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13,15, 23,25,27,29)  그러나 그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外飾的 으로 지키려 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지, 결코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신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에 있어서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 以上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은 영원합니다.  그 가치가 영원하고, 그 역할도 영원하고, 그 효력도 영원합니다. 
 

율법의 불변하는 역할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율법의 역할입니다.  율법은 죽은 법이 아닙니다.  과거의 법도 아닙니다.  율법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의미가 있고, 미래에도 의미가 있는 영원한 법입니다.  율법은 지금도 전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율법의 역할은 삶의 표준으로써의 역할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지시해 주는 영원한 規範입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려 일 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하신 아주 중요한 일은 율법을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출23:24)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의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삶의 표준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삶의 표준은 신앙의 표준입니다.  인간에게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뭔가 섬깁니다.  그런데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각자 소견에 좋은 대로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놀란 것이 있지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입니다.  제물을 바쳤는데 도대체 어떤 신에게 바쳤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냥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섬기는 것들을 보세요.  어제 삼양동 쪽에 갈 일이 있어서 지나갔습니다.  길옆에 보니 깃발이 세워져 있는데 간판이 희한합니다.  “天地神明”이라고 썼어요.  여러분은 천지신명이 누군지 아십니까?  도대체 천지신명이 어떤 존재이며, 성품은 어떠한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이 어떠한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냥 이름만 붙여 놨어요.  우리 주변에 그런 종교가 무수히 많습니다.  산신령, 용왕, 칠성당, 천신, 지신, 고목나무 귀신, 염라대왕, 대들보 귀신, 집터 귀신, 부뚜막 귀신, 장독대 귀신.... 인천의 어떤 점쟁이는 맥아더장군 귀신이 붙었어요.  곰방대와 썬글라스를 제단 위에 갖다 놓고 점을 쳐 줍니다.  육갑을 떨고 있어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無神論 철학도 마찬가집니다.  자기가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할 만큼 유능합니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디까지 가 봤어요?  겨우 I.Q. 200도 안 되는 머리통으로 하나님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신앙의 표준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방황합니다.  종교는 있어도 허황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고을에 관리가 부임해 갈 때에 미신적으로 날을 잡아서 부임한다든지 하는 행위는 백해무익한 허황된 짓이니 금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無知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낼 만큼 유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생을 연구하고 탐구한다 해도 하나님을 알아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바른 신앙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인격을 가지고 계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는지, 개인이나 국가, 혹은 가문이나 민족에게 어떤 간섭을 해 오셨는지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4-28)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1-12)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십니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관자이십니다.  역사를 움직이고,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물론,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의 운명까지 좌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유일무이하신 참 神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할 일은 중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두 번째 삶의 표준은, 삶의 표준입니다.  율법은 신앙뿐만 아니라 삶의 표준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합당한 삶인가?  성경대로 살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야 될 모든 가치관을 제시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가정이란 무엇인가?  직업이란 무엇인가?  재물이란 무엇인가?  친구는 누구이며, 이웃은 누구인가?  결혼이란 무엇이며, 자녀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육체는 무엇이며, 영혼은 무엇인가?  생명은 무엇인가?  통치자는 누구이며, 백성의 의무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가?  모든 삶의 표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 몰라서 못 사는 일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삶의 표준이 되는 것은 그대로 살면 축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7-8,1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율법의 두 번째 역할은 심판의 도구로써의 역할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심판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 심판이 내려졌고,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게, 애굽 왕 파라오에게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11:4)  보세요!  우리 시대에 독재자들이 다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부정부패자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큰 소리 치던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혹시 법이 바뀌는 바람에 세상법의 심판을 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법은 수시로 변합니다.  어제의 죄가 오늘은 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온갖 나쁜 죄악들이 처벌할 법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불량 식품을 만들어 팔아도 처벌이 없습니다.  간음을 해도 무죄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절대 기준은 변하지 않아요.  즉, 하나님의 율법은 변치 않는 심판의 표준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8)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불변하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신앙과 삶의 불변하는 표준이요, 심판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을 변질시키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의 완성 : 그리스도와 율법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로, 주님은 율법의 최종적인 해석자요, 완전한 해석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저주 받을 자들로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외형적인 규범으로만 삼았습니다.  영적인 규범으로 삼지 못했어요.  그래서 율법을 겉으로 지키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율법의 해석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치중했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 대신 하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해서는 메주알고주알 따지고 따졌습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6:9)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제6계명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임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제7계명에 대해서는 마음의 음욕까지 간음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제5계명에 대해서는 고르반의 규칙으로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율법 해석과 적용은 바리새인들의 외형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율법은 겉모양을 규제하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영혼을 제어하기 위한 법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해석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최종 해석자요, 적용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둘째로, 제사법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예수님으로 완성된 가장 중요한 법은 제사법입니다.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는 다 짐승을 희생시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성막의 규례도 마찬가집니다.  그 핵심 제물은 항상 소나 양 같은 짐승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평생 지은 죄 값을 소나 양 한 마리를 죽인다고 갚아지겠습니까?  만일 지금 죄를 짓고 감옥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을 풀어주기 위해서 소나 양을 잡는다면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성경도 그 점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  짐승은 결코 사람의 죄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드려졌던 모든 제사 형식은 하나의 상징이요, 비유요,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그러면 그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구약 시대에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제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구약적인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실체가 나타났는데 그림자와 모형을 행할 필요는 없지않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완전한 제물입니다.  구약의 속죄가 일시적이며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속죄는 영원하며, 실질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상징이 아닌 實體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한 이행자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분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러한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轉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義의 轉嫁라고 하는데, 교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반드시 지켜야만 될 법입니다.  법은 완전하게 다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열 가지 법이 있을 때, 아홉 가지만 지키고 단 한 가지만 범해도 여전히 범법자요 죄인이 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 자체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 이후로 아담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요, 모든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완전한 의인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로 거기서부터 믿음의 도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이런 죄인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의는 주님의 속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만 의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완벽하게 지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을 지켜주신 것이 효력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 중에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한 속죄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킨 자로써의 의로움까지 덧입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허물을 용서받는 의로움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전한 이행자로서의 의로움까지 덧입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완전케 한다는 단어를 영문 성경은 여러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은 “fulfill”(KJV)이란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의무, 약속 따위를 이행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성경은 “achiev”(JB)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성경은 “accomplish”(NIV)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미완의 상태에서 완성된 상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 세 단어에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의미가 충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이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목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주님은 미완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킨자로서의 의로움을 전가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지만 그래도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할렐루야! 

  율법은 영원합니다.  율법은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윤리의 표준입니다.  또한 심판의 도구입니다.  주님은 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은 심판의 도구로써보다는 삶의 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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