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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떡 반죽 그릇 - 하나님의 나라 (눅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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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호 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여러분은 평소에 꿈을 자주 꾸십니까? 저는 꿈을 잘 꾸지 않지만, 꿈을 많이 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꿈을 그리 대수롭잖게 생각하지만, 미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꿈자리가 사나워 불안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를 때마다 늘 그쪽을 지나다녔지만 평소에 눈에 잘 띄지 않던 ‘꿈’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교보문고 인문코너 14번에 가면, 꿈 해몽이나 꿈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꿈을 정신과학적으로 연구한 학문적인 책도 있지만, 미신(迷信)적인 꿈 해몽이나 무속적인 신앙과 관련된 꿈 이해에 관한 책들이 더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에스라성경학교에서 수요일에 강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살아보기’라는 공부반에서 꿈에 관련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4족장이었던 요셉이 소년 시절에 꾸었던 꿈과 관련된 질문이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하나는 요셉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꾸었던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 하나의 질문은, 만일 요셉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라면, 그는 과연 그 꿈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자기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고, 또 하나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입니다(창 37, 5-7 ; 9).

요셉의 인생을 보면, 그가 소년 시절에 꾸었던 두 가지 꿈은, 평범한 하나의 꿈(dream)일수도 있었지만, 그의 꿈(dream)은 그의 인생의 비전(Vision)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만일 동일한 질문을 드린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답은 무엇입니까? 제가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셔야 바른 답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의 질문은 의도는, 요셉은 꿈대로 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바꾸며 산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요셉은 소년 시절의 꿈을 이룬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그는 자신의 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꿈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바꾼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졌지만, 그 힘으로 자신의 꿈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을 다스리고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에게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의 잘못을 눈물로 용서했습니다. 조카들까지도 양육하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요셉은 꿈대로 산 사람이 아니라 꿈을 넘어서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창 50, 15-21). 하나님 앞에서, 복음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창 50, 20).

저와 여러분에게도 바꾸어야 하는 꿈과 비전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우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복음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보면 매우 혼돈스럽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으면서 실망하고 고민하고, 좌절하였던 것과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마 11, 1-5).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심각한 절망과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오리이까?” 즉, 그가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오는 갈등과 회의, 실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 기대상이 잘못된 것이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선포되고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잘 못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꿈과 비전 때문에,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마 5, 13-16).

여러분은, 높은뜻 숭의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높은뜻 숭의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 보시기에 건강하고 좋은 교회가 된다고 해도, 높은뜻 숭의교회가 이 시대와 한국교회의 꿈과 비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높은뜻 숭의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우리의 목적도 아니고, 자랑과 비전도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일 뿐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3년 전에 개척하면서 우리가 품었던 비전은, 높은뜻 숭의교회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개척비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교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교회의 개척비전입니다(마 6, 10). 높은뜻 숭의교회의 존재 이유가 높은뜻 숭의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인 미션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마 6, 10).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높은뜻 숭의교회의 궁극적인 미션이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그것은 곧 저와 여러분 개인적인 삶의 미션과 존재이유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꿈과 비전이 복음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적인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미래적인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내 삶의 한 복판에서, 이 땅에서,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재적이고 실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바로 내 삶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주소지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또 장소적으로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엔토스 evnto,j)있는 나라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7, 20-21).

이 말씀이 어려운 말씀 같지만, 아주 분명하고 쉬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나라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구름 타고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심판의 주로 임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 바로 그곳에 임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언제든지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재적(現在的)이고 실재적(實在的)인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계신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가 누구든지 인생의 절망과 좌절, 종교적인 절망과 좌절, 사회적인 절망과 좌절을 넘어서는 치유와 인간회복의 사건이 일어나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 나라 비전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나라”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여전히 하늘에서 큰 이적과 권능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홀연히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를 만나는 황홀한 영적 세계의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꿈꿉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하나님의 나라는 지나간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마 24, 36).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던 주님은 그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것을 거절하시고, 산 아래로 내려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미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영적인 어떤 세계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꿈과 비전을 복음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철저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비유인 ‘여인과 누룩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철저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상성(日常性)을 보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을 여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가치변화로 여성의 존재가치가 많이 회복되었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나 종교의 가치인 유대주의(Judaism)는 철저한 남존여비와 가부장적인 가치관이었습니다.

여인은, 힘없는 소자(小子)에 불과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예속된 존재였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된 재산목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여성은 언제나 남성보다 더 부정(不淨)한 자로 취급받았습니다(레 12, 1-5). 여성은 토라를 배우는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이와 같은 소자에 불과한 여인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主人公)으로 등장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평범한 여인이 행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가사(家事) 일’, 자신의 떡 반죽 그릇에 가루 서 말을 붓고 그 가루에 누룩을 넣어 반죽해서 그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는 그 일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과 일상성(日常性)입니다(눅 17, 21).

이 비유에 나오는 女人이 누굽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여러분이 곧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라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나의 극히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평범하게 일하는 그 일상적인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내 떡 반죽 그릇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겁니다. 우리가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중에서 임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나라도 아니고, 저기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바로 내 떡 반죽 그릇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 청년들이, 열광적으로 부르는 CCM 노래가사를 들으면서 매우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노래를 같이 부르지 않습니다. 그 노래들이 저를 슬프게 하는 이유는, 그 노래 속에 지금 여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열광하고, 그들의 힘과 정열을 쏟아 붓고 마음과 생각과 꿈을 거기에 두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보라 주–님, 구름 타시고–나팔 불 때에–다시 오–시네. 모두 외치세– 이는 은혜의 해니, 시온에서 구원이 임하네”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사가 저는 너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목표와 이유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임할 미래적인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라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나간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한 번도 이 땅에서 이루어진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기대하던 종말적인 신앙은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극단적인 시한부(時限附) 종말론자들의 예수님의 공중 재림 기다림 역시, 헛된 거짓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애쓰고 힘쓰고 땀 흘리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힘을 다해 기도해야할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늘 하는 여인의 일, ‘떡 반죽 그릇’ 속에 현재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비유에서 말하는 누룩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가루 서 말을 전부(全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이 무엇일까요? 그 누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누룩은 온 인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입니다(요 14, 6).

여기서,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이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하였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成長)’이나 ‘확장(擴張)’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뜻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도 아니고 ‘확장’도 아닙니다. 성장이나 확장의 의미라기보다는 ‘변화’의 의미입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그 가루는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이 가루의 성질(性質)과 맛을 바꿉니다. 근본적인 변화(變化)가 일어납니다. 문제는, 좋은 누룩이어야 복음적(福音的)인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하신 겁니다(막 8, 15).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의 반죽 그릇에 들면, 외식(外飾)하는 자가 됩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자랑합니다. 세리와 창기와 중병환자들과 같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는 교만과 그릇된 선민사상에 빠져듭니다. 헤롯의 누룩이 들면, 거짓과 술수와 선지자와 의인을 죽이는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누룩이 들어오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도 바리새인과 같이 변화되고, 헤롯과 같이 변화되고 맙니다. 그들처럼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누룩이 들어오면, 내 삶의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리와 창기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됩니다. 삭개오처럼 그 인생이 바뀌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인종의 장벽과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서 사람을 살리고 사랑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과 차별의 벽도 무너집니다. ‘내 가족’과 ‘네 가족’의 차별과 구별의식도 없어집니다. 피부 색깔이 달라도, 나라와 민족과 종족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전에는 한 식구가 아니었지만 한 식탁에 앉아서 같이 밥 먹는 한 식구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장 잘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밥상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초대한 밥상에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절대로 함께 앉아서 밥 먹을 수 없었던 ‘세리들’과 ‘창기들’이 잔치상의 주인공으로 초대받았고, 그들이 용납되었고,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기쁨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상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거지요.

저와 여러분의 떡 반죽 그릇에,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누룩’이 들어 있다면, 분명히 그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모든 가루는 전부 부풀게 되어 있고,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시간이 걸릴지는 모릅니다. 가루 속에 든 누룩이 가루 속에서 숙성이 되면, 그 가루의 성질과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회복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한 사람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13, 45-46).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핵심은 내 소유를 다 팔아서 살 만큼 ‘값진 진주’가 과연 무엇이냐에 이 비유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이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고, 여러분이 평소에 하찮게 여기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신분도 천하고,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깨끗지 못한 사람, 나와는 다른 사람, 같지 않는 사람, 외모도 그렇고, 부하지도 못한 가난한 그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소자(小子)와 같은 그 사람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값진 진주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 값어치를 아는 사람과 그 곳에는 하나님 나라의 고귀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치전도(價値顚倒)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 받은 김창기 선교사님 가족이 약 한 달가량 머물기 위해서 일전에 귀국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인도네시아에서 15년 째 사역하고 계시는데, 지금은 살라띠까 시에 있는 사띠와차나 기독교대학에서 교수 사역과 오지 목회자 섬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선교지를 방문해서 목사님의 여러 사역지를 돌아보았지만, 제가 제일 마음에 두었던 일은, 목사님 가정에서 가사 일을 하며 지내는 ‘샤르미’라는 자매입니다.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목사님 댁에서 5년 쯤 같이 지내면서 일하고 있는 자매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 중에, 목사님 가정에서 샤르미 자매가 너무 성실하고 착해서 시집갈 때면, 시집을 보내주어야 할 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샤르미라는 그 자매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Muslim)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저는 김 목사님의 인도네시아 선교사역의 일 번지는,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도 아니고, 신학교도 아니고, 오지 목회자도 아니라, 김 목사님 가정에서 일하고 있는 소자 같은 여인 ‘샤르미’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도네시아 선교사로서의 목사님 사역의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무 시시한 일일까요? 그러나 저는 정말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일상적인 삶의 ‘떡 반죽 그릇’이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내 떡 반죽 그릇 속에, 소자일지라도 그가 바로 천하보다 귀한 값진 진주와 같은 존재임을 발견하고, 내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를 얻고자 하는 마음과 사랑과 용서, 그리고 그를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누룩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떡 반죽 그릇 속에 복음의 누룩이 있으면, 우리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사건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얻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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