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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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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알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 15-19>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이 본문은 생각을 깊이 해 보면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 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믿음을 좀 더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즘 말로 하면 "주님 나 예수를 잘 믿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인데 열두 제자는 지금 삼년은 채 못되었을지라도 그 동안 내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함께 생활을 했고, 또 시간 시간 예수님께서 떠 먹여주듯이 가르쳐줘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쯤 되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잘 알고 잘 믿겠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는가 봅니다. 즉 잘 믿고 싶었는데 잘 믿어지지 않고, 무언가 제대로 믿고 싶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에도 이렇게 문제가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더 잘 믿어 나가야 될 사람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여 작년보다 금년, 금년보다는 내년, 믿음을 더해 주소서라고 간구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믿음을 더하소서"이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원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를 본문이 가르쳐 주는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I. 은혜로운 믿음 (1-4절)

제자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은혜로운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믿음은 은혜로운 믿음이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은혜로운 믿음은 우리가 은혜를 받지 않고는 가질 수 없는 믿음인데 바로 그런 믿음을 더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1) 조심하는 은혜 (1-3상반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예수께서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그 중심을 벌써 아시고 이런 믿음이 더 있어야 되겠다 싶어 말씀해 주신 것이 은혜로운 믿음인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조심하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실족케한다는 것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고, 세례 받고, 집사된 사람 혹은 권사, 장로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런 집사가 있는 교회는 난 안나가겠다, 저런 권사가 믿는 예수 나는 안 믿겠다"하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치 못하니까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만약에 실족케 하면 화가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실족케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하면, 나 때문에 교회 안나오고 그 결과 믿음을 떠나고 그 영혼이 파멸되어 지옥 가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짐 받아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는 것이 오히려 낫고 영혼이 파멸되어 지옥에 가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즉 조심하는 은혜야말로 우리가 첫째로 받아야 할 은혜라는 말입니다.


2) 경계하는 은혜 (3중반절)

"너희는 조심하라"한 다음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단계는 나 때문에 상대방이 실족하는 얘기지만, 둘째 단계에서는 상대방이 죄를 지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럴 때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선한 일을 하면 잘 한다 하며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만 하는 것은 다행입니다. 손가락질을 하고 헐뜯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은 일, 죄짓는 일에는 얼마나 호기심이 많고 전염이 빠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내가 안 짓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계해야만 합니다.

경계하라는 말씀은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군인이 어떤 장소에 진을 치면 진을 치자 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경계입니다. 적이 들어왔다 하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내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아간의 죄를 생각하면 설명이 더 이상 필요치 아니합니다. 이 죄에 대해서 죄의식을 새롭게 하고, 강하게 하고, 경계하는 것은 은혜 받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경계하는 은혜는 조심하는 은혜 이상으로 꼭 받아야 할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3) 용서하는 은혜 (3하-4절)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가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세 번째는 용서하는 은혜를 가르치십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절대로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합니다.

첫 단계로는 조심하는 은혜는 나 때문에 상대방이 실족할까 조심하라는 것이요, 둘째 단계는 나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죄 지었을 때 경계하라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저 사람이 내게 상당한 손해를 끼쳤을 때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즉 잘못한 줄 알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잘 못한 줄도 모르고 회개도 안하고 제가 잘했다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회개하노라 할 때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일곱 번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한마디가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말씀을 하셨다고 천하만민이 회개 없이도 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게만 용서가 됩니다. 끝까지 자기가 잘 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용서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몇 번이나 용서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루 일곱 번 네게 죄짓고 손해 끼치고 돌아와서 일곱 번 회개하노라,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때 마다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즉 회개만 하거든 계속해서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한 번은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은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늘 한번은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우리는 설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계속 용서해 주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려면 은혜 받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은 완전히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해 주기는 하는데 그 다음에는 죄짓고 와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잘 못을 빌면 그 때 우리는 과거를 들추어내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언젠가는 그러더니 또 그러느냐고 하면 이것은 과거를 용서 안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없었던 것처럼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백지화 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끗이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못 받고 우리들의 감정과 기분을 갖고는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할 때 제자들의 중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이런 은혜 즉 용서하는 은혜를 받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 번째로 받아야 할 은혜는 용서하는 은혜입니다.

II. 충성하는 믿음 (5-10절)

1) 생명을 건 충성 (5-6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제자들이 노골적으로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충성하는 믿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충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충성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숨걸고,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너희가 충성하려면 태산 같은 믿음, 백두산 같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 그런 말씀 안 하셨습니다. 태산 같은 믿음이란 하게 되면 믿음의 부피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부피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또 반석 같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도 안 하셨습니다. 강도가 강한 것을 가리킬 때 반석 같은 믿음이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성에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 필요한데 겨자씨를 예수님이 왜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는 중에 콧김에 날아가 버릴 정도입니다. 곧 눈 나쁜 사람은 잘 보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작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에 떨어지면, 곧 땅에 자기 생명을 투자하면, 생명을 걸고 땅에 심기어지면, 거기서 싹이 납니다. 그 다음엔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는데 그 나무에 지나가는 새가 깃들일 정도까지 큽니다. 조그만 나무에는 새가 깃들지 않습니다. 조그만 씨앗에서는 큰 나무가 된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 뽕나무더러 바다에 심기우라 해도 그대로 되고,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되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에는 그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충성하려면 바로 이런 생명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 무슨 생명을 걸고,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느냐? 산 믿음,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충성할 때 기적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생명을 건 충성이 주님이 바라는 충성이요, 우리가 해야 될 충성입니다.


2) 계속적인 충성 (7-8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충성을 할 때에는 목숨을 걸로 충성, 생명을 걸고 충성은 살기 아니면 죽기로 하는 충성을 해야 되는데 그 다음에는 계속적인 충성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충성하는데 한 번은 하기 쉽습니다. 일년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주인이 그만하라 할 때까지는 계속적인 충성은 쉽지 아니합니다.

어떤 집에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이 밭에 나가 하루종일 일했고 또 잠깐 쉬는 사이에 양을 쳤습니다. 즉 밭을 갈거나 양을 치며 하루 종일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수고했다. 이제는 쉬고, 먹고 마시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계속해서 종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충성입니다. 음식을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도 상을 차려서 같이 먹자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 수종들어야 합니다. 끝날 때까지 계속 충성, 주인이 그만 하라 할 때까지 충성입니다. 결국 밖에서도 충성, 안에서도 충성한 것입니다. 일년 이년은 쉽고, 한번 두 번은 쉽지만 주인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바쳐야 할 충성이라 생각합니다.


3) 끝이 좋은 충성 (9-10절)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목숨을 걸고 살기 아니면 죽기로 충성해야 되고 계속해서 충성해야 되지만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끝이 나쁘면 지금까지 좋았던 것이 소용없습니다. 처음도 좋게 시작해야 할 뿐아니라 끝까지 계속해서 좋은 것이 귀한 충성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키는 일 다했다고 사례금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종은 "내가 주인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면 내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끝까지 충성하고도 사례 한 푼 못 받아도 종은 원망과 불평은 고사하고, 겸손하며 끝까지 멋있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이런 충성을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러한 충성이야말로 우리가 바쳐야 할 충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III. 감사하는 믿음 (11-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 건강에 대한 감사 (11-14절)

열 문둥이가 나타났는데 예수님을 만났더니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옛날 예수님 당시나 그 이전에는 문둥병의 진단을 제사장이 했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졌으면 결레라는 제사를 드리고 천하에 선포를 해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을 겪고 울면서 지내온 사람인가 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문둥이를 집안에서 제일 먼저 쫓아냈습니다. 쫓아내지 않으면 동네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결국 돌아다니다 죽으면 송장도 안 찾아가는, 가정과 사회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병 때문에 불행을 안고 울며 울며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병원에 가서, 어느 약을 써도 또 무슨 일을 해도 안 되던 문제가 예수님에 의해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일년 내내 감기 한번 안 걸린다면 얼마나 감사할 조건입니까? 감사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2) 구체적인 감사 (15-1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다가 보니 어느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례했습니다. 말로만 감사하는 것은 사례가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고맙다고 하는 것도 사례가 아닙니다. 누가 내게 고마운 일을 해 주었을 때 사례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중 문둥병자 하나가 나았음을 알고 주님 앞에 나와 사례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 한 사람밖에 깨끗함을 받지 못했느냐, 다른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고마워하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감사하면 안됩니다. 마음으로만 감사해도 안 됩니다. 사례하는 실제적인 감사, 구체적인 감사가 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3) 믿음에 대한 감사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그를 만나 하시는 말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네가 오늘날 문둥병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느냐? 믿음 때문이요,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뜻입니다. 네가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도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바로 믿음 때문이다"고 밝히셨습니다. 믿음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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