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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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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광호 목사 (영생감리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1.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약속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까? 아멘. 그러면 말씀과 기도로 언약을 실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러분에게 혹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은 없습니까?
3. 어떤 일에 나의 욕심에 이끌리어 성급히 결정하고 판단하는 일은 없습니까?

씨받이라는 강수연주연의 영화를 아시지요? 제가 강수연이란 영화배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꼭 보고 싶었는데 보지를 못했습니다. 낮 뜨거운 장면들이 많이 나오기에 쑥스러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 영화가 미성년자 불가이더군요. 그러나 그 영화를 성인영화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영화는 과거 양반 사회속에서 약한 민초들의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반들의 대를 잇기 위해 씨받이가 되어야 하는 여인의 비극, 가난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기의 모든 자유의 삶을 포기했던 슬픈 이야기의 영화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래의 몸종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하갈에 대한 선입관을 지우시기 바랍니다. 바울에 의해서 우리는 이미 사래는 선이고 하갈은 악이라고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해석을 뒤로 하고 순수하게 창세기의 사래와 하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창세기는 사래와 하갈을 선과 악으로 대조시키려는 관점이 아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의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이 있습니다. 그는 노예였고 주인을 위해 대신 아이를 가져야 하는 씨받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15:4)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아브람과 사래의 성급한 불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노예의 몸을 빌어 자신의 수치와 모자람을 채워보겠다는 사래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신들의 판단이며 욕심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계속해서 사라를 사래로 부르고 아브라함을 아브람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 나의 판단과 성급한 결정들이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브람과 사래의 성급한 결정이 이스라엘에 평생의 올무가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인간의 섣부른 판단과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문제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겸손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응답의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십시오. “가장 빠른 길은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멘
성급함이 문제입니다. 조급함이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문제입니다.
결국 이것이 불씨가 되어 사래와 하갈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이 밴 여인이 아이를 배지 못한 여인 앞에 남산 만한 배를 내놓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사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하갈의 ‘배부름’이 여 주인 사래의 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왜 그녀가 학대를 받아야 합니까?
하갈에게 잘못이 무엇입니까?
잘못이 있다면 주인에게 이용당하는 도구로 씨받이가 되어 준 것뿐입니다.
그는 힘없는 여인에서 이용당하는 여인으로 산 것뿐입니다.
아이를 밴 여인의 자연스런 몸태가 교만하게 비춰졌다는 것뿐입니다.

하갈은 주인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자의 쓸쓸한 도피,
지금 그녀는 힘없이 이용당하고 쫒겨나 고통 받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이런 억울함을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합니까?
누가 이 고통 받는 여인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가까이에 부모 형제라도 있으면 실큰 울고 원망하고 하소연할 수 있겠지만 지금 하갈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갈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은 술로 가는 광야 길 샘터에서였습니다.
그녀는 지친 몸으로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는 순간 샘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샘터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딴 곳에서 짐승을 만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여호와의 사자 였습니다.
샘터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곳에서 하갈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땅입니다. 학대를 피하여 도망처 나왔지만 더 위험한 광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무서운 독을 가진 뱀과 전갈이 있을 뿐 아니라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이 같은 광야 길을 걷는 임신한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타는 목마름, 주인에 대한 서운함, 앞길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마저 지쳐버렸습니다. 이제는 욕하고 원망할 힘조차 없습니다. 불같은 분노의 마음도 맥이 빠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가 온 몸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갈을 하나님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강자의 힘에 눌려 학대 받고 쫒겨난 약자인 하갈을 하나님은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절망하고 고통 가운데 두려워하는 하갈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십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품으시는 사랑이십니다.
특별히 고통 받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은혜의 넓이와 크기와 높이와 깊이를 가히 짐작할 수 없는 풍성하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치치고 쓰러져 곤할 때 위로하시고 용기 주시는 풍성한 사랑이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하나님은 만나주셨습니다. 가장 힘들고 지친 시간에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을 때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던져질 때 거기서 하나님은 다니엘을 만나주셨습니다.

이방 여인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최초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주인에게 버림을 당하고 쫓겨난 하갈, 죽음에 내몰린 처절한 인생의 하갈이 하나님을 만난 최초의 여인이 되었고 오늘 최고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첫 번째 말씀은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입니다.

지금 하갈은 가나안에서부터 애굽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기에 물으시는 물음이 아닙니다. 그녀가 가는 길이 바른길이 아님을 깨우쳐 주심으로 바른길로 가기를 원하시기에 하시는 물음입니다.
하갈이 가는 길은 위험한 길입니다. 목적지인 애굽이 기다리는 것은 죄악 된 생활 뿐 임을 생각할 때 이 물음은 하갈의 길을 막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배의 자리에서 세속의 자리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하갈은 상한 마음과 아픈 감정을 가지고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우쳐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잠14:12 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너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우리는 모두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서 계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2. 두 번째 말씀은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갈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의 수하에 복종하라”?
그것이 싫어 피해 도망 온 하갈에게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라니!
이 같은 하나님의 지시는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피할 길을 주시지 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까? 항변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현실을 회피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문제는 거기서 도망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붙들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노력할 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를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문제는 더 큰 성장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돌아가라”는 말씀은 하갈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으로 들려 왔고 하갈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실제로 하갈은 주인에게로 돌아갔을 때 현실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제시해주시는 길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최선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 순종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활짝 열어 가는 복된 삶이 도시기를 축원합니다.

하갈에게 “돌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굴종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해지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너는 노예이니까 노예처럼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겸손히 섬김의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몰라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알기에 더욱 남을 받들 줄 아는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성공적인 인생의 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1. 문제를 긍정적으로 대처하라 2. 말씀에 순종하라 3. 겸손히 섬기라

3. 세 번째 말씀은 다정한 음성으로 하갈을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세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자손의 어미가 되게 해주시겠다.
두 번째는 하갈에게 이스마엘 이라는 자식을 주겠다.
세 번째는 이스마엘이 들 나귀처럼 거칠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갈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스마엘이라니 !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 아닌가? 이분이 나의 사정을 살피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를 이해하시고 계시며 내 아픔을 아시고 고통을 아시고 문제를 아시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하갈은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뵈옵게 되었다고 감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엘 로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주님을 만날 때 그녀의 상처는 치료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무너진 심령 어두웠던 마음에 밝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엘 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나 같은 사람까지도 당신은 줄 곧 보고 계셨군요! ”나같이 연약하고 이용당하고 고통 받았던 처지의 이방인 여인까지도 당신은 돌보고 계셨군요. 당신은 실로 노예, 이집트인,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보고 계셨군요 하며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엘 로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고통 속에 있었던 하갈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살펴주시는 엘 로이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학대하고 내 몰아도 하나님은 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헤아리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딱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하갈에게는 새로운 용기가 생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니 나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용기를 내고 일어서야 하리라 굳게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못난 자신에게도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그 샘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브엘 라하이 로이”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우물.
“브엘 라하이 로이”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우물.

“브엘 라하이 로이” 하나님 거기 계셨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떠는 초라한 여인을 위해 거기서 준비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거기서 피 흘리는 상처를 안고 분노의 가슴을 움켜쥔 여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거기서 절망하는 자의 신음 소리 같은 부르짖음도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셨습니다.
거기서(부엘 라하이 로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사망의 길로 가려는 여인의 앞을 막아 바른 길로 가게 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처럼 살아왔던 그녀를 오히려 축복하시는 풍성한 사랑으로 맞아주셨습니다.
하마터면 영원히 분노의 마음을 품고 살았어야 할 삶을 겸손히 섬기며 자기를 낮추는 성숙함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갈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앨로이의 하나님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브엘 라하이 로이’의 샘을 주시고 거기서 위로하시고 새로운 용기와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눈물 흘리던 삶이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원망과 미움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교만한 삶이 변하여 겸손한 섬김이 되게 하시는 브엘 라하이 로이(돌보시는 하나님의 우물)가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4년 7월 11일 주일낮예배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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