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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요 6: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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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자 : 손상률 목사 (후암교회)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먹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 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의 가자들은 몇 가지 사건에 공통적인 시각을 가지고 다같이 취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二魚)의 사건입니다.

디베랴 건너편 벳세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온 무리들에게 쉴새 없이 하늘나라의 도리인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 인가와 떨어진 빈 들판에서 허기진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무리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저희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그냥 돌려보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고 하였습니다(9절).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축사하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오히려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수는 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도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마 14:21). 이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남은 조각을 다 거두어 모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바구니 열 두 개에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12-13절).

오늘 뜻 깊은 맥추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어린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과 물고기, 그것을 받아 들고 축사하시는 예수님, 다 배불리 먹은 후에 거두어들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연상하면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값진 헌신의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본문 성경이 소개하는 오병이어의 이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건을 소개할 때 수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나 남았다는 이적의 결과를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능력과 사람들이 받은 축복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전제로 보리떡과 물고기가 예수님께 바쳐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

처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하고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군중 속에 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리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린 아이와 그가 드린 보리떡에 유의하여야 됩니다.

오천 명이 넘는 그 많은 인파 속에 이름 없는 한 아이는 숫자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존재이고, 그 아이의 손에 있는 보리떡과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내어놓기도 부끄러울 만큼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에는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며, 또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음식물 중에는 보리떡과 물고기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나 좋은 물질이라도 예수님과 상관없을 때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믿음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능력이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2)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손에 옮겨진 보리떡과 물고기는 그것을 바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것이 음식으로서의 가치 성이나 양적으로 볼 때 매우 미미한 것에 불가하지만 그것을 바친 소년에게 있어서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립니다’고 하는 신앙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내어놓은 많은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넣는 두 렙돈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누가복음 21:4에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비천하나 존귀하게 되는 것

사람들이 멸시해도 예수께서 알아주시면 존귀하게 됩니다. 범죄한 인간의 눈에는 옳고 그른 것과 좋고 나쁜 것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못 알아보았습니다. 그냥 갈릴리에서 온 목수 정도로 여겼습니다(마 13:5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살인 강도 바라바보다 못하다고 말했습니다(마 27:21).

오순절 이후 성령 받은 제자들이 온갖 능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전할 때도 사람들은 어부 출신의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며 멸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능가하게 하십니다(고전 1:27).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로운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Ⅱ. 주님이 행하신 능력의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14:19-20에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직접 행하여 보여 주신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요 동시에 기독교가 지니는 신비입니다.

(1)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작용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됩니다(막 9:22). 언제나 믿음에는 역사(役事)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사람이 원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주도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인(動因)이 되어 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입니다(고후 5:14).

여기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신 것도 먼저 그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발동되면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복음 6:34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배가 고파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든 어린 자식을 보는 엄마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길 잃은 양이요, 목자를 잃은 양은 꼴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양이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리떼들의 습격을 받을 위험에 방치된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떼를 불쌍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과 긍휼을 발동하셨습니다(요 10:11).

(2) 창조주의 능력이 행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이 생겨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1-3).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창조의 원인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3). 본문 말씀 11절에는 예수님께서 떡과 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신 다음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있으라”고 하시면 그대로 되게 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실 때 그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진 것입니다. 그 결과는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11절에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4:20에는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소외됨이 없이 다 풍족하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하였습니다.

(3) 기독교 복음의 신비를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는 오병이어 이적은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대표적인 이적으로 소개되어 주님의 능력이 과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떡을 먹은 자들에게 신령한 양식 곧 생명의 떡을 알게 하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27).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6:32-33).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 떡을 항상 주어 먹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34절).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였습니다(요 6:51).


Ⅲ. 축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알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손에 쥐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 곧이어 떼지어 앉은 무리들이 배부르게 먹고 즐기는 잔치 판이 벌어진 장면,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축복의 현장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감격스럽고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자고 하였습니다(요 6:15).

(1) 바쳐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였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실 때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의 굶주린 무리를 먹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서 받은 그 떡을 가지고 먹게 하였습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적은 양이고 무가치 한 것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주님께 헌신된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욕심꾸러기들은 제게 있는 것은 손도 대지 않고 다른데서 끌어다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적을 행하시기전 먼저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호렙산 불꽃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출 4:2). 엘리사를 찾아간 선지 생도의 아내가 남편이 지고 간 빚 때문에 두 아들이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엘리사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한 병 기름으로 이적을 베풀었고 그것을 팔아 빚을 갚은 다음 식구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였습니다(왕하 4:1-7).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간 엘리야도 그들 모자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구어 먹고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주의 종을 공궤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삼 년 반이 넘도록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공급하게 해주었습니다(왕상 17:10-15).

(2) 수용할 수 있는 그릇만큼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14:20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먹었다는 것과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축복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바구니에 차게 되었다고 할 때 이는 양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이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곧 모인 수만큼, 그리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구니의 크기만큼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이동을 할 때 항상 가죽으로 만든 물통과 마른 풀이나 갈대 같은 것으로 만든 바구니(광주리)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불결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율례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휴대하는 바구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것을 하나씩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열 두 개가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풍성하신 축복이 나타날 때 거기 나온 무리들에게와 제자들이 가진 그릇에 충만하게 채워졌습니다. 에베소서 1:23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주어지는 축복도 거기 나아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그릇만큼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 축복을 보존할 수 있는 비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그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받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선용하는 사람이 오래도록 누릴 수 있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과 물고기로 축사하여 나누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일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39-40에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음식도 골고루 나누지 못하면 가치가 없습니다. 많은 소득을 얻은 자가 공정한 분배를 하지 못하면 축복이 훼손되는 법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12절). 아무리 작은 부스러기라도 대수롭지 않게 하거나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될 때 허비하거나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그것을 감사의 자료로 삼아야 됩니다. 13절에 보면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한 통계와 기록으로 증거를 삼아 두고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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