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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 낚을 어부 (창 12:1~4, 고전 1:18~25,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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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창세기 12: 1 ~ 4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 전서 1:18 ~ 25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 복음서 5:1 ~ 11
  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로 밀려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가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대고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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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구원의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을 여러분 모두가 다 고뇌와 좌절과 절망 중에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 한 명이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것도 우리 땅도 아닌 남의 땅에서, 우리의 갈등도 아닌 남의 갈등 가운데서 희생을 당했습니다. 수렁에 빠져드는 세계정세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시 이라크는 깊은 바다입니까?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죽이는 걸 보면, 깊은 바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깊은 곳”을 우리 인간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갈등이 있는데, 그 갈등은 얕은 곳에서 생깁니까? 아니면 깊은 곳에서 생깁니까? 만약 인간의 세계에서 깊고 여유로운 사상과 높은 이상이 힘을 갖는다면, 이 세계의 갈등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갈등하고 싸우고 터지고 죽고 이런 것은 모두 우리 심성에, 역사철학에, 세계관에, 신앙에 깊이가 없고 얕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평생 동안 추구할 것은 인생의 깊이입니다. 삶의 깊음, 생각의 깊이! 위기가 닥칠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며 올바른 삶을 지켜낼 수 있는 인생의 깊이를 우리가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깊은 곳을 내가 찾았다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곳을 찾아 거기에 그물을 내린다고 해도 고기가 잡히는 건 아닙니다. 깊은 곳에서 물고기가 잡힌 이유는 그 깊은 곳이 예수께서 가리킨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곳이나 깊다고 다 물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그 깊은 곳에서 물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깊은 곳, 그곳에 다 생명의 역사가 있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생명의 역사를 만든다는 확실한 약속을 주어야 그 약속 때문에 고기를 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천지창조 역사를 보면서 한 가지 깨닫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닷새 동안에 천지와 거기 가득한 생물들을 다 창조하시고, 여섯째 되는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고서 인간들에게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엄청난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창조된 인간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여 닷새 동안에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꼭 하나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다시 세우면 됩니다. 증축도 하고 개축도 합니다. 땅이 갈라져도 다시 메우면 됩니다. 물이 오염되면 우리가 오염을 제거하고 더 이상 오염을 안 시키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닷새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마멸되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합니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 작은 나무 묘목을 심어서 큰나무로 자라게 만듭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개편과 재편과 회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 창조함을 받은 관리자가, 사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무너진 인간을 인간이 고칠 수 있습니까?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다 지금 이렇게 꼿꼿이 살아있지만 언제 무슨 방식으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수가 있습니다. 병들어 쓰러집니다. 누가 죽은 사람을 살려냅니까? 제가 무너지면 누가 세울 수 있습니까? 무너지면 누가 재건할 수 있습니까? 자연의 모든 삼라만상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인간만은 다시 세우지 못합니다. 인간을 다시 세우는 것, 그건 누구의 권한이냐 하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 허락도 없이 전쟁이라는 이유로, 체제라는 이유로, 이념이라는 이유로 무너뜨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엊그제가 6월 25일이었습니다. 6․25전쟁이라 이름하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수많은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괴로움, 그 상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라크에서 우리 한국 사람이 참수당한 그런 비극은 6.25 동란 중에는 무수히 벌어졌습니다. 그런 비극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라크 일로 온 국민이 되살리게 된 것입니다. 정부의 어려움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테러범의 위협이 있다고 해서 파병 결정한 것을 취소할 수도 없고, 국제적 자존심도 있을 거고, 보내자니 계속해서 테러의 수렁에 빠질 거고, 진퇴양난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새겨야 합니다. 사람을 낚는 일,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이 점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망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제2의 창조입니다.

오늘 봉독한 고린도전서에 있는 사도바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 인간 운명, 세계 운명의 가장 깊은 곳, 그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고통과 신음,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스승의 좌절, 하나님께 버림받은 아들의 운명, 절망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있는 곳입니다. 자랑스러울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이 세계의 가장 깊은 그곳, 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나의 인생을 맡기면 그곳에서 놀랍도록 풍성한 것을 낚게 됩니다. 새로운 인생을 건져 올립니다. 부활을 건져 올리게 됩니다. 성서는 그 십자가에 오면, 그 깊은 곳에 오면 부활의 생명이 보장된다고 약속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가리키신 곳에서만 물고기가 잡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깊은 그곳에서만 인간의 생명이 되살아납니다. 하늘의 약속이 있는 곳에서만 새로운 역사가 태동합니다. 그러기에 약속을 받지 못한 다른 곳에 아무리 그물을 던져본들, 그곳에서는 허무를 건질 뿐입니다. 약속이 있는 곳은 오직 한군데 십자가에 오면, 그곳에 그물을 던지면 반드시 되살아납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오늘의 구약 본문인 창세기의 이야기로 가 보십시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왔다가 하란에서 다시 떠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대아니 우르니 하는 이런 나라이름, 지역 이름은 우리에게 아주 어색합니다만, 최근에는 이라크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본적지가 어디냐 하면, 갈대아 우르입니다. 오늘날의 지도를 펴놓고 봤더니, 갈대아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의 근원지가 되는 바그다드의 동북쪽입니다.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의 원적지(原籍地)입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태어났고 할아버지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와 정착한 곳이 하란이라는 지역입니다. 하란은 현재 이라크의 북서쪽, 소수민족인 쿠르드 족이 사는 지역입니다. 한 450킬로미터를 이동하여 이사를 한 것입니다. 거기서 둥지를 틀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란을 떠나라.” 그때 나이가 7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떠나라 할 적에 어디로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떠나라고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내가 떠나 가야할 먼 곳, 바다로 치면 깊은 곳,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따라 떠난 아브라함은 가나안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온 지구상에 창대케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자손을 주겠고 그들을 통하여 뭇 백성의 구원을 이루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나안이란 깊은 곳,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 약속의 땅, 그곳에서 구원의 그물을 던져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 약속 하나를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는 무슨 약속을 믿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사람마다 다 미래를 향해 가고 있고,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미래의 꿈이,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미래가 넓고 깊고 높기를 기대할 수 있지만, 그것이 확실하려면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약속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기술문명도 발전시킬 수도 있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운명을 돌려놓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인간 역사의 가장 깊은 그곳에 그물을 던지면 반드시 부활의 구원을 낚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바울서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묻습니다. 그곳에 가면 살아 있는 기적이 있나요? 그들이 보기에는 죽음밖에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말합니다. 왜 죽으러 갑니까? 바보같이. 그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말합니다.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은 십자가 사건에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힘없고 무능한 십자가 사건에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부활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헬라철학에서 볼 때 십자가를 믿는 기독교 신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는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의 판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약속의 하나님은 우리더러 가라, 십자가로 가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부활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사랑과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염원과는 다릅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현실입니다.

이라크가 져야 할 십자가, 우리 한국이 져야 할 십자가, 미국이 져야 할 십자가, 십자가의 종류는 다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 세계가 똑같은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이라크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고, 미국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중요한 건 그겁니다.

각자 주어진 문화와 역사와 처한 현실에 따른 자기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모든 십자가는 예수의 골고다의 십자가에 이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 연결돼야 생명이 싹틀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올라오는 생명수를 마셔야 우리 삶이 풍요해집니다. 살 맛 나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까?

어젯밤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바꾸다가 불교방송을 잠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불교도들이 찬불가 하는 시간이어서 어떤 식으로 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승이 나와서 노래 인도를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멘트를 했습니다. “보살님들, 은행 하나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무슨 은행이냐 하면, 행복을 저축하는 은행입니다. 그래서 불행에 빠진 분들에게 행복을 대출해주고 싶습니다. 이자 없이 말입니다.” 찬불가에는 감동을 받지 못했지만, 그 여승의 말에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인생의 행복을, 세계의 평화를 담보할 은행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행복을 저축하는 은행, 혹은 생명을 저축하는 은행, 사랑을 저축하는 은행, 희망을 저축하는 은행, 그런 은행을 만들어서 불행을 당하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대출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승의 말대로 이자 안 받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한테는 이미 그런 은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행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이름의 은행입니다. 그 은행은 누구든지 값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그 은행에 맡기면, 필요할 때마다 값없이 이자도 안 받고 그냥 대출해줍니다. 그 은행에 자기를 맡기면 배당금이 나옵니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불의한 체제든 뒤틀린 사고방식이든 지배욕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십자가 은행에 투자하면 다 바꿔집니다. 사랑으로! 오늘날의 세상은 다 그 은행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행이 있다는 것을 다들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라크도, 미국도, 우리도, 저 북쪽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는데 체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데, 그들은 무슨 이유로 고통을 당해야 됩니까? 그 많은 무기들로 사람을 죽여서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민족이든, 나라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십자가로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이 약속 때문에 오늘 많은 사람들이 낚였고, 낚인 많은 사람들은 또 낚을 다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요 선교적 과제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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