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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선교명령 (사 43:1-7, 롬 6:3-8,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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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3: 1 ~ 7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내주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 북쪽에다가 이르기를 '그들을 놓아 보내어라' 하고, 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여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서신서 말씀: 로마서 6: 3 ~ 8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복음서 말씀: 마태복음 28: 16 ~ 20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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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람의 삶의 방향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흩어진 사람들이 한군데로 모여서 살게 되는 방향입니다. 또 하나는 모여 살던 사람들이 흩어져 살게 되는 방향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인 이사야서를 보면, 야웨 하나님께서는 핍박 때문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들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다 흩어진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모으겠다. 이제 모든 속박과 모든 억압을 끝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꾼 꿈은 뭐냐 하면, 내 땅에서 살아봤으면, 우리 땅에서 함께 모여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제대로 자기들끼리 모여서 평화롭게 산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윗이 민족을 통일하고 솔로몬 때 풍요를 누린 것을 빼고는, 강대국의 억압 아래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고,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이름을 붙인다면, 저는 디아스포라의 역사, 흩어져 산 사람들의 역사라고 붙이겠습니다. 그들이 오죽했으면 동서남북에서 자기들을 불러다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함께 살게 해달라고 간구했겠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스라엘처럼 서로 오고갈 수 없는 곳에 떨어져서 이산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사야처럼 간구해야 합니다. ‘불러 모아 함께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떨어져 있는 것, 이산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속과 겉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속에 있는 나와 겉에 있는 내가 떨어져 살면 나는 분열된 인간입니다. 둘이 하나여야 제대로 된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만 인간 사회에는 마음 따로 몸 따로 사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기도는 ‘우리를 합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갈라진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서에 보면 “구원의 복음을 들고 흩어져 세상 끝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말씀은 모여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신약의 말씀은 복음을 들고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다 전파되고 이 세상이 끝나면 우리 모두는 다시 하나님 안에 모이게 됩니다.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입니다.

모아들이시는 하나님, 모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불어넣어서 다시 흩어지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두 방향의 역사가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말씀, 그리고 마태복음의 말씀이 연결됩니다. 이 연결 고리에 대해 오늘 본문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주 잘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모이고 흩어지는지 아십니까? 모이는 장소는 구원의 장소입니다. 그곳이 이름하여 십자가란 곳입니다.

그곳에 오면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면 그 새로운 생명의 힘을 가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다시 전파하라고 하시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입니다. 부활 이전까지는 모이고, 부활한 다음에는 흩어져야 합니다.

저는 동양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철학이나 윤리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유학(儒學)의 이론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과 양은 해와 달, 남과 여와 같이 서로 다른 성질입니다. 그런데 자연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음양의 조화는 다섯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오행입니다. 요즘에 오행 식사도 있구요, 오행 생식도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또 오행을 본따서 삼강에다 오륜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화요일은 불인데 방향으로 보면 남쪽이고 그리고 계절로는 여름입니다. 수요일은 물인데 방향은 북쪽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상하질서를 따라 흐르는데 이건 겨울입니다. 목요일은 나무인데 방향은 동쪽이고 계절은 봄철, 생명이 움터나는 계절입니다. 금요일은 쇠인데 방향은 서쪽입니다. 금이라는 것은 결실을 뜻해서 계절로는 가을입니다. 화 수 목 금이 남 북 동 서, 여름 겨울 봄 가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토요일은 중심부로서 땅을 가리키는데, 동서남북 네 방향, 네 계절이 땅으로 모여서 열매를 맺고 사시사철을 구현합니다. 이게 오행이랍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동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일주일은 7일입니다. 일곱 개 요일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이 세상의 사리, 조화로운 구조입니다. 일요일과 월요일, 태양과 달, 이것이 조화를 이루면 그 조화의 결실이 땅에서 맺힙니다. 문제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땅에 있는 사계절, 이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하늘과 땅의 조화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조화의 결과가 역사입니다. 하늘과 땅이 잘 맺어지면 세상의 역사가 훌륭한 역사가 되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면,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지면, 비극이 있고 좌절이 있고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종교의 목적도 그렇지만, 기독교의 목적도 하늘과 땅을 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합니까? 땅에서도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의 한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방법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땅에 있는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그냥 단순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망과 불안으로 차 있는 인간의 가슴이 되셨습니다.

사람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상대방의 눈으로, 상대방의 머리로, 상대방의 가슴으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역지사지입니다.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구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것, 인간의 눈을 가져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최종 단계는 십자가라 이름하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역지사지의 완성입니다. 그 위에서 구원의 빛, 부활의 생명이 피어났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과 세계와 화해하셨다고 합니다. ‘화해하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탈라게’입니다. 그 뜻은 뭐냐하면 입장을 바꾸었다, 처지를 뒤집었다, 우선순위를 바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화해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 인간의 입장에 서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최고로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데에 처하셨습니다. 성서는 그걸 가르켜서 화해다 이렇게 말합니다. 고부간의 갈등을 화해하는 방법, 남북의 갈등을 화해하는 방법, 이세상과 오는 세상이 화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화해가 시작됩니다.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은 이제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의 입장에 서게 하려고 하십니다. 내가 인간을 경험했으니 이제 구원받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심어 주십니다. 하나님처럼 기쁘게 살게 해 주십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부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가슴을 경험하게 되는 곳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를, 이세상의 비극과 모든 것을 극복한 다음에 나오는 생명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으신 분들 부활에 동참하십시오.

그러나 그 부활 전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죄의 원인은 두 가지라고들 말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좌절과 절망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절망도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십자가 뒤의 부활은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묶어주는 끈, 십자가와 부활을 묶어주는 끈, 죽음을 새로운 생명에 이어주는 끈,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에 서게 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 끌어주는 끈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 끈을 가진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죽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증표입니다. 교만과 두려움을 십자가에 걸어두고 부활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증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듯이 인간으로서 하나님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가졌다는 증표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온 세상에 가서 전파하여라. 새로운 생명이 있다고 전파하여라. 그리고 구원의 새 세계가 있다고 전파하여라. 내가 너희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통 경찰이 순찰을 하다가, 한곳에 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더니, 차에 시동은 켜져 있는데, 차 안에는 남자 둘이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닫힌 차 안에서 산소 결핍으로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차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경찰은 하는 수 없어서 유리창을 깨고 문을 열어 사람들을 끌어내고, 구급차로 불러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다음날 회복된 두 사람이 경찰서에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어제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당신들이 유리창을 깼으니 수리비를 달라고 했답니다. 이건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도와주었더니 도리어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하늘을 향해서 지금까지 산 것은 고맙지만, 그러나 들인 경비는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로 가는 길은 값이 없는 길입니다. 보상과도 상관없는 길입니다. 부활로 가는 길도 값없이 주어진 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값을 치룬 길입니다. 그래서 고귀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교만과 절망은 십자가에서 다 벗고서 나와 함께 온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하늘 양식을,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하고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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