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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 (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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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휴식을 제공하는 업종이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찜질방이 전국적으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공기 오염이 심한 대도시에는 산소방이라는 곳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곳을 찾는 이유는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함입니다.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영업이 번창하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의 삶이 피곤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인생의 수고로움은 현대인들 뿐 아니라, 먼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라멕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노아라고 붙였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에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라멕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 5장 7절에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 90:10)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피곤한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짐을 벗을 때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불행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 세상을 만드셨을 적에는 죄가 없었으나 아담이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났고 땀 흘려 수고하며 살게 되었으며,  이 고단한 운명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대물림되었습니다. 더구나 인간들은 육신의 수고로움 뿐 아니라, 그 영혼도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균이 우리 몸에 침투해서 질병이 생겨나듯이, 아담에게서 유전된 원죄로 인해 인간의 삶에 온갖 모순과 사악함이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들의 삶에는 모순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마음은 샘이 끊임없이 물을 솟구쳐 냄같이 악한 생각을 발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은 평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살아갑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는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과 미움과 살인이 지속되어 왔는데, 그 원인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안고 있는 내적인 모순과 부조화, 악한 생각이 밖으로 표출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아무리 많은 법과 제도를 만들지라도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그 심령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양심이 죄책에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무지에 빠진 인간들은 삶의 모든 불행이 죄로 인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안해 낸 해결책 가운데 하나가 종교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한가지로 고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불교를 열었습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욕심을 버리고 자비를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살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불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속수무책입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없습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세상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종교들이 말하는 것은 수양을 통해서 선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죄의 심각성을 말합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죄가 무엇인지 일러 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죽음뿐 아니라, 이 세상에 횡횡하는 저주와 질고와 재앙과 전쟁과 살인과 미움과 같은 사악한 일들이 다 죄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죄가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이와 더불어 성경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생들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양이나 소를 잡아서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렸는데,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씻기고도 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라도 흰눈같이, 양털같이 정결하게 씻겨 주십니다. 예수 믿지 않기 때문에 죄 사함 받지 못하는 것이지, 믿기만 하면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1장 7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남에게 종된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자유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다 죄의 종된 자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사셔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고 하셨습니다.

종에게는 자유가 없으므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듯이, 죄의 종이 되면 죄가 시키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시키는 것은 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욕심에 따라 살고 허탄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의 영향력 아래서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죄를 짓되 자연스럽게 짓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리 만무합니다. 죄책이 그 양심을 짓누릅니다. 우리 역시 이전에 죄의 종이었던 때에는 죄가 시키는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가 시키는 대로 살지 말고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진정한 영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성도들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말씀합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심으로 모든 죄의 무거운 짐을 벗고 참 평안과 쉼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때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행복을 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니 만물이 사람에게 복종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것이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을 뵙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아내 하와와 함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하나님을 뵙는 것이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은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내셨고, 땀 흘려 수고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불화하자, 피조세계도 사람과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사람과 짐승들 사이에도 평화가 깨어져서 서로를 무서워하며 피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인간들 사이에 반목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형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아담이 하나님과 불화한 결과 임한 저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을 인생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분쟁하며,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불화하며 미움과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지게 된 것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불평등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기에 앞서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이에 불화를 해결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불화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불화한 자식의 마음이 괴롭다면 하물며 인생이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불화하고서 어찌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모든 영의 아버지가 되십니다(히 12:9). 그러므로 아버지와 불화한 자식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듯이,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생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의 담이 높고 견고하게 쳐졌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과 원수가 되어도 괴로운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서야 어찌 마음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곧 하나님께서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어 미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떠나간 편은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범죄한 인간 편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순서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하니 화해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간들과 화해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시는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려면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화목하셨다는 증거로서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 놓았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으셨습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요, 외인도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 이하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아무리 주인의 인정을 받더라도 역시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둘째 아들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서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에 의기양양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아니하는 먼 나라로 가서 마음껏 재미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허랑방탕하게 지내던 이 아들은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의 처지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여 빈들에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품꾼들도 양식이 풍부한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추하고 병든 몰골을 하고 비틀거리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환영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이 아들은 감히 아들로 대접받을 것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품꾼의 하나로만 받아주소서’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를 아들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한 이 아들의 마음은 한없이 평안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답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삶을 살아갈 때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인생의 불행과 비극은 다 길을 잘못 든 데서 비롯됩니다. 누구나 멸망 길로 가기를 원해서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하신 대로, 인생들은 다 길 잃은 양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택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멸망의 도시를 탈출하여 천성을 향하여 여행하던 중 속세 현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크리스찬을 본 속세 현자가 말합니다. “당신은 대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로 가는 것이요?”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이 보인다고요. 실은 가련한 신세올시다. 저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니 대답해 드리지요. 선생님, 저 쪽 작은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문까지 가면 내가 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분이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속세 현자는 크리스챤을 동정하면서 “이 길로 가면 짐을 벗을 수 있다고 누가 말해 줍디까?”라고 묻습니다. “전도자가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속세 현자는 전도자를 비난하면서 “애초 어떻게 그 짐을 지게 되었소?”라고 묻습니다. 크리스챤이 “성경책을 읽고 깨달은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자, 속세현자는 “내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소. 모든 연약한 인간들이 빠지는 함정에 당신도 빠진 거요”라고 말하며 짐을 벗어버릴 방도를 가르쳐 줍니다. 그가 소개해 준 것은 ‘도덕’이라는 마을에 사는 ‘합법’과 ‘예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세 현자가 가르쳐 준 대로 행하던 크리스챤은 곧 죽을 뻔한 큰 낭패를 만나고 그 길이 멸망의 길임을 깨닫고 돌이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자기의 의를 쌓는 길을 택합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살고 자선을 함으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라고 말씀합니다. 또 “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라고 했습니다. 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길은 하나같이 멸망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길을 잘못 든 사람들입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길은 볼거리가 풍부한 장터와 같아서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이곳저곳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즐기고 가라고 옷깃을 잡아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락에 빠져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니다보면 어느 새 노자는 다 떨어지고 해가 저물게 되듯이, 기력이 쇠하고 총명하던 지혜도 어두워지는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가서 당황하지만 때가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은 시대입니다. 티비의 광고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강한 자극을 많이 받은 나머지 이제는 웬만한 자극으로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강한 자극을 찾아 헤맵니다. 그래서 요즘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보듯이, 도착적이고 괴이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극은 인간들의 심성을 파괴하고 황폐케 만들고 맙니다. 거리건, 직장이건, 가정이건 평온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 평안을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올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수고하고도 주일이 되면 또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산과 들로 나갑니다. 오락장을 찾고 술집을 찾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하루 종일 방안에서 티비나 비디오를 봅니다. 그런 식으로 어찌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쉼은 몸과 영혼이 아울러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영혼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예배 후에는 집에서 조용히 육신의 안식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레저를 위해 여가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일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바른 답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본떠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길을 잘못 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한 평생 헛되이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낭비하는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행하심으로 언제나 마음의 쉼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는 참 평안이 없고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뿐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으며, 영생의 길을 걷게 된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삶의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아무쪼록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평안과 쉼을 누리실 뿐 아니라, 이 복된 소식을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불신 이웃에게 열심히 전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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