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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 21장(8) 드림과 나눔의 축복 (요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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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이한규목사

< 자녀의 위로자가 되어주십시오 >

미국에 소냐 카슨이라는 흑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13세에 처음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거남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곧 그 남자는 도망갔고, 그녀는 절망 중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환경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항상 꼴찌만 하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11살 때 친구와 말다툼 끝에 칼로 친구의 배를 찔렀습니다. 다행히 친구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학교에서 살인미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그래도 소냐 카슨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없을 때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아이가 있을 때는 웃으면서 아이를 위로했습니다. “벤! 너는 공부를 잘 할 수 있어! 힘들면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도와주실 거야!”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아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이 아들에게 꿈과 비전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할 마음이 생겼고, 공부를 잘하는 지혜와 집중력도 생겼습니다. 결국 그는 예일대학과 미시간 대학의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최고의 병원인 존즈 홉킨즈 대학병원의 소아외과 과장이 됩니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벤 카슨입니다. 미국 언론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지금도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기도의 손’은 ‘기적의 손’을 만듭니다.

요즘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위기 아닌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 아이들 공부가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 때도 힘들었고, 지금 취직이 힘들다고 하지만 옛날에도 취직은 힘들었습니다. 요즘 진짜 위기는 문제를 극복하는 정신적 능력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부모의 위로와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날, 한 회사 중역이 모처럼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한 직원이 나보고 감사하다고 이 파랑 리본을 달아 주더라. 그리고 리본 하나를 더 주면서 소중한 사람에게 달아주라고 하더라.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생각해보니까 바로 너였어. 아빠가 회사 일에 바빠 너랑 시간도 보내지 못하고 야단만 쳤는데 아빠를 용서할 수 있지? 아빠에게는 네가 정말 소중해!”

그러면서 아들의 가슴에 리본을 달아 주자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빠, 사실은 아빠가 저를 싫어하는 줄 알고 내일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죽지 않을래요.” 우리가 힘들 듯이 우리 자녀도 힘들어합니다. 그 자녀의 얼굴에 미소를 회복시키려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

오늘 본문에는 그런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7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요한의 “주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헤엄 쳐서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왔지만 바닷가에 놓인 숯불을 보면서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 전에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으니까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침묵을 깨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와!” 무거운 마음으로 “왜 배반했어! 왜 기다리지 못했어!”라는 책망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너무 편하고, 너무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은 “주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몇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위로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간접적인 위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로할 때 ‘위로하는 말’보다 다른 표현으로 하는 위로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삼가 심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상주의 손을 한번 꽉 쥐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선 얘기’로 제자들을 힘주시고 위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 하나는 있었는데, 그 마음도 자기들의 잘못된 행동을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그들이 가진 것은 그물에 가득 찬 고기뿐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아시고 예수님은 ‘고기 얘기’를 하시면서 제자들도 “우리가 주님께 드릴 것이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서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받을 생각만 하면 참 공허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묘한 힘이 솟습니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주님이 나의 동역을 원하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외면할수록 공허감과 불안과 우울함은 커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명에 헌신할수록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얼굴이 어둡습니다. 분명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명한 부모는 “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말해 봐!”하고 학교 일을 꼬치꼬치 캐물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 만약 아이 입에서 “선생님이 너무 불공평해요.”라는 말이 나오고, 그 말을 듣고 부모가 씩씩거리며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하면 그 아이의 교육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얼굴이 어둡다고 느끼면 모른 척 하고, 아이를 칭찬하려고 아이가 짧은 시간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쉬운 부탁을 합니다. “은혜야! 아빠 이것 좀 해줄래!” 아이들에게 그 “해줄래!”라는 말은 “해리포터 영화 보러 가자!”는 말보다 아이의 우울한 마음을 털게 하는 더 큰 파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빠의 요청을 아이가 해줄 때 “정말 고맙다!”고 말하면서 껴안아주면 금방 아이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이 그 상황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말로 그 침묵을 깨시고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과 능력과 자존감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실업자는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없는 영적 실업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하다못해 교회 설거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내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 작은 행동조차 얼마나 큰 행복의 조건이 되는지 모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2. 용서하시는 주님

주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말씀에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마음도 담겨 있지만 “내가 이미 너를 용서했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습니다. 그 용서를 통해서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암 덩어리를 제거하고 그들을 위대한 사명자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힘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영적인 거인이 되려면 ‘용서의 용광로’를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받고 용서하면 우리의 축복과 신앙성장을 막는 거대한 걸림돌이 제거될 것입니다.

용서(forgive)란 말의 원뜻은 ‘풀어놔주는 행위’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원수와 원수의 죄까지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붙들고 있으면 내가 불안하고 언젠가는 그 수류탄이 터져 원수보다 내가 먼저 죽습니다. 반대로 용서하는 마음은 ‘원수와 원수의 죄까지 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멀리 내던질수록 나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려면 원수 사랑과 용서는 필수적입니다. 장발장에서 장발장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지펠 형사가 프랑스 혁명으로 잡혀 죽게 되자 장발장은 자신을 지지자를 설득해 지펠 형사를 풀어줍니다. 그때 지펠 형사가 “나를 가장 죽이고 싶을 텐데 왜 살려주었느냐?”고 묻자 장발장은 대답합니다. “세상도 넓고, 바다도 넓지만 용서하는 마음은 더 넓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나중에 죽을 때 가장 후회가 되는 삶은 용서하지 못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도 결국 불행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암 덩어리가 계속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받고 그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한 사람은 누구보다 부자이고 누구보다 행복한 자입니다.

3. 헌신을 원하시는 주님

본문에서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는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는데, 성경학자들은 그 숯불 위에 올려놓은 생선이 한 마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줄 생선을 다 준비하여 구워 놓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실 수도 있지만 우리 것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일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주님은 친히 오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지만 어린아이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은 고기를 가지려고 제자들에게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구운 고기로 되돌려 주시려고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것을 내어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헌신이 없는 부, 쓰임 받지 못하는 축복은 오히려 진노의 제목입니다. 드림이 없는 삶에는 과시는 있겠지만 보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험이 없이 성공이 없고, 투자가 없이 이익이 없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 드림이 없는 은혜와 축복은 없습니다.

< 드림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

요새 왜 많은 가정이 붕괴됩니까?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때 연주되는 결혼행진곡의 가사는 “행복의 문 열리어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이제부터 고생문이 열렸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헌신이 없으면 정말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왜 어떤 집은 돈도 많고 행복한 조건이 많은데 이혼을 합니까?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헌신에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이 없으면 축복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헌신해야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헌신해야 사람도 얻고, 행복도 얻고, 성공도 얻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공허감은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나로부터 나가는 것이 없으면 내 안에 꽉 차는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외로움도 헌신하라는 싸입니다. 헌신해야 진정한 친구도 생깁니다.

행복과 축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는 행복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조건은 내 안에 있고, 나의 태도 속에 있습니다. 내 안에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행복의 심지를 가다듬는 것이 행복의 조건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낫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10개 있어도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고, 행복의 조건이 하나뿐이라도 나누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삶의 구조조정에서 나옵니다. 10개의 축복의 조건을 5개로 줄이면서 드림과 헌신을 실천할 때 진정한 행복은 찾아옵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삶의 구조조정을 통해서 축복 받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떠나야 삶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고, 내 것을 자르는 용기 있는 헌신이 있어야 더 많은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그가 소명을 받을 때 그는 열 두 겨릿소, 즉 24마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거부였지만 엘리야가 부르니까 고생길이 훤해도 즉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소 두 마리를 잡아 소의 기구를 불사른 불로 고기를 삶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즉시 엘리야를 따릅니다. 아예 미련이 남지 않도록 옛날의 거부생활로 돌아갈 다리를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런 헌신으로 그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림이 없이 은혜를 받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드리지 않고 받기를 원하는 것을 기복주의인데, 기복주의의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땀이 없는 성취는 없고, 드림이 없는 은혜는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기쁘게 드리면 지금보다 갑절의 영감과 축복과 열매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눔이 없으면 축복도 없습니다 >

그처럼 주님께 드리는 일이 없으면 축복이 없듯이 이웃과 나누는 일이 없어도 축복이 없습니다. 사실 주님께 드리는 것만큼 이웃과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받기는 좋아하고 주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주는 삶’은 성숙한 인격의 표시이고 은혜의 표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위대함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 이웃과 좋은 것을 나누려고 할 때 드러나게 됩니다.

옛날에 “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지만 너무 소극적인 말입니다. 우리는 ‘황금을 외면함’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황금을 나눔’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황금을 생명처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돈을 돌처럼 생각하고 소유 자체를 멀리할 것이 아니라 돈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생명을 나눠주겠다는 듯이 자기의 소유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돈도 나눠줍니다. 돈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쓰고 사치스런 일에 쓰지만 돈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돈을 잘못된 것에 쓰지 않고 좋은 일, 뜻 깊은 일,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려면 물질을 생명처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생명처럼 여길 때, 생명처럼 귀하게 사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생명처럼 여기고 나눠주면 우리가 물질을 나눔으로 생기는 빈자리는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한 영적인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물질을 생명처럼 귀하게 관리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 물질을 쌓아놓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독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돈을 선하게 쓰기로 작정하면 돈은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와 구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큰 관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돈을 버는 것도 선하게 벌고 쓰는 것도 선하게 씁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버는 것도 악하게 벌고 쓰는 것도 악하게 씁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물질을 모으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대개 구분됩니다.

나누는 삶에 사람다움이 있고, 성도다움이 있습니다. 짐승은 먹을 것을 보면 자기만 먹으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밥상을 앞에 놓고 함께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 다릅니다. 천국이 어디입니까? 나누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 마음에 언제 천국이 이루어집니까?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이제 조용히 나누는 삶을 최대의 관심거리로 삼으십시오. 우리가 돕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안락함을 포기하고 복음의 최전선에 가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후방에서 최선을 다해 기도해드려야 합니다.

지금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이 소규모로 3개의 중국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 작은 동참을 해보십시오. 1개 교회는 ‘김사무엘 목사님 기념교회’로 거의 건축을 끝냈고, 2군데에서는 계속 추진 중에 있습니다. 후베이성 엔시에 있는 교회에서는 120명의 중국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처소가 없어서 총 6만 1천 달러의 예산을 세우고 건축을 추진 중인데 약 1만 달러가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런 기도제목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 1달여 전에 요한복음 21장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이 너무 감동에 젖어서 저희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해서 낙심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선교위원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그 기도제목을 따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책을 통한 말씀선교가 의외로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파급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책 한 권의 봉헌’에 한 사람이라도 나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제 곧 C&MA 8호 한국인 선교사로 이영동 선교사님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슬렘권의 가장 위험 지역으로 들어가시는 이영동 선교사님과 사모님을 위해서도 기도와 후원의 손길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리 없는 헌신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 그 말씀에 응답하여 내 것을 드리고 나눌 곳을 열심히 찾아보시고 조용히 드리고 나눔으로 천국의 삶을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http://www.john316.or.kr

< 단행본 출판에 관한 말씀 >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모토로 삼아
말씀으로 사랑을 전파하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요삼일육선교회에서는
이한규 목사님의 ‘요한복음 21장 강해’를 단행본으로 출판하려고 합니다.
출판 동기와 취지는 요한복음 21장 첫 번째 강해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말씀이 은혜가 되어 보다 많은 분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출판에 동참하고자 하는 감동이 있으신 분들은 함께 해주세요.
문의 : 이한규 목사님(017-705-4347) [email protected]
후원 :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 출판후원 명기

위에 게시한 요한복음 21장 연속 설교는
책 출간을 위한 저작권 보호를 위해 설교의 전문은 일주일 동안만 게시하고
그 다음 주간부터는 설교의 일부분만 발췌해서 게시하기로 했습니다.
그 점을 양해해주시고 좋은 책으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 요삼일육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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